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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물의 세계사

by Diligejy 2025.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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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세계사:부와 권력을 향한 인류 문명의 투쟁 - 세계사 | 쿠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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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

물은 모든 종류의 자연현상과 섞인다. 상상하기 힘들 테지만 물은 또한 인류의 특정한 운명과도 섞인다.

 

-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의 기억]

 

p.10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는 적응이 느린 사회에 비해 더 생산적이고 더 큰 규모로 수자원을 이용한다.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싸고 풍부한 물은 산업시대에 고도성장을 추동하는 요인이다. 물 사용량의 증가 속도는 세계 인구 증가보다 두 배 이상 빠르며, 20세기에 물 사용량이 아홉 배 늘어난 것은 에너지 사용량이 열세 배 늘어난 것에 필적할 만한 일이다. 이와 반대로 수자원 기반시설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거나 물 관련 장애를 극복하고 잠재적 이용 가능성이 있는 물을 끌어다 쓰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쇠퇴와 정체의 표시였다.

 

p.23

지구에 존재하는 전체 물은 엄청나게 많지만 지구상의 생물과 인간 문명에 필수불가결한 담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지구의 물 가운데 오직 2.5퍼센트만이 담수이다. 그중에서도 3분의 2는 얼음이나 빙하 속에 묶여 있어서 인간이 이용할 수 없다. 나머지 3분의 1도 대부분은 암반층으로 덮인 지하 대수층(수 킬로미터 지하에 고립된 지하 호수 형태이다.)에 있어서 접근하지 못하거나 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런 대수층은 지표면에 존재하는 담수의 백 배나 된다. 결국 전체 담수의 0.003퍼센트만이 지표면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냉대지역이나 토양 속 수분, 동식물의 몸 속, 혹은 공기 중의 수증기 형태로 존재한다.

 

세계의 담수에 대한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역사상 인간사회가 가장 광범위하게 이용해 왔던 수자원인 강과 시내는 전체 물의 6만 분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일부 사회는 호수 근처에 자리 잡았는데, 호수의 물은 누적적으로 보면 강에 비해 마흔 배나 많지만 대신 사람이 접근하는 주변 지역의 넓이가 강변에 비해 훨씬 작기 때문에 대규모 문명이 호수에 의존해서 발전할 수는 없다. 더구나 많은 호수들은 극심하게 추운 지역이나 산악 고지대처럼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가운데 4분의 3은 세 호수군에 집중되어 있다. 바로 시베리아의 먼 곳에 위치한 바이칼 호, 북아메리카의 오대호, 탕가니카 호와 니아사 호로 대표되는 동아프리카 고산지역의 열곡호이다. 역사상 여러 사회에서는 지하 얕은 곳에서 서서히 흘러가는 지하수도 많이 이용했는데, 이것은 지표면의 강과 호수에 상응하는 수자원이다.

 

https://youtu.be/VkaXLPJW1Fg?si=J-fwGd5UQrv43i6u

 

https://youtu.be/aHvKZPRufkY?si=2j6JG7yfZAqxBFkv

 

 

 

p.24

어느 때나 지구 물의 1000분의 1은 대기를 통해 순환중이다. 증발된 물 대부분은 대양에서 올라온 물이며 이는 눈이나 비의 형태로 전환된다. 염분이 제거되어 깨끗해진 물 가운데 일부는 땅 위로 내려서, 다시 바다로 돌아가기 전에 담수 생태계를 거친다. 역사의 초기부터 사람들은 그 가운데 일부만 이용했다. 3분의 2는 범람해 증발하거나 토양 속으로 직접 흡수되어 사라졌고, 나머지 많은 양이 대다수 사람들이 이용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열대지역이나 냉대지역으로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이용할 수 있는 담수는 놀라울 정도로 불균등하게 분포한다. 지구 전체로 볼 때 모든 유수의 3분의 1은 브라질, 러시아, 캐나다, 미국에 있지만 이곳 인구를 전부 합치면 세계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반대로 세계 인구의 33분의 1이 모여 있는 반건조 지역에는 재생가능한 물의 8퍼센트만 배분되어 있다. 1리터에 1킬로그램이나 나가 석유보다 20퍼센트나 더 무거운, 이 액체(물)를 다루는 일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역사상 모든 사회의 운명은 대개 그 지역의 물 자원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p.30

수렵채집인들이 왜 갑자기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고 건강에 유리한 삶을 버리고 더 노동집약적이고 건강에도 불리한 농업 생활을 택했는지에 대한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기후와 물 조건상의 환경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온난한 시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지구온난화와 습도 증가로 인해 빙하가 북쪽으로 물러가고 툰드라의 이끼와 풀 역시 점차 북쪽으로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빽뺵한 온대 삼림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짐승 떼가 먹이를 찾아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약 1만 2,900년 전에 1,300년 정도 지속되는 소빙하기가 갑자기 시작된 것 역시 동물들이 더욱 빠른 속도로 사라진 요인일 것이다. 일부 집단은 그런 짐승 떼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더 작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거나 개방된 벌판에서 자라는 식용 식물들을 채집하였다. 정주 농업과 가축화의 실험이 뒤를 이었다. 

