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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략

3불 전략

by Diligejy 2022. 3. 20.

 

 

p.7

과연 지압 장군이 강대국들을 연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부족한 물자와 취약한 군사력으로 미국 같은 초강대국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같이 강한 군대와 싸우면서 우리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세 가지를 하지 않았어요. 우선 적들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그들이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p.17

강한 상대를 이길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적이 원하는 시간을 피해서 싸우는 회피 전략은 현명함의 극치요, 강력한 전쟁수행 방법이다. 회피 전략을 쓰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비겁하다는 주변의 비난을 이겨내야 하며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까지 숨죽이며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 수많은 도전자들이 대항할 힘조차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강력한 적에게 성급하게 공격하다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정면승부가 항상 좋은 것만 아니듯이 회피가 나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강자를 이긴 장군이나 경영자들은 적을 쓰러뜨리는 시간활용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면 때로는 느리게 공격하고, 때로는 피할 줄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겁쟁이처럼 보였지만 불리한 싸움에서 자신의 의도대로 시간을 지배한 것이다. 객관적 상황으로 볼 때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일단 몸을 피한 후 힘을 기다릴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강자를 이긴 장군들처럼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지난한 전쟁에도 지치지 않고, 거대기업을 이긴 경영자들처럼 사업이 성공할 때까지 한 세대를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

 

p.24~26

지압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위해 10년을 준비했다. 베트민을 창설할 때만 해도 디엔비엔푸에서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겠지만, 그는 프랑스와 정면대결을 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프랑스의 탄압을 피해 북쪽 산악 지대에서 숨어 지냈던 지압은 주변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부족민들을 설득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민족이었기 땜누에 문화뿐만 아니라 언어도 달랐다. 베트남에 대한 독립 의식 또한 있을 리 없었다. 지압과 그의 부대원들은 낮에는 촌락민들과 생활하면서 농사나 가옥 수리 같은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리고 이들의 언어를 익히면서 그들에게 독립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여러 부족 언어로 된 간단한 신문을 만들어 돌렸으며, 문맹자들을 위해 외우기 쉬운 노래를 만들어 가르쎠다. 점차 지압에게 마음을 여는 부족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고, 2~3년 만에 북쪽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부족은 베트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베트남 전역에서 독립투쟁을 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병사가 모자랐기 때문에 베트민은 소수민족, 어린이, 여성, 나이가 든 남자 할 것 없이 싸우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다 받아들였다. 결국 수적으로는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군대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오합지졸 같았지만, 지압 장군은 10년을 내다보고 이들을 양성했다. 단, 프랑스군과 국지전을 벌일 때는 되도록이면 적은 수의 군대로 게릴라전을 펼쳤으므로 베트민의 군대 규모는 오랫동안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프랑스 정보부대의 예상과 달리, 실제로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여한 군인만 5개 사단으로 6만 명이 훨씬 넘었다. 진지를 지키고 있는 1만 5천 명의 프랑스군이 자기네보다 4배나 많은 베트민을 보고 당황하여 우왕좌왕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압 장군은 이러한 때를 기다리며 베트민의 규모를 일부러 노출시키지 않았다.

 

무기나 화력도 마찬가지였다. 지압 장군이 베트민을 창설할 때는 프랑스군이 버리고 간 고장 난 총이나 지뢰를 분해하여 무기를 만들었다. 1949년 이후에야 중국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현대식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 전에 이미 800문의 기관총과 수천 자루의 자동소총, 수백만 발의 탄환 외에도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큰 105밀리 곡사포와 75밀리 대포를 200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지대공 미사일로 폭격기의 공습에도 대응했다. 지압 장군은 이전의 어떤 전투에서도 105밀리 곡사포를 사용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 모든 것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위함이었다.

 

p.30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수석과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베트남 전쟁을 정치 일선에서 경험한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말했다.

"베트콩에게는 지지 않는 것이 곧 승리를 의미했지만, 미군은 이기지 않는 한 패배하는 전쟁이었다."

 

p.33

회피 전략을 활용해 기습을 하려면 네 가지 세부 지침을 알아야 한다. 첫째,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려라. 둘째, 싸움을 길게 내다보라. 셋째,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어라. 넷째, 전투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핵심은 부족한 자원과 전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다리는 걸 참지 못하며 욕구가 최대한 빨리 충족되기를 바란다. 이는 힘이 없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약점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에 쉽게 곤경에 빠진다. 승자가 되려면 참고 기다리며 기회를 포착해 적의 허를 찌를 시간을 버는 것이 필요하다.

