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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동진이 말하는 봉준호의 세계

by Diligejy 2022. 4. 3.

p.14

[기생충]의 변곡점은 문광(이정은)이 폭우 속에서 저택의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이다. 그때까지 문광은 집사로서 동익(이선균)의 저택을 지켜오다가 해고되었던 한 개인이었지만,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밝히는 순간 가족이 된다. [기생충]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이게 두 가족이 아니라 세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개봉 당시 영화 측이 막으려 했던 스포일러는 바로 세 번째 가족의 존재였던 셈이다.

 

문광이 근세(박명훈)와 함께 가족으로서 존재를 드러낸 후 기택(송강호) 가족과 싸우던 그 저택으로 폭우를 맞아 야영지에서 갑자기 돌아오게 된 동익 가족까지 들어오게 되었을 때, 서스펜스를 꾹꾹 눌러담은 듯한 극 중 음식이 한우 채끝살을 넣은 짜파구리라는 사실은 흥미로워 보인다. 이것은 값싼 두 종류의 면이 마구 뒤섞이는 곳에 값비싼 한우가 추가로 들어가게 된 음식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p.17

[기생충]은 상승과 하강의 동선, 그리고 대체의 모티브로 정교하게 직조된 영화다. 기택이 동익의 운전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윤 기사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충숙이 가사도우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문광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극의 도입부에서 백수인 기택의 가족이 피자 박스 접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거도 피자 가게에서 원래 그 일을 하던 아르바이트가 그만두었기 때문이고, 기우가 과외 자리를 얻게 된 것 역시 민혁(박서준)이 그 자리를 두고서 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p.19~20

[기생충]에서는 모두 네 사람이나 죽는다. 하지만 여기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누구도 노골적인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이 참극은 근원적인 비극이 된다. 만일 동익이 극 중에서 충분히 악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면 그가 죽은 것은 나쁜 인성 때문인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익은 개인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결국 그가 속한 계급 때문에 죽었다. 나머지 세 사람 역시 그렇다. (문광은 치명상을 입고 난 후에도 "충숙 언니가 좋은 분인데 나를 발로 찼다"라고 말한다.)

 

봉준호 영화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계급일 것이다. 적나라하게 다루는 [기생충]과 [설국열차]뿐만 아니라 [플란다스의 개]에서 [옥자]까지 대부분의 영화가 계급 갈등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런데 이때 특히 주목되는 것은 누가 누구와 싸우는 가의 문제다.

 

p.21

미묘한 것은 봉준호의 영화들에서 하층과 최하층이 구분되어 보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극 중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최하층으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최하층에 맞서는 그들이 기대는 마지막 제도는 가족이다. (봉준호의 영화 속 주인공이 가족 단위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물림을 통해 그 체계를 공고하게 만드는 계급의 최소 단위인 가족은 하층에 속하는 인물들에게 생래적으로 좌절을 안겨주지만, 최하층과 맞설 때는 역으로 마지막 보루가 되는 것이다.

 

[마더]에서 도준(원빈)과 종팔(김홍집)은 바로 그 지점에서 명암이 갈린다. 종팔이 도준의 죄를 뒤집어쓰는 것은 결국 도준에게 있는 엄마(김혜자)가 그에겐 없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힌 종팔을 면회하면서 도준의 엄마는 연민과 죄책감으로 "넌 엄마도 없니?"라며 눈물을 흘린다.) [옥자]에서 사지를 벗어나는 데 성공하는 옥자와 달리 그 외의 수많은 슈퍼 돼지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것은 옥자에게 있는 언니(안서현)가 그들에겐 없기 때문이다.

 

p.26

[기생충]에서 정말로 불공평한 것은 바로 소통이다. 무전기까지 동원해가며 자유자재로 소통하는 동익 가족과 달리, 기택 가족은 무임승차로 쓰던 와이파이가 끊기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와이파이 신호를 보다 더 잘 잡으려면, 핸드폰을 높게 들어야 한다는 기택의 말처럼 높이 올라가야 소통할 수 있다. 기택 가족은 동익의 저택에 한 명씩 차례로 진입한 후 멋진 계단 위로 높이 올라가는 계급 상승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올라가서 와이파이 신호를 잡음으로써 소통에 성공한 곳은 보잘것없는 계단에 이어져 있는 반지하 화장실 변기가 고작이었다. 폭우가 쏟아지자 기정이 자신의 집에서 가장 지산에 가까운 높은 곳인 변기 뚜껑에 올라앉아 천장에 숨겨둔 담배를 꺼내 피우는 대목은 이 영화에서 가장 처연한 장면일 것이다.

