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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화로 영화 읽기 영화로 인간 읽기

by Diligejy 2022. 4. 3.

p.20

사랑은 맹목적이고 돌발적이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신은 큐피드가 맡고 있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되면 신이건 사람이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맹목성은 큐피드의 예측할 수 없고 장난기 어린 행동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큐피드의 화살로 가장 큰 곤욕을 치른 것은 태양의 신 아폴론이다. 여기서 아폴론이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기도 하지만, 제우스의 가장 총애받는 적자이며 논리성과 합리성을 대표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자신의 아들 디오니소스는 멀리했지만, 아폴론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총애했다. 이런 아폴론도 결국 큐피드의 화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p.21~22

이런 사랑의 작용은 해부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뇌에는 변연계(뇌의 기저 부분과 후뇌의 바로 뒤에 위치)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부분을 조절하는 대뇌피질과 변연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변연계는 대뇌피질과 일방적으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그래서 변연계는 대뇌피질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감정은 이성을 지배할 수 있지만, 이성은 감정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는 얘기다. 즉 사랑에 있어서 논리적인 판단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p.25

사막은 일부 특수한 생물을 제외하고는 어떤 생물도 살기 힘든 척박한 곳이다. 건조하고 물기가 없는 저주받은 땅이 바로 사막이다. 이곳에서 캐서린과 알마시는 만나 사랑을 시작하고 그 종말을 맞는다. 그러나 사막은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막은 그들이 선택한 불륜의 사랑을 정화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사막은 서양에서 예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았던 저주받은 땅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기 위해 신이 현시한 장소이기도 하다. 사막은 바로 신이 현시한 곳이자, 가장 순수한 장소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p.27

알마시가 캐서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불륜이 남편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그 시대가 전쟁중이 아니었다면?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에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단지 헤로도토스의 말대로 "우리의 운명은 우연과 운명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것이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변일 듯 하다.

 

p.32

이 영화는 평범했던 한 여성의 돌발적인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럼 왜 아무 문제없이 10년 동안 성실히 회사를 다녔던 마리온이 4만 달러를 횡령했을까? 일상생활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던 사람들이 갑갑함을 떨치기 위해 벌인 일탈치고는 너무 커다란 사건이다. 그녀가 돈을 훔치게 된 이유를 우선 그녀의 주변 환경에서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지금까지 마리온은 그녀의 남자친구 샘과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희망없는 이런 관계에 지친 마리온은 샘과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청산하려 하자 정신적인 공백이 생긴다. 그녀는 이 공백을 돈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이제 다시 혼자가 된 마리온은 돈이 상징하는 힘과 권력이 갖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이런 엄청난 행동을 하도록 그녀를 자극했던 4만 달러라는 돈이 거래처 사장 딸의 결혼식 준비자금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 마리온의 부모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실종되었을 때 그녀를 찾는 것은 여동생뿐이다. 여기서 4만 달러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상징한다. 고아나 다름없는 마리온은 이 돈을 통해 부모의 사랑을 빼앗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식으로 축복받는 결혼을 할 거래처 사장 딸의 운명을 가로채고 싶은 욕구도 작용한다.

 

p.34

새는 예로부터 영혼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상가에 새가 나타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족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박제가 된 새는 노먼 안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영혼을 의미한다. 또한 박제가 된 커다란 새는 미라가 된 어머니의 시신을 상징하는데, 히치콕은 노먼이 어머니의 감시를 받고 있으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이 새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p.39

어머니들이 맹신하는 전문가들의 이론이 영원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실제로 자녀양육 이론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으며, 과거에 진리라고 여겼던 이론들이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갓난아기를 너무 안아주거나 신체적으로 접촉하면 아이가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아이를 방치하려고 했다. 심지어 대소변가리기를 생후 두 달 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고문에 가까운 배변가리기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자녀양육은 사회구성원 누구나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상식 선에서 이루어질 수 있따면 충분하다. 실제로 아이들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천사나 악마, 아니면 천재를 아이의 그림 판에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이 직접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미 어느 정도 밑그림은 가지고 태어나며 능동적으로 어머니와 반응하며 커간다.

 

p.46

오르페오는 파니 핑크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겁내지마."
"과거는 죽음 뒤의 뼈 같은 거야. 미래가 네 앞에 있어."

"계속 앞으로만 가. 시계는 보지마. 항상 지금이란 시간만 가져."

 

p.57

오르페오가 병들었을 때 파니 핑크가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것은 파니 핑크 안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니 핑크 안에 존재하는 상처받은 오르페오, 오르페오 안에 존재하는 외로운 파니 핑크. 너무나 보기 싫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 안의 나약하고 못난 부분을 파니 핑크는 이제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둘은 영화의 후반부에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는 포옹을 할 수 있었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남에게서 사랑받기만을 갈구했던 과거의 모습을 버린 그녀는 이제 외롭지 않다. 남들이 다 떠나버리더라도 최후까지 남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니 핑크는 죽음 같은 외로움에서 벗어나, 이제 그녀를 둘러쌌던 갑옷 같은 관을 아파트 밖으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p.59

연금술에서는 술을 불과 물이라는 양극단이 결합된 '생명의 물'이라고 보았다. 즉 상반되는 것의 결합과 일치를 상징한다. 창조와 파괴 두 가지 상태를 모두 가지는 남성과 여성, 능동과 수동을 나타내기도 한다.

