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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by Diligejy 2023. 12. 20.

 

 

 

 

p.15~17

인도인들이 행복하다는 조사 결과가 정말 맞다면, 연간 1만 9천 명에 달하는 인도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있다는 2006년 유엔 마약통제범죄예방사무소(ODCCP)의 조사 결과는 무엇인가. 여성을 상대로 26분마다 성희롱이, 32분마다 강간이, 43분마다 납치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인도 내무부 국가범죄기록관리국 통계는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보수적인 정부기관의 조사 결과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훨씬 더할 것이다).

 

이러한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상층계급 여성들일 리는 없다. 주요 피해자는 불가촉천민 여성들이다. 여성 인권과 관련한 세계대회에 참가한 활동가들에 따르면, 대회에서 말을 제일 많이 한 이들은 다름 아닌 인도 불가촉천민(Scheduled Caste)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델리나 콜카타 시내 거리에서 구걸하는 검은 피부의 여인들이 머리가 금발이거나 피부가 흰 혼혈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아이들은 과연 그 여인들이 사랑해서 낳은 아이들일까. '여행 온 외국인들까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간거야?' 란 생각이 드는 곳이 인도다.

 

인도에서는 테러가 많이 일어나고 수천 명씩 죽이는 집단 학살이 수시로 자행된다. 1984년 펀자브(Punjab) 주에서 시크교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만 5천여 명이 희생되었고, 이를 원인으로 인디라 간디 총리가 암살되었으며, 이 암살 사건으로 전국적 반시크교 폭동이 일어나 공식 발표로만 2,700여 명이 살해당했다. 1983년 아삼(Assam) 주에서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소수 부족들 간의 분열 대립으로 3천여 명, 1992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주 아요디아에서 힌두교도에 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 파괴로 촉발된 폭동으로 전국적으로 2,500여 명이 사망했다. 2002년 구자라트(Gujarat) 주에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유혈충돌로 2천여 명이, 2008년 오리사(Orissa) 주에서 힌두교도들이 기독교도들과 소수 부족을 공격해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인도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유혈충돌이 빈번히 발생했는데, 매년 100~2,000건의 폭동이 일어나 지금까지 100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도 해도 너무 한 것은 이들 종교적 폭동의 대부분이 경찰의 방관 속에서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에는 공산당 노선의 정당이 여러 개 있고, 그 대부분은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원한다. 그런데 같은 공산당 노선이라도, 극단적인 마오이스트(Maoist: 마오쩌둥주의자)인 낙살리스트(Naxalist)는 선거를 부정해 선거구를 공격하는 것은 물론 기차를 테러하거나 경찰을 습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낙살리스트가 40년 가까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또 이들이 인도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곳곳에 소규모 해방구(maoist Nation)들을 만든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통계에 따르면 인도 국민의 87%가 행복하다는데, 무장활동을 벌이는 마오이스트는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실제 인도 사회를 보면 '국민의 87%가 행복한 나라'라는 통계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앞으로 이런 통계 결과를 인용하면서 '도인'처럼 말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조사 결과만 인용하지 말고 '표본은 어떻게 선정했고 설문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지 공개한 후'에 '도인' 행세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런 조사 결과에 기대 '도인' 행세를 하는 이가 있다면 아예 무시하는 것이 좋다.

 

p.20-21

인도 헌법의 초안을 만들었고 그 헌법에 카스트의 철폐를 넣은 암베드카르 같은 선각자들은 힌두교도들을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힌두교도인들이야말로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가장 잔인한 부류의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품속에서는 항상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품고 다닙니다. 말만은 성자처럼 하지만 행동은 개백정처럼 하는 인간들이 바로 이 땅의 힌두교도들입니다. [...] 다른 사람을 문둥이처럼 대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체제 안에서 어떻게 평등과 자유라는 이상을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이 문제에 관한 한 개종만이 유일한 돌파구입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조국이 있다고 하십니다만,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저의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나라의 종교가 어떻게 저의 종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눈곱만한 자부심이라도 갖고 있는 불가촉천민이라면 결코 이 땅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이 우리에게 가하는 불의와 고통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이 나라에 대하여 불충한 생각을 품더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이 나라에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반역자로 취급하더라도 저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저를 반역자로 취급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이런 말을 한 암베드카르를 과격하다고 공격하는 이는 없다. 심지어 극우학생회 조직인 ABVP까지도 암베드카르의 사진 밑에 '자랑스런 조국 인도의 애국자'란 말을 넣고 자신들의 조직명을 넣어 선전물을 만든다. 암베드카르는 전체 인도 인구의 80% 이상이 믿는 힌두를 격렬하게 비판했지만 암베드카르의 생일은 인도 대부분의 주에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만일 류시화 작가의 책을 번역해서 달리트 운동 단체나 달리트 정당을 표방하여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집권한 정당 BSP(Bahujan Samaj Party: 바후잔사마지당: 대중사회당)앞으로 보내기라도 하면, 류시화 작가는 인도 입국이 거부될지도 모를 일이다.