 

p.36

와트의 증기기관이나 산업혁명으로도 문명의 농업 의존도를 축소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21세기 초에 65억에 달하는 세계 인구의 수요를 충족하는 생산 혁신을 불러왔다. 세계적으로 경지 면적, 수량, 농업 기술 등이 극적으로 발전하고 팽창했지만 인간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관개사업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만은 고대 이래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세계 식량의 5분의 2는 관개 농지의 5분의 1도 안 되는 곳에서 생산된다. 모든 인간 사회는 고대 초기 문명에서 행한 관개작업의 유산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p.60~61

20세기에 우르를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덤불만 자라는 황량한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 풍경을 보면서, 이전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지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문했다. "한때 거대한 곡창지대였던 수메르에서 왜 인구가 완전히 사라지고 토양이 지력을 상실했을까?" 울리를 계승한 연구자들이 제시한 답은 배수가 잘 안 되는 땅에 염분이 누적되면서 토양의 비옥도가 저하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생태 기반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집약적인 관개농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에 부작용을 미쳐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우선 지하수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토양이 물에 잠기고 동시에 모세관 현상 때문에 치명적인 염분기가 작물 뿌리에 달라붙는다. 덥고 메마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일어나는 증발 현상으로 인해 한때 비옥했던 지표면에 눈에 보일 정도로 완연하게 소금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수확은 점차 감소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기원전 18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한 석판에는 "검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염분화에 대처하기 위해 수메르 인들은 밀보다 염분에 더 잘 견디는 보리를 재배했다. 기원전 3500년경에는 밀과 보리를 거의 같은 정도로 재배했지만 천 년 뒤 밀은 1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가 기원전 1700년경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두 작물 모두 이 700년 동안 생산성이 65퍼센트나 줄었다. 

 

세계사에는 토양의 염분화로 인한 쇠퇴와 붕괴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고대 이집트가 예외적으로 이런 치명적인 토양 염분화와 침수 현상을 피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나일 강이 철마다 범람하고 계곡의 경사가 급해서 물이 빠져나가면서 대부분의 염분기를 적절한 때에 쓸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위기를 심화시킨 두 번째 인공적인 환경 악화 요소는 숲의 남벌이다. 인간은 지구상 어디에 머무르든지 연료, 주택, 선박, 도구 제작을 위해 그리고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숲이 헐벗을 때까지 나무를 베어 버린다. 주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함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현재는 황량하기 그지 없는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한때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숲을 개간하면 그 지역은 더 메마르고 덜 비옥해진다. 이 때문에 강수량도 줄어들고 토양이 빗물을 머금는 능력도 떨어진다. 급류가 몰아치면 비옥한 지표 토양이 쓸려가 버린다. 이처럼 물은 역사 내내 강력한 힘을 발휘해 토양을 이동시켰는데, 이 점에서 더 앞선 것은 산업화 시대의 인간뿐이다. 

 

p.64~65

함무라비는 세계 최초로 명문화된 법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간결한 문구로 알려진 이 법전은 바빌론의 중앙 신전에 세워진 2미터 높이의 석비에 새겨져 있다. 이 법전의 282개 조항들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상황과 주요 관심사들을 잘 보여 준다. 그 중 많은 것들은 물과 관련이 있다. 많은 조항들이 관개 댐과 운하의 운용에 대한 개인의 책임 문제를 다루며,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보면 바빌로니아 사회에서 이 문제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예컨대 53조는 이런 내용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너무나 게을러서 댐을 적절한 상태로 관리하지 않았는데 댐이 무너져서 모든 경지가 침수되었다면, 무너진 곳을 관리한 사람을 노예로 팔아서 그 돈으로 그가 손해를 끼친 곡물을 변상한다." 236, 237, 238조는 의무를 게을리한 선원이 침몰한 배나 잃어버린 화물을 보상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또한 개인의 소유권과 메소포타미아에 필요한 물품을 들여오는 상인의 계약에 대한 정치적 보호, 또 결혼 계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때 여인의 권리 보장에 대한 놀라운 사항들도 거론하고 있다. 