 

p.60

성서외전에서 노아는 술주정뱅이로 명확히 기록되어 잇는데, 그건 포도주를 만들 때 사탄과 함께 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탄은 포도 나무 뿌리에 도살한 어린 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의 피를 쏟아부었다. 그래서 술을 조금 맛보면 어린 양처럼 결백해지고, 적당히 마시면 사자처럼 강해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마시면 돼지와 비슷해지고, 대취하면 원숭이처럼 되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날뛰며 외설스러워진다.

 

p.67~68

헤라 여신이 디오니소스를 박해한 것은 그녀의 특성 때문이다. 헤라는 가정의 구성과 이의 유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가정의 해체나 분열을 가장 싫어한 헤라가 이를 위협하는 존재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제우스의 잘못으로 시작된 고통이지만, 자신의 가정에 끼여든 세멜레와 그녀의 아들에 대한 헤라의 복수는 그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므로 그녀는 디오니소스를 끝까지 쫓아다니며 복수한다.

 

그렇다면 벤을 박해하고 있는 헤라 여신은 누구인가? 현대에도 여전히 가정은 가장 소중하며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는 가정을 해체시킨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 여전히 이혼한 사람에 대해서는 편견이 따라붙으며, 가정을 잘 이끌어가지 못하는 가장은 사회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p.69~70

벤은 세라를 천사라고 부른다. 창녀가 천사라니? 가장 비천한 것은 가장 신성한 것과 통한다고 했던가? 기독교 보급 초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성 아프라, 성 펠라기아, 성 타이스, 이집트의 또다른 마리아 등이 창녀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자리에 오른다. 심지어 신성매춘이라고 해서 한때 매춘의 신을 섬겼던 적도 있다.

 

디오니소스가 저승에 가서야 어머니를 만났듯이, 벤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위치한 세라를 통해 어머니를 볼 수 있었따. 세멜레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 눈을 감아야 했던 상처받은 어머니인 것처럼, 세라는 가장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착취까지 당하는 상처받은 어머니인 것이다. 

 

세라가 벤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모성상의 대치물이라고 볼 수 있는 또다른 이유는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내팽개친 그를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사회적인 가치 기준과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p.73~74

신발(구두)은 어떤 사람이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를 상징한다. 자신의 신체인 발과 현실을 상징하는 땅을 이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에서 신발을 잃고 찾아헤매는 꿈을 꾸는 경우, 대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혼란 상태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신데렐라의 구두는 유리로 되어 있다. 유리구두는 투명하고 깨지기 쉬운 재질로 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신고 다니면 무척 불편하다.

 

앞에서 구두가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를 상징한다고 했는데, 유리 구두를 신었다는 건 매우 연약하고 깨지기 쉬우며 부적응 상태에 있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를 왕자가 애타게 찾았다는 사실은 예전에는 유리구두처럼 매우 연약하며 불편한 구두를 계속 신고 다녀야만 하는 비현실적이고 인내하는 여성상을 가장 이상적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데렐라>는 이런 가부장적인 남성들이 원하는 순종적인 여성상을 극명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p.102~103

희생양이란 말은 고대 헤브루의 희생양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원래의 헤브루 의식에서는 두 마리의 양과 두 명의 신이 등장한다. 첫 번째 신은 선한 신인 야훼였고, 두 번째 신은 아자젤(Azazel)이다. 아자젤은 원래 선한 천사였으나 인간 여성의 관능적인 매력 때문에 지상으로 내려온 후 야훼에게 대항한다. 또한 아자젤은 여성에게는 화장을 가르쳐서 성욕에 눈뜨게 하고 남자에게는 무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자젤은 인간과 신에 적대적인 악마, 사탄의 대명사가 되고 만다.

 

헤브루의 희생양 의식을 보면, 첫번째 양은 야훼에게 바쳐졌는데 양을 죽여 흘린 피는 야훼의 사원을 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피는 분노한 신을 달래고 이스라엘의 더러운 자손과 그들의 비행과 모든 죄에 대한 속죄물로써 바쳐졌다. 이 양의 시체는 사원 밖으로 보내져 불에 태워진다. 두 번째 양은 아자젤에게 바쳐졌는데, 제사장은 이 양의 머리에 대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 모든 비행과 모든 죄는 이곳에 들어가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잘못을 안은 이 양은 사막으로 보내진다. 이 양은 사막을 떠돌다 결국은 죽고 만다. 이처럼 희생양은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된 동물을 의미했다.

 

여기서 아자젤은 야훼의 건전하고 올바른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악마가 존재하지 않으면 선한 야훼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악행과 비행, 잘못 등 자신의 그림자를 모두 희생양에 투사하고 희생시킨 후 사막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이제 이들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p.106

정말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바로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격의 '그림자'에 매혹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진 억압된 분노와 공격성의 그림자가 귀신으로 등장해서 마음껏 자신의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준다. 