 

p.27-28

이광수 교수는 이 책 이전에도 힌두교의 암소보호운동에 대해서 연구 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중요한 부분이기에 조금 길더라도 같이 읽어보자.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질서가 이러한 심각한 도전을 받자 브라만 제사장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 불살생을 하나의 실천 계율로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힌두 경전에 암소는 성스러운 신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똥에는 여신 락슈미가 살고 있고, 가슴에는 스칸다 신이, 이마에는 시바 신이, 혀에는 사라스와티 신이, 그의 '음메' 소리에는 네 베다의 여신들이, 그의 등에는 야마 신이, 그리고 그의 우유 속에는 여신 강가가 살고 있다. 

힌두교의 제사장들이 소 보호를 채택하면서 소는 급격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소 보호는 힌두교의 최고 삼신 가운데 하나인 비슈누와 관련되면서 발전되어갔다. 

소 보호는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의 몫이다. 신화 속의 크리슈나는 태어난 후 부모에게 버림받아 목자들에게 버려진다. 그들에 의해 훌륭하게 성장한 크리슈나는 힌두 최고의 신으로 성장하는데 그가 소를 보호하는 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렇게 힌두교는 소 숭배의 정당성을 확보해간 것이다.

크리슈나의 소 보호 신화는 제사의 신 인드라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신화 속에서 인드라는 세상의 모든 소를 제사에 바치기 위해 노획한다. 그런데 그보다 한 수 위인 크리슈나가 이들을 모두 풀어줘 버린다. 이에 크게 노한 인드라가 세상에 홍수를 내려 모두를 멸망시키려 했으나 크리슈나가 산을 쌓고 소들을 그 위에 대피시켜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안전하게 보호했다.

우리는 이 신화를 통해 구세주의 역할이 인드라로부터 크리슈나로 옮아갔고 구원의 양식이 제사로부터 보호, 즉 사랑과 헌신으로 옮아갔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슈나가 인드라로부터 소를 보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힌두 최대의 축제가 디왈리(Divali)이다. 이 날이 되면 사람들은 크리슈나의 탄생지 브린다완에 있는 고바르다나 산을 숭배하는 의례를 치른다.

원래 고바르다나(Govardhana)라는 어휘는 '소(go)를 증가시킨다(vardhana)'는 문자적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소의 다산성과 소 복합체의 성성과 관련되면서 부를 위해 소똥에 공물을 바치는 의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 역사적으로 암소가 보호의 대상이 되면서 그것은 곧 카스트제도와 연결되었고 그러다 보니 카스트 체계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브라만과 관련되었다. 브라만은 의례를 집전하는 자로서 암소의 다섯 가지 생산물을 제사에 많이 사용하였다.

반면에 가장 낮은 위치의 불가촉천민은 성스러운 소의 부정, 즉 소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 인도에서 최하위의 불가촉천민인 차미르는 소가죽으로 신발 등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남부 인도에서의 파라이야르는 소가죽으로 만든 북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 예인이다. 이발사나 세탁부 같은 계급들도 매우 낮은 계급에 속하지만 차마르나 ㅏ라이야르보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다. 그들은 소의 부정과는 관계가 없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암소의 신성성은 카스트 사회에서의 사제 브라만이 스스로 정의 존재로 승격시켜 최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할 뿐더러 불가촉천민을 부정의 존재로 만들어 사회적 불구로 남게 만든다.

 

 

p.30-31

브라만은 원래 쇠고기를 가장 즐기던 카스트였다.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 추적은 델리대학교 역사학과  D. N. 자 교수의 <성스러운 암소 신화 : 인도 민족주의의 역사 만들기>에 잘 나와 있다. 저자는 "암소 여신도 존재하지 않았고 암소를 모신 사원도 존재한 적이 없다"며 "이 동물에 대한 숭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근대에 들어와 힌두가 갖는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일체성을 주장하는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암소를 도살하고 암소 고기를 먹는 관습이 힌두 공동체의 정체성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 책은 내용의 파격 때문에 인도에서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1917년 비하르(Bihar) 주에서 이슬람교도들이 쇠고기를 먹는 데 분노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교도 30명을 살해하고 이슬람 부락 170여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간디는 이에 개탄(?)은 했지만 전면적인 암소도살금지법이 제정되기를 바랐다. 간디의 절실한 염원은 독립 후에도 이어져, 1966년 11월 7일 화환으로 장식하고 소똥을 태운 흰 재를 바르고 송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옷 벗은 성자들을 앞세운 12만 명의 극우파 시위대가 하원 앞에서 암소 도살 반대 및 보호 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방화, 약탈, 습격 등을 벌이며 과격한 시위를 전개했고 이로 말미암아 8명이 살해되고 48명이 부상당하게 되었다. 비폭력 성자의 죽음 이후에도 그 염원이 살아남아서 또 하나의 처참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p.72

당시는 면공업이 큰 호황을 누릴 때였지만 아마다바드의 섬유 노동자들은 오히려 임금이 삭감되었다. 이에 노동자들이 분노하여 들고일어나자 제조업자들은 간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디는 노동자들이 마주르 마하잔 상(Majoor Mahajan Sangh: MMS)이란 노동조합을 결성하도록 지원해주라고 제조업자들에게 제안했다. 언뜻 보면, 간디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도와준 것 같지만, MMS에는 협력과 조정 기능만 있을 뿐 파업과 같은 투쟁 기능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제조업자들은 MMS를 면공업 발전 계획의 일환이자 노동운동 통제수단으로 활용헀다. MMS에는 노동자의 의무와 권리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제조업자들은 노동자의 권리보다는 의무에 초점을 두고 강력한 규율로 노동자들을 통제했다. MMS가 만들어진 뒤 제조업자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린 반면, 힌두 극빈층이거나 이슬람교도였던 노동자들의 여건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것은 같은 시기 뭄바이 노동자들이 일련의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을 쟁취하는 등 노동조건을 개선한 것과 대조적이다.