 

p.29~30

상층은 하층의 마음을 보거나 들을 필요가 없고, 하층은 상층의 마음을 싫어도 보고 들어야 한다. 도입부에서 아이피타임 암호를 걸어서 통신 연결을 끊은 것 역시 위층에 사는 집주인이었다.

 

그런 하층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냄새다. 자동차 안에서 그 냄새는 차의 진행 방향과 반대인 역류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의와 감정을 전달할 방법이 봉쇄된 채 전달하고 싶지 않은 존재 자체의 곤궁함만이 전해지는 하층 계급 소통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요약한다.

 

극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소변과 빗물 대신 피가 흐른다. 기정과 근세의 피가 아래로 흘러 동익의 마당을 적신다. 하지만 그 고귀한 피는 더러운 오수 취급을 받는다. 근세는 찔려서 흘리게 된 피와 오래된 지하 생활로 누적된 체취가 뒤섞인 자신의 냄새를 동익에게 전달한다. 그게 얼마나 오만한 행동인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동익은 노골적인 경멸의 기색과 함께 코를 쥐고서 죽어가는 자의 아래에 깔린 차 열쇠만 빼내려 한다. 그 직전 기택은 중상을 입은 기정을 응급처치하다가 "아빠, 그만 좀 눌러. 눌러서 더 아픈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기택이 택한 것은 더 이상 분노와 슬픔을 누르지 않는 방법이었고, 냄새가 아니라 그 감정을 고스란히 상층에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폭력적이고 비극적이지만, 그로서는 가장 확실한 소통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기택의 냄새가 아니라 근세의 냄새를 동익이 경멸할 때, 근세가 아닌 기택이 동익을 근세의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점이다. 만일 기택이 자신의 냄새를 경멸하는 동익을 살해했다면, 그것은 모멸감을 견디지 못한 기택이라는 개인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한 동익이라는 개인을 살해한 사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도 아니고 심지어 직전까지 극단적으로 싸웠던 상대라고 할 수 있는 근세가 당하는 능멸을 기택이 대신해서 근세의 칼로 응징할 때, 그건 온전히 계급의 이름을 내건 살인이 된다. 기택이 근세에게 이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냄새인데, 그에게 그 냄새는 곧 계급이기 때문이다.

 

p.32

최후에 시도하는 기우의 결정적 계획 역시 좌초되는데, 비장한 마음으로 지하 계단을 내려서던 그가 수석을 아래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건 결정적인 순간에 화염병을 떨어뜨리는 [괴물]의 남일이나, 아파트 복도에서 맹렬히 범인을 추격하다가 때마침 열린 문에 부딪혀 넘어지는 바람에 놓치게 되는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쯤되면 봉준호의 영화 속 하층 계급의 '삑사리'는 실수가 아니라 흡사 필연처럼 보인다. 계획은 상층에나 가능한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p.52~53

봉준호의 세계에서 은밀하게 묻어두었던 것들은 반드시 귀환해 습격한다. [기생충]에서처럼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재현의 의식을 치르려 하면 오히려 덧난다. 그래서 [마더]는 밝혀진 진실을 다시 묻고 스스로에게 침을 놓은 채 망각을 향해 춤을 추면서 저물어가는 석양 속 익명의 실루엣이 되는 광경으로 끝이 나는지도 모른다.

 

p.55

부자와 빈자의 결정적 차이는 둘레에 선을 그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동익의 저택 밖과 안은 높은 담과 울창한 정원의 나무들로, 집 건물 안과 밖은 거대한 유리창으로 그 사이에 선이 그어진다. 선 밖의 정원은 분명 선 안의 거실에서도 또렷하게 보이지만 소통하기 위해서는 무전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반면 기택의 집 유리창은 안과 밖에 제대로 선을 긋지 못한다. 그 흐린 선은 골목의 물건 파는 소음, 뿌려지는 소독약과 소변 방울로 끊임없이 교란된다.