 

p.108~109

이 영화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은영이 자신의 모교로 발령 받으면서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 하필 은영은 자신이 다닐 때 커다란 상처를 주었던 모교에 부임했던 것일까? 은영처럼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받은 장소나 상황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상처주었던 상황이나 사건과 비슷한 장소에서 체험하려는 것을 '반복 강박'이라고 한다. 이런 반복 강박을 체험하려는 것은 상처를 주었던 상황을 다시 체험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보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은영이 모교에 부임했던 이유는 바로 '지난날 자신이 무기력하게 선생님의 협박에 굴복해서 친구를 따돌려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였다.

 

p.153

'페이스 오프(face off)'란 아이스 하키 용어로서 경기의 시작 또는 속개를 알릴 때를 말하는데, 대치된 두 집단간에 격렬한 격돌이 발생하게 될 위기 상황을 뜻한다. 영화 <페이스 오프>는 바야흐로 선과 악의 집요한 대결이 펼처지게 됨을 의미한다. 

 

p.156~157

오우삼이 감독한 <페이스 오프>는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선과 악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아처와 캐스터는 선과 악으로 나뉘어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 숙명적인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둘은 얼굴만 바꾸는 수술을 통해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선과 악은 마치 얼굴처럼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선과 악은 쌍둥이 형제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북유럽 신화에서 발더는 빛의 신이고, 로키는 어둠의 신으로 등장하며 둘은 각각 선과 악을 상징한다. 이집트에서도 오시리스와 세트는 서로 투쟁하는 선과 악의 신이다. 세트는 형인 오시리스를 죽여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온 땅에 흩뿌린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체 조각을 다시 짜맞추어 부활시킨다. 로마에서도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쌍둥이였다. 기독교에서는 카인과 아벨, 야곱과 이삭이 등장하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쌍둥이에 대한 상징으로 한 명은 선인, 한 명은 악인이며 서로 싸우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유대교에서도 선을 상ㄷ징하는 야훼와 처음에는 천사였으나 나중에는 타락하게 된 악의 신 아자젤이 존재한다.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가 항상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투쟁하듯이,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항상 투쟁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런 선과 악의 갈등을 본능(이드)과 초자아(도덕성)의 충돌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선과 악은 형제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신 안에 있는 추한 부분, 탐욕, 이기심, 질투, 욕망, 남을 해치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둘은 한몸에서 났으면서도 서로를 없애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아 항상 투쟁하는 관계로 보았으나, 동양에서는 선과 악을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했다. 

 

p.158

우리는 흔히 악을 뿌리째 없애야 한다며 권선징악에 열광한다. 그러나 정말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딘이 악의 왕국 요툰헤임의 거인 미미르의 도움을 얻었듯이, 악에 속한 부분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아처는 악의 화신인 케스터의 얼굴을 빌려와야 했다.

 

그리고 그는 거울을 보고 자신이 아닌 케스터가 비치는 것에 화들짝 놀란다. 자신은 항상 선을 추구한다고 생각해서 자신 안에는 악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득 자신 안에 존재하는 악을 보고 놀라는 장면과 같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또다른 장면으로는 영화의 종반부에 케스터와 아처가 대결하는 신이 있다. 양면 거울을 사이에 두고 설전을 나누던 아처와 케스터는 거울 너머에 있을 적에게 총을 겨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당연히 자기 것이다. 그러나 얼굴이 뒤바뀐 탓에 그것은 적의 모습이기도 하다.

 

거울 속 자기 모습에서 적을 발견하자 둘은 동시에 총을 쏜다. 얼굴은 적의 얼굴이지만, 사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선과 악의 대결은 결국 자신에 대한 파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자신 안에 숨겨진 악마성이 바로 적일 뿐, 외부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p.161

아처의 상처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결백하고 티 없으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입는다. 대개 항상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자기 비하와 자책을 한다. 아처가 악의 힘을 빌어 상처를 치유했듯이, 이렇게 결벽이라 부를만큼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악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즉 악의 힘을 빌어옴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과 악은 형제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자신의 추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악으로 상징되는 부분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투사된다. 이런 투사는 이야기, 민담, 소설, 영화 등에 그대로 나타나고, 또한 사람들은 이런 선과 악의 대결에 몰두한다. 영화나 이야기에서 항상 주제는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자신이 버리고 싶은 악의 측면을 이야기 속의 악당에 투사하고, 악당이 제거되었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악이 제거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악한 부분을 부정하고 남에게서만 악한 부분을 자꾸 찾게 되면 도리어 악한 부분은 더욱 커진다는 데 있다. 또한 자기 마음속의 악한 부분을 완전히 억압했을 때 완전히 인격이 분리되어 항상 마음속에서 투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선이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듯이 악한 부분도 인정해야 한다. 인도의 데비 여신이 빛의 신이며 자비로운 어머니 신인 반면 광포하고 잔인한 신이듯이, 우리 안에는 두 가지 부분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이런 공존을 인정할 때 선과 악은 서로 화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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