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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by Diligejy 2022. 10. 12.

p.7

중국에서도 청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는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현실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즉, 티베트, 신장, 내몽골 등 소수민족 자치구에 대한 중국의 주권 주장은 청나라가 남긴 역사적 유산의 행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또한 중국은 청나라가 전성기를 누리던 1800년경의 영토 범위를 곧 중국사의 '역사 주권'이 작용한 공간으로 규정하려 한다.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외교적 갈등을 일으킨 중국의 '동북공정'도 사실 따지고보면 청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p.24~25

명나라와 청나라의 관계는 고려와 조선의 관계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국민국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주권의 원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역사 속의 왕조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백성이 아닌 임금이었다. 백성은 임금의 보살핌을 받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또한 오늘날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법률 앞에 평등하며 빈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선거와 같은 중요 정치 참여 행위에서는 똑같이 한 표씩 행사한다. 반면에 왕조국가에서는 귀족과 평민, 양반과 상민 등과 같은 신분이 있었고, 그런 신분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문호의 폭을 좌우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왕조국가든 국가의 성격이나 지배 구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그 왕조의 주인이 누구였느냐에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9

 

p.33

황제와 신하들은 한어만 말한 것이 아니라 만주어도 썼고 몽골어도 썼다. 오히려 초기에는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만주인과 몽골인 신하들에게 한어는 어디까지나 외국어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문서들은 한문만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예컨대 청나라의 실록만해도 한어, 만주어, 몽골어 등 세 언어로 편찬되었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제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유교의 정치 이념에만 기대지 않았다. 특히 티베트 불교는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서서 청나라 황제의 제국 통치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청나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 사람들은 청나라를 명나라와 같은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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