 

p.55

동익과 연교 커플은 누구에게나 온화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계급에 대한 오만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윤 기사의 일탈에 대해서 연교는 "어떻게 주인님 차에서"라고 말하고, 동익은 기택의 냄새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평한다. 일탈에 기분이 상해서 해고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평판에 해가 될까 봐 다른 이유를 꺼내 들며 윤 기사를 내보낸다. 그들은 문광 역시 그런 방식으로 해고한다.

 

p.57

동익의 회사 이름 '어나더 브릭(Another Brick)'에는 그의 피고용인에 대한 견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회사 직원이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그에게 피고용인들은 언제든지 똑같은 노동력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또다른 벽돌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서 어나더 브릭에 대조되는 것이 저마다 고유하고 특별한 돌인 수석이다. 기우는 수석의 꿈을 품었다. 하지만 동익에게 기우의 가족들은 그저 또 다른 벽돌일 뿐이었다.

 

p.72

봉준호의 영화세계에서는 모여서 먹고 마시는 장면이 중요하다.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괴물]에서 좁은 매점 안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말 한마디 없이 음식을 먹여주며 함께 식사를 하는 환상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 영화는 심지어 세상사가 잡다하게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뉴스를 발로 끈 뒤 본격적으로 밥을 먹는 두 명의 유사 가족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반면 상층 계급 사람들은 먹는 장면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플란다스의 개]와 [마더]에서처럼 폭탄주를 돌리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건 한데 모여 권력의 소재를 재확인하는 폭력적인 자리일 뿐이다. 설혹 먹는 장면이 있더라도 [설국열차]에서 스테이크를 굽는 윌포드처럼 사실상 혼자 외롭게 먹는다.

 

p.110

동익과 연교 부부는 해고되는 당사자가 왜 나가야 하는지 그 진짜 이유를 모르게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극 중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가장 무지한 사람들이다. 동익은 죽는 순간까지 근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싸움이 왜 벌어지는지도 모르며, 그 사람들이 서로 가족관계라는 사실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왜 칼을 맞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다. 그 지경이 되도록 숙주는 끝내 모른다.

 

p.111

봉준호의 작품세계에서 파국은 주로 탁 트인 공간에서 펼쳐진다. [살인의 추억]의 벌판이나 [괴물]의 한강 고수부지 혹은 [옥자]의 도살장이 그렇다. [기생충] 역시 지하의 비밀 공간에서가 아니라 시야를 가리는 물건 하나 없이 넓은 정원에서 파국이 벌어진다.

 

p.121

기우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하나는 헛된 걱정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기우가 노심초사하며 세웠던 많은 계획들이 결국은 다 허사가 되잖습니까. 다른 하나는 비를 기원하는 것이 기우일 텐데, 그렇게 본다면 역시 영화의 핵심적인 부분하고 맞닿아 있어요.

 

p.131

어떻게 보면 두 가족은 냉정하게 서로 타협해야 했었다고 봐요. 그런데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상황 자체가 정리하기 쉽잖아서 그랬던 건지, 파국으로 가는 계단을 거기서부터 쌓기 시작했던 거죠. 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대목 대목들이 다 슬퍼요. 사실 잘 살펴보면 마지막에 햇살이 쨍한 생일잔치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단계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차곡차곡 파국을 향해서 쌓아가는 거죠. 아까 [설국열차] 얘기를 하셨지만 거기선 비교적 구조가 단선적이었고 적도 명확했잖아요.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있고 그걸 막으려는 사람이 있는 거죠. 우회로는 없고요. SF다 보니 그런 게 더 잘 어울리는 것이겠지만 [기생충]은 그런 장르가 아니잖아요. 이건 현실에서의 이야기고 적이 누군지,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자가 누구인 건지, 우리는 왜 고통받는지, 그리고 싸움의 축은 뭔지, 이런 모든 것들이 무척 혼란스러운 거죠. 그래서 클라이맥스에서 근세가 칼을 휘두르는 대상은 전부 가난한 사람들이죠. 충숙을 찾으면서 기정을 찌르고요. 그랬다가 마지막 칼이 기택의 손에 의해 박 사장 쪽으로 갑니다. 어떻게 보면 충격적인 순간인데 단선적이지 않은, 싸움의 구도 자체를 예측하거나 규정짓기 어려운 상황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긴 하더라고요.