 

또한 간디는 1935년 영국 식민통치자들의 '가족임금제' 도입 제안을 받아들이는 악수를 두었다. 가족임금제는 노동자 가족들이나 실직자들의 생존비용 명목으로 임금을 인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가족당 한 명까지 무직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여성들이 일터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p.79-80

간디는 가난한 하층계급은 자티 시스템 내에서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달리트들에게 폭언으로 느껴지는 발언들을 간절한 신앙심에 바탕을 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디가 불가촉천민들을 하리잔, 즉 '신의 아이'라고 한 것은 불가촉천민 또한 신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간디의 이타주의 정신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짓지 않고 차분히 생각해본다면, 결국 불가촉천민은 이 모든 불평등을 낳은 힌두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언제까지나 불가촉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데 대한 역설적인 강조란 생각도 든다. 간디에게 힌두 신 안에서 산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과 함께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신이 인간들에게 내려준 자티 시스템 안에서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자가 더 중요한 것이다.

 

힌두 교리가 자티 시스템에 따라 살기 위한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믿은 간디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흔히 삶의 방식이라고 할 경우에 개인의 의지가 중요한 부분이 되지만 자티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인도아대륙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지배구조이다.

 

앙코르와트 사원 같은 힌두 문화유적을 남긴 동남아시아의 힌두교는 인도의 힌두교와는 다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카스트제도 없이 힌두교를 믿는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힌두교가 자티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왕권 강화의 이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카스트가 없는 상태에서 힌두교나 불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기에 동남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인도와는 다르게 두 종교가 경쟁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카스트 철폐 문제로 갈등을 벌였고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의 헤게모니 투쟁을 낳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자티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았고 왕들이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힌두교와 불교를 받아들였기에 대부분 두 종교가 융합되었다. 동남아에서 힌두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최고의 권위를 전륜성왕에 두고 그가 신들에 의해 채택되고 지지받는 자임을 강조했다. 태국은 불교 국가이지만, 태국을 상징하는 국조는 힌두 신인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가루다다. 또 태국 왕실의 행사는 힌두교식으로 진행하나 태국의 왕은 불교 신자만 될 수 있다. 예전에 태국 왕비의 생일 무렵 방콕에서 한 달가량 머문 적이 있었는데 힌두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상징들을 방콕 시내 전역에서 볼 수 있었다.

 

힌두교라고 하더라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힌두교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간디의 관점에서 보면 동남아시아 지역은 가장 중요한 자티 시스템이 빠졌기 때문에 힌두의 신들을 믿는다고 해도 힌두교에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동남아시아의 힌두교는 힌두교가 아니란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자티 시스템은 인도아대륙에서 통용된 과거의 유물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현재도 달리트의 피를 빨아먹는 지배구조인 것이다.

 

p.84

결국 힌두교의 사제계급인 브라만들은 불살생을 하나의 실천 계율로 채택하고 석가모니를 비슈누의 화신으로 칭하며 힌두교 시스템에 흡수함으로써 불교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때부터 석가모니는 고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화된다.

 

마족 때문에 고통당하는 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비슈누 신은 석가족 왕의 아들 붓다로 탄생했다. 붓다는 마족들에게 이단의 교리인 '카스트제도의 부정, 브라만의 희생제의 금지'를 설파하여 브라만교를 저버리게 만든다. 그 결과 마족들은 힘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힌두교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마족이든 현자이든 브라만에게 희생제를 열심히 드리면 신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근간으로 하는 종교다. 붓다는 마족들이 힌두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도록 해 마족들을 멸망시키는 지도자로 등장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마족 멸망의 선두주자인 비슈누 신의 화신이지만 멸망해야 할 마족이 아니라면 석가모니의 말씀은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요약하면 힌두교가 석가모니를 자기들 체계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제일 먼저 취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석가모니가 한 말은 전부 진리에서 벗어난 말이니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힌두교는 '비겁하게 그리고 위선적으로 ' 불교에 대응한 것이다. 이런 힌두교의 역사가 자랑스러운가. 

 

p.103

참파르는 브라만에서 수드라까지의 4성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으로, 죽은 소를 처리한다. 조선시대에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가 천대 받는 하층계급이었듯, 가죽을 다루는 직업은 어느 나라나 천대받았다. 톰 튀크베어 감독의 영화 <향수(2006)에서 보여지듯, 무두질하는 노동자들은 10대를 넘기지 못하고 감염으로 죽을 정도로 무두질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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