 

p.45-46

한국 시장에서 실력을 쌓은 삼성전자는 1997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처음에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휴대전화를 판매하지 않고 통신사업자에게 공급하면서 미국 시장을 장악한 모토로라와 정면대결을 피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무선통신은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미국 퀄컴에서 개발한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 기술을 활용한 것이었고, 미국은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s, 모뎀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화단말기와 팩시밀리, 랩톱 등에 직접 접속하여 이동데이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유럽식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 방식과 CDMA 방식을 다 쓰고 있었다. 그래서 삼성전자는 CDMA 사업자인 스프린트에 휴대전화를 제공하고, 이 회사는 대리점에서 가입자를 유치할 때 삼성전자 휴대전화를 선택하도록 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애니콜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통신회사를 믿고 제품을 구매했다. 이렇게 해서 첫 해에만 43만 대를 수출했다. 한국 시장에서 이미 품질이 입증됐기 때문에 미국의 통신회사도 만족했다. 그러던 중 2000년 수신부가 상단으로 젖혀지는 플립업(flip up) 전화기가 미국 시장에서 히트를 쳤다. 한국 시장에서는 크고 무거워서 실패한 제품이었으나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디자인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아 450만 대가 넘게 팔린 것이다.

 

이렇게 애니콜 브랜드를 인지시킨 후,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유통점 비중을 늘려나갔다. 동시에 첨단기술이 탑재된 휴대전화를 최초로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3년에 출시된 매트릭스폰처럼 수익 기여도는 높지 않지만 소비자에게 첨단 제품으로 인식될 만한 휴대전화를 지속적으로 개발했다. 자연히 미국 시장 내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꾸준히 상승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11년 만인 2008년에는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유럽 시장에도 진출하여 성공했으며, 세계적으로 1천만 대 이상 팔린 제품을 여러 개 만들어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2007년 이후 노키아에 이어 세계 2위의 휴대전화 제조사가 되었다.

 

p.51-52

디엔비엔푸 전투를 치르기까지 지압 장군은 10년을 준비했다. 그는 북쪽 국경지대에서 소수민족을 규합하여 베트민을 늘려갈 때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전쟁이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군을 무찌른 후 미군과의 전쟁은 더 길게 보았다. 실제로 지압 장군과 베트남 사람들은 1965년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자 2000년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여겼다.

 

강자와 싸울 때는 외부 상황도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싸움, 즉 초조함을 극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바쁠수록 돌아가야 하고, 상황이 불리할수록 마음을 비우고 길게 봐야 한다. 지압 장군이 조급한 마음에 전투를 하루빨리 끝내려고 했다면 분명 대패했을 것이다. 지압 장군은 적이 아니라 시간과 싸웠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성질이 급한 편이다. 강자들과 싸울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목표가 정해지면 주어진 방향대로 빨리 실행하도록 닦달한다. 하지만 인내심을 배우면 고려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늘어난다. 사소한 전쟁을 치르느라 기력을 소모하는 대신 적절한 순간을 위해 에너지를 아껴두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명확히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p.57-59

19지금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합작회사가 주인인 에어버스사에 납품하는 탄소섬유가 도레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개발에 들어간 지 40년, 상업 생산을 시작한 지 30년을 기다린 끝에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도레이의 한 경영진은 탄소섬유 사업에 대해서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탄소섬유는 30년 이상 신소재라고 불렀어요. 30년이면 다른 분야에서는 수많은 제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간인데, 탄소섬유는 항상 신소재였습니다. 예상되는 용도가 광범위한데도 우리의 생각만큼 수요가 늘어나지 않았어요."

 

이런 여유는 웬만한 기업에서는 볼 수 없다. 당신이 30년 후에나 터질 사업을 담당하게 됐다고 생각해보라. 게다가 수년 내에 시장이 생길 가능성마저 희박하다. 이런 사업을 맡아서 열심히 할 수 있겠는가. 매출도 늘고 성과가 있어야 승진도 하고 보람을 느낄텐데, 한순간에 사업이 정리되어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한직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아마 눈치 빠르고 똑똑한 직원이라면 이런 사업에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이 사업을 담당하게 된 사람들도 기회만 되면 다른 사업부로 옮겨달라고 할 게 뻔하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잦으면 결국 사업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도레이는 반대로 했다. 마에다는 탄소섬유 개발을 주도했다. 1970년대 말 공장에 대규모 생산설비를 도입할 때도 주역으로 일했다. 그가 CEO가 된 후에는 "철, 플라스틱 시대 다음은 탄소섬유 시대"라고 하면서 꾸준히 생산성을 개선하여 가격 인하를 추진했다. 하지만 15년 이상 시장이 커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에다는 도레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가 됐다.