 

p.151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설국열차]가 울증에 빠진 서늘한 이성이 낳은 야심 차고도 건조한 결과물이라면, [옥자]는 조증에 들어선 따스한 감성이 빚은 소박하고도 촉촉한 산물이다. 

 

또 이렇게 얘기해보면 어떨까. [마더]가 인간 존재의 탁한 늪 속으로 한없이 자맥질하는 작품이라면, [옥자]는 세상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도 다시 부상하는 영화다. [옥자]의 후반부는 참혹하도록 슬프다. 그럼에도 이 기이한 동화에는 가녀리지만 끝내 가려지지 않는 햇살이 있고 두드러지지 않아도 결코 억누를 수 없는 부력이 있다.

 

p.157

봉준호의 세계에서 희망은 언제나 횃불이 아니라 불씨였다.

 

p.164

사실 영화를 찍을 때는 그런 의식은 별로 없어요. 시나리오를 쓸 때 '자기복제를 하면 안 돼', 또는 '미친 듯이 새로운 걸 해야 돼', 아니면 '나만의 것을 계속 변주하면서 나의 인장을 찍어야 돼', 그게 어느 방향으로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거든요. 그저 매 신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급급해요, 사실은.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찍으려면 내가 하려는 스토리와 정면대결을 해야 되는데 매 신 다 힘든 대결이에요. 그걸 미자가 계속 전진하는 것처럼 저 역시 그냥 유리벽에 부딪치거나 하면서 하나하나씩 돌파해나가는 것뿐이죠. 

 

p.182~183

흥미로운 것은 남궁민수와 정반대 방향에서 마주 보며 긴 대화를 마친 후 맨 앞칸으로 들어간 커티스가 똑같은 구도 속에서 윌포드와 다시금 긴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다. 이후 윌포드에 의해 엔진룸에 혼자 서게 된 커티스는 엔진을 직접 보며 완전히 압도되는데, 그 때 그는 극 중 처음으로 기차의 뒤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전까지 앞을 향해서만 움직였던 커티스는 이제 옆을 보라는 남궁민수의 요청과 뒤를 보라는 윌포드의 요구 사이에서 최후의 선택을 해야 한다. 윌포드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계승자가 된다면 커티스에게 "열차는 세계이고 우리는 인류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잠시 흔들렸던 그는 인류가 아니라 인간을 택한다. 엔진룸 밑의 좁은 공간에서 비참하게 일하고 있는 어린 소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엔진의 '멸종'된 부품을 대신해 엔진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던 아이들을, 다시 말해 기계의 부품이 된 인류의 미래를 끄집어내어 인간의 자리에 돌려놓는다. 윌포드의 계승자 위치에서 기차 뒤쪽에 시선을 던지며 인류라는 종을 관조했던 커티스는 그 순간 아래로 눈을 돌려 인류가 아닌 인간 하나하나를 보아낸 셈이다.

 

그 과정에서 커티스는 팔 하나를 잃는다. 엔진 속으로 손을 넣어 다섯 살 티미를 구하려다가 생긴 일이다. 설국열차 초기의 참혹한 기근 때 팔을 잘라주는 희생으로 인간성을 회복했던 사람들과 달리, 그렇게 하지 못했던 커티스는 원래 두 손을 온전히 다 가지고 있는 게 죄스러웠던 사람이다. 그런 그는 극 초반 티미와 손을 마주치며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는데,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티미의 손을 잡아 끌어올린 후 스스로의 팔이 잘림으로써 고귀한 희생을 한다.

 

이때 티미를 끌어올린 커티스의 손은 오른손인데 잘린 것은 왼손이다. 남궁민수가 격론을 벌이며 열어야 할 옆문을 오른손으로 가리킬 때, 돌아앉은 그의 자리에서 보면 그 문은 오른쪽 문이었지만 마주 보는 커티스의 자리에선 왼쪽 문이었다. 기차 밖을 염두에 둠으로써 인류 생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시적으로 제시하는 남궁민수와 개별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에 미시적으로 마음이 움직인 커티스가 힘을 합쳐, 혹은 구원의 손과 희생의 손이 힘을 모아, 마침내 옆문이 폭파되어 열린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고 새로운 인류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기차 속 참혹한 세계를 만든 기성세대인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그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자격이 없다. 둘은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두 대의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고 각각 폭약과 성냥을 갖고 있었던 자들이지만, 횃불은 다음 세대가 당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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