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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by Diligejy 2022. 10. 7.

p.12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인 자신들의 고귀한 푸른 피를 자랑스러워했는데, 다섯 종교와 열두 민족을 수 세기에 걸쳐 통솔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자신감이 이를 뒷받침했다.

 

합스부르크왕조의 지배권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포르투갈, 브라질, 멕시코, 캘리포니아, 인도네시아까지 미치고 있었다. 한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의 군주를 겸한 사례도 합스부르크가였으며, 카를 5세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70가지 이상의 직함을 가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식 칭호도 '오스트리아 대공 겸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겸 케르텐 공작 겸 티롤 백작 겸 보헤미아 여왕 겸 헝가리 여왕 겸 ...' 하는 식으로 '겸'이 장장 40번 이상 이어진다. 프란츠 요제프가 대관식을 올린 19세기 중반, 제국 말기였을 때조차 영지 면적은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 최대였다. 

 

p.32

석류는 과육에 씨가 빽뺵하게 들어차 있어서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한편, 무수히 많은 씨앗이 튼튼한 껍질에 감싸여 있다는 점에서 군주를 섬기는 이들의 결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많은 나라를 통괄하는 신성로마 황제에게 걸맞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p.47~49

에스파냐는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다가 15세기가 되어서야 드디어 가톨릭이 되찾았는데, 이때 아라곤(동부) 왕과 카스티야(중서부) 여왕이 결혼하면서 에스파냐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두 왕이 통치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요컨대 이 부부는 왕과 왕비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여왕이라는 동등한 입장이었다. 이것이 훗날 까다로운 문제의 원인이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왕 사이에서는 1남 4녀가 태어났고, 대를 이을 장남 후안과 차녀 후아나는 앞에서 다루었듯이 각각 합스부르크가의 딸 마르가레테와 아들 펠리페를 배우자로 맞았다. 하지만 후안은 결혼 반년 만에 급사했다. 두 왕은 왕위 계승자로 포르투갈에 시집간 장녀를 지명했지만 그녀 또한 출산으로 사망했다. 태어난 아이도 두 살의 나이에 병사했기 때문에 왕위는 차녀 후아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어머니 이사벨까지 사망하자,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왕인 아버지가 살아 있으니 아버지가 그대로 통치를 계속해 왕위 계승 문제가 일어날 리도 없겠지만,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원래 별개의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사벨의 유언에 따라 후아나는 카슽이야 여왕이 되었다. 

 

재미없게 된 것은 남편인 펠리페였다. 여왕의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싶었던 펠리페는 지원을 요청하려고 적국 프랑스에 접근했다. 이에 분노한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는 자신이 카스티야 왕을 겸임하며 젊은 후처를 들여 그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중간에 낀 후아나의 괴로움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은 그저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아나는 무슨 수를 쓰든 여왕의 왕관을 절대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어설픈 가족 싸움의 영역을 넘어 목숨을 건 권력 다툼이었다. 실제로 이 정쟁의 한가운데에서 펠리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맞는다.

 

p.58

다른 나라의 왕과 귀족의 칭호나 이름은 발음도 어렵고 무척 이해하기 힘들다. 카를 5세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다. 카를과 카를로스의 어원이 같으리라는 건 상상할 수 있어도, 카를 5세와 카를로스 1세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세계사가 싫어졌다는 사람도 많을 정도니 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단순히 영토가 넓기(유럽의 3분의 2와 중남미를 지배했다) 때문이다.

 

카를은 아버지 미남왕 펠리페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외조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왕이 되었고, 친조부 막시말리안 1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이 되었고, 로마 왕인 동시에 헝가리 왕이기도 해서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70개 이상의 직함을 가졌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카를 5세, 에스파냐 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훗날 고손자가 카를로스 2세를 칭한다)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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