 

그가 탄소섬유 사업에서 성공한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사업을 멀리 내다보았다는 점이다.

 

"탄소섬유에서 이익을 내는 데 약 20년이 걸렸습니다. 획기적인 소재 개발을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해요. 중요한 것은 그 소재의 향후 장래성을 얼마나 잘 판단하느냐에 달렸어요."

 

도레이를 비롯하여 히든 챔피언 기업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사업을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통상 1년 단위로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히든 챔피언들의 목표 기한은 매우 길다. 화폐 제조를 하는 한 히든 챔피언 기업 CEO의 말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연도가 아니라 세대로 생각합니다. 회사가 다음 분기에 잘 될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세대를 이어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속성에 대해 생각합니다."

 

p.68-70

모토로라는 해외 시장에서 노키아와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미국 시장에서는 신생기업과 전투를 치러야 했다. 노키아는 생산 효율성으로 고품질의 휴대전화를 저가에 만들어 공급하면서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한국 기업은 가격은 비싸지만 첨단 기능으로 무장한 휴대전화로 소비자를 유혹했다. 모토로라는 단독으로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진영과 맞서 싸워야 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내놓지 않고서는 샌드위치가 된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저폰을 개발했다. 2004년 출시된 레이저폰은 세계 시장에 슬림 돌풍을 몰아치면서 1억 대 이상 팔려나갔다. 당시 휴대전화는 더 나은 기능을 첨가하는 방향으로 신제품이 개발됐다. 어쩔 수 없이 제품이 커지고 두꺼워졌다. 반면 레이저폰(laser phone)은 필요 없는 기능은 과감하게 버리고 디자인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소비자들은 레이저폰을 신선하게 여겼고, 모토로라는 중흥기를 맞을 만큼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디자인은 휴대전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에 힘입어 삼성전자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시장점유율도 다시 20퍼센트를 넘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토로라의 후속 제품은 모두 레이저폰과 비슷했다. 하지만 휴대전화 시장의 유행은 매우 빨리 바뀌었다. 얇고 날렵한 레이저폰의 디자인은 2년 만에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다. 소비자들은 디자인이 고만고만한 모토로라의 제품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수시로 새로운 디자인의 휴대전화를 출시하는 삼성전자에게 추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모토로라는 레이저폰을 선택하여 한국 기업의 추월을 막아냈지만, 레이저폰을 만병통치약으로 삼아 모토로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모토로라의 악수는 조급증 탓이다. 선두 쟁탈전에서 패하고, 후발주자와의 싸움마저 불리하게 돌아가자 서둘러 뭔가 큰 것을 터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노키아 같은 강자와의 싸움에서 진 것은 시장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과거에는 경쟁 상대로 여길 수도 없었던 삼성전자에게 추월당하자 조바심이 생긴 것이다. 자존심도 상하고,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휩싸이면 제대로 된 전략을 구상하기 어렵다. 모토로라는 결국 자만심과 조급증에 의해 시장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p.104-105

미군은 항상 정글과 농촌에서만 국지전을 벌이던 지압 장군의 게릴라군들이 도시를 공격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오로지 이전의 프랑스군의 실패를 거울삼아 케산만 전력을 다해 지키면 단번에 베트남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지압 장군이 정작 노리고 있던 도시는 내버려두고 케산에 주력하였기에 결과적으로는 북베트남 공격에 도움만 준 셈이다.

 

누구나 자신이 유리하다고 여기는 전장에서 싸우기를 원한다. 하지만 도전자의 입맛대로 전쟁터를 고르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강자가 익숙한 곳에서 싸우는 게 일반적이다. 이에 도전자가 쉽게 응하면 백전백패하게 된다. 강자의 땅을 기웃거리다가 참패당하지 말고 당신이 선택한 전장에서 싸울 수 있도록 상대를 유인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전투에 응하되 그 전투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은 대기업과 싸우게 됐을 때 문제의 핵심을 환원시켜 승리하는 전략을 세웠다. 친환경적인 자사 제품이 비싼 이유는 유기농 원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표방한 것이다. 만약 홀푸드가 대기업에 맞서 가격인하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대기업의 자금력에 금세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듯 상대가 편한 장소에서 늘 하던 방법으로 싸우게 내버려두면 분명히 패하게 된다. 이미 미국의 식품업체들은 자금력으로 신생기업들이 살아남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하는 전략들을 계속 사용해왔다. 그 방법대로 맞선다면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홀푸드는 오히려 소비자들의 건강을 생각하는 기업으로, 도덕적인 기업으로 인식되어 성공했다. 

 

p.118~119

흔히 한 기업에서 새로운 제품을 출시할 때, "이 제품은 경쟁사의 제품보다 어떤 점에서 더 좋은가?"라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이는 안이한 생각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대기업과의 기술적인 차별화를 두는 것보다는 전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자금력과 기술력이 풍부한 대기업보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격이나 다름없다. 그보다 대기업이 넘보지 못할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 더 빠르며, 절대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시하는 제품이 최초가 될 수 있는 영역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자.

 

"이 제품은 어떤 점에서 최초인가?"

 

p.158~159

미군은 전투를 이김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했지만, 지압에게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다. 구정 공세 이전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케산 전투가 끝난 이후 상황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북베트남군은 케산에서 물러갔다. 미군은 케산을 빼앗기지 않고 이겼다고 기뻐했지만, 케산 기지가 더는 쓸모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그 기지를 포기한 것이었다. 기자들은 케산 전투를 지휘했던 론스 대령에게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언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나"라고 물었다. 론스 대령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적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부질없음을 우리가 그 곳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지압 장군은 케산 공격과 연이은 구정 공세에서 미국인과 세계인들의 여론을 움직이고자 했다. 하지만 미군은 당장 북베트남군과의 전투에만 몰두했다. 미군은 자기들이 전투에 이겼으며,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환호했다. 웨스트멀랜드 장군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베트남전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습니다. 중대 단위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맞붙은 곳에서는 모두 이겼습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도 물론 이겼죠."

 

물론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지압 장군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지압 장군은 <전쟁론>을 쓴 프로이센의 군사학자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지압 장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군은 자신들의 한계를 몰랐어요. 자신들의 약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미국이 패한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 약점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p.170~171

자니베크는 카파 성의 사람들이 다 죽어간다는 보고를 받고 말을 돌려 그의 궁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역병으로 오염된 카파 시내를 돌아다니며 승리를 자축하기에는 킵차크 군대의 피해도 너무나 컸다. 하지만 자니베크의 첫 번째 전쟁은 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역병이 바로 흑사병이다. 1347년 카파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이탈리아로 가는 배에 올랐다. 흑해를 건너 지금의 이스탄불인 코스탄티노플로 갔다가 지중해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들과 함께 흑사병도 유럽으로 전파됐다. 배 위에서도 사람들은 흑사병으로 죽어갔다. 제노바나 시칠리아 또는 베네치아에서 이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흑사병은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흑사병은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중부 유럽과 북유럽에 순식간에 퍼졌다.

 

아마도 이보다 더 잔인하고 냉혹하며 창의적인 전략은 전쟁사에 없을 것이다. 비록 상처뿐인 승리였지만 자니베크는 전쟁의 방식 자체를 바꾼 혁파 전략가라 할 수 있다. 고전적인 무기가 아니라 시체로, 정확히 말하면 세균으로 적을 몰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하루하루 치르는 전투의 개념에서 벗어나 전쟁의 목적을 다시 정립했기에 가능했다.

 

p.176~178

1902년 설립된 펩시는 선두업체 코카콜라에 뒤져 만년 2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펩시의 역사는 코카콜라에 대한 도전이라 할 정도로 두 회사의 전쟁은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갔다. 줄곧 코카콜라가 앞서고 펩시가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1950년대 이전에는 두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5배 이상 벌어질 정도로 입지 차이가 컸다. 1950년대 펩시는 코카콜라 임원과 개발자들을 스카우트하여 코카콜라와 전면전을 치렀다. 그러나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펩시는 1960년대 '펩시 제너레이션' 캠페인을 시작했다. 진부한 코카콜라와 달리 펩시는 진취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과 어울린다는 마케팅을 실시하면서 젊은 층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1970~80년대에는 '펩시 챌린지'를 기획하여 코카콜라와의 점유율 차이를 좁혀나갔다. 펩시의 시장점유율 잠식에 위협을 느낀 코카콜라도 펩시를 의식해 이에 대응하는 광고를 하거나 신제품을 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다각도의 노력 끝에 코카콜라는 1990년대 들어 다시 격차를 벌리며 시장 지배를 확고히 했다. 시장점유율 격차도 20년 전과 다름없이 벌려놓으면서 언론에서는 '100년 콜라전쟁'에서 코카콜라가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펩시는 더는 탄산음료 시장에서 싸우지 않기로 했다. 이후 건강음료와 스낵에 집중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했다. 스포츠음료와 주스업체를 인수, 게토레이와 트로피카나 같은 음료를 출시하여 시장에 승부수를 던졌다. 동시에 다양한 브랜드의 스낵을 출시했다. 또 웰빙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트랜스 지방이 없는 제품을 생산했으며, 건강에 좋은 원료로 제품을 만들어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웰빙 바람을 타고 음료 시장에서 탄산음료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으며, 펩시 제품의 판매는 호조를 이어갔다. 2004년에 펩시는 코카콜라의 매출액을 앞질렀고, 2005년 말에는 드디어 코카콜라의 시가총액을 따돌렸다. 2009년 펩시는 연 10억 달러 이상 판매되는 브랜드를 18개나 보유했으며, 23개를 보유한 P&G에 이어 세계 2위의 브랜드 기업이 됐다.

 

코카콜라는 펩시의 이런 혁신적인 전략을 뒤늦게 간파했지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코카콜라' 브랜드가 너무나도 강력해 소비자들의 머릿속에는 '콜라=탄산음료'로만 기억됐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는 건강음료나 과자와 연결될 수 없는 한정된 브랜드로 입지가 좁아졌다. 비탄산음료 시장이나 과자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하려고 해도 일등 브랜드의 영광이 도리어 장애가 되고 말았다. 펩시는 이 부분을 미리 노려 콜라 시장을 내주고 건강음료 시장과 식품 시장을 선점, 확보한 것이다. 

 

마치 지압 장군이 미국과의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는 이긴 것처럼 펩시도 콜라 전쟁에서는 지고 음료 사업에서는 이겼다. 지압이 베트남만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 상황과 결부시켜 전쟁의 향방을 가늠했던 것처럼, 펩시도 탄산음료뿐만 아니라 소비자들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건강음료에 대한 수요를 먼저 읽고 대처한 결과 만년 2인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p.190~191

많은 기업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를 덮는 데만 주력한다. 고객이 이탈하거나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면 마케팅 비용을 더 많이 집행한다. 가장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응급 처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의 근원을 제거할 수 없다.

 

20년 남짓한 웅진코웨이의 역사에서 위기는 10년마다 한 번씩 찾아왔다. 그러나 웅진코웨이는 위기를 계기로 도약했다. 렌탈 사업에 진출할 때도, 페이프리 서비스를 실시할 때도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기에 가능했다. 다른 기업들이 흔히 하듯이 위기를 참고 견뎌 내성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사업 방식을 혁신하여 새롭게 거듭났다. 정수기를 제조하던 웅진코웨이는 제조업 마인드를 버리고 서비스 기업으로 나아갔고, 수백만 고객을 나 혼자 선점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픈 마인드를 가지자 네트워크 기업으로 진일보할 수 있었다.

 

흔히 사업 방식을 바꾼 사례로 델 컴퓨터가 자주 등장한다. 유통과 대리점을 통해 판매되던 컴퓨터를 직접 주문 방식으로 판매하여 컴퓨터 사업을 제패한 델 컴퓨터는 교과서에 실린 경영 사례의 고전이다. 그러나 델 컴퓨터의 혁신적인 사업 모델은 웅진코웨이와는 전혀 다르다. 델 컴퓨터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지만 웅진코웨이는 환경 변화에 따라 사업 방식을 바꿔 진화했다.

 

델 컴퓨터는 기존의 컴퓨터 업체들이 하던 생산과 유통 방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카탈로그에 의한 주문 판매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어 이 회사의 성장과 맞아 떨어졌다. 당시에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정보통신산업 환경이 바뀐 지금 델 컴퓨터는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범용화되고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대부분의 컴퓨터 업체들은 정보시스템 솔루션을 제공하는 서비스 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유통과 서비스 역량이 취약한 델 컴퓨터는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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