 

p.81

동지중해의 소규모 고대 해양국가들이 국제적인 해양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원해서라기보다 국내 농업 생산과 수자원이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강우량, 산지에 위치한 땅, 소규모 농지 그리고 이 지역의 강들이 내륙의 원거리 조운이나 관개농업에 모두 적합지 않았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유지할 만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런 가혹한 지리적 도전이 오히려 경제적 잉여를 늘리기 위한 좋은 방법을 제공했다. 항해 기술을 익힌 사람들에게 바다는 다른 연안 국가들과 연결할 수 있는 훌륭한 고속도로였다. 그들은 에게 해 주변 지역에서 자체 생산된 특별한 상품들, 특히 값비싼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수출하고 그 대신 곡물과 기본 물자들을 수입했다. 들쭉날쭉한 이 지역의 해안선도 해상상업과 어업에 유리한 항구를 제공하는 요소가 되었다. 또 해상 장벽 자체가 인근 수리제국의 우월한 무력에 맞서 소국의 독립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92~93

고대 그리스부터 대영제국과 핵추진 해군력이 주축이 된 현대까지 해군의 우위는 언제나 권력의 주축이었다. 비록 살라미스 해전 같은 대규모 해전은 드문 편이지만, 바다의 통제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흔히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내륙 수로가 부재한 지중해에서 제국들은 해군력에 따라 흥망성쇠가 바뀌곤 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둔 사건부터 1588년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눌러 이긴 전투, 나폴레옹의 나일 강 전투(1798)와 트라팔가르 전투(1805),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중 대서양에서 비스마르크 호, 대평양에서 미드웨이 호가 활약한 결정적인 전투에 이르기까지 살라미스의 교훈은 계속 이어졌다. 

 

p.94

해양문화에서는 권리를 지닌 시민들을 위한 대의제적 자유시장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모델이 더욱 발전했다. 관개사업과 대지 중심의 수리국가 민중들로서는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정책 지시와 중과세에 따르는 일 외에는 실제적으로 다른 경제적 대안이 거의 없었떤 데 비해, 사적인 해양상인들은 저렴한 세금을 내고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며 안전이 확보된 항구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상 많은 중요한 해양무역 국가들이 대개 중요한 대의제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이며, 이들이 모두 아테네에서 탄생한 정치경제의 계보를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테네의 흥기와 함께, 상품과 인력을 동원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 사이에 문명의 거대한 이원적 긴장이 결합되었다. 하나는 권위적인 정부의 지시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가격이라는 기준과 사적 이윤의 동기로서, 이 두 가지는 21세기까지 여러 형태로 우위를 다퉜다.

 

p.109~110

로마는 해상 교역 중심지이자 지중해 주변 지역의 부유한 속주들에 대한 제국적 착취의 중심지로서 경제 잉여를 누렸다. 이 속주들의 정치경제 역시 점차 로마라는 거대 중심지의 필요와 맥박에 맞추어 움직였다. 절정기에 백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로마는 서구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대 도시였으며, 향후 2,000년 동안 계속 그런 지위를 누렸다. 이는 이탈리아의 농업이나 상공업으로 지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로마가 변경의 속주 자산을 근거로 부유해질수록 로마의 내부적 안정성은 더욱 속주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만성적인 고실업 때문에 절정기의 로마는 결국 복지국가 형태로 귀결되었다. 5분의 1에 달하는 난폭한 시민들이 공공 창고에서 지원되는 빵과 무상으로 제공되는 구경거리, 곧 콜로세움이나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서커스장)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검투사 경기, 선박 레이스, 다양한 게임 등을 향유했다. 로마의 기본적인 식량만 조달하려 해도 1년에 약 30만 톤을 안정적으로 수입해야 했다. 이 가운데 3분의 2 정도는 며칠 내에 항해 가능한 지역에서 들어왔다. 나머지 3분의 1은 이집트에서 수입했는데, 편서풍을 거스르며 30~60일 정도 걸리는 위험한 항해를 해야 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모든 황제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공해를 항해하는 거대한 식량 운송선 선단을 수호하는 데 국가 정책의 우위를 두었다. 이 화물선들은 길이 55미터, 높이 13미터에 이르는 큰 배로서 19세기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배보다도 더 컸다. 서기 62년 식량 운송선을 이용해 로마로 간 유명한 여행자들 가운데는 성 바울도 있다. 나일 강 유역은 식량 저장고로서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칙령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곡물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로마의 지배하에서 나일 강의 관개시설은 더 강화되었고 경작지도 증대되었다. 나일 강의 범람기가 길어지고 비가 균등하게 내린 덕분에 무난히 잘 진행되었다. 

 

로마는 또한 기근에 시달리는 수많은 군인과 시민들에게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 수력을 이용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곡물을 갈아 빵 제조용 밀가루를 만들기 위해 강이나 인공 수로 위에 물레방아를 이용한 제분소를 무수히 건설했다. 흐르는 물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바퀴와 거기에 달린 맷돌을 돌리는 방식이다. 이미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엔지니어들은 수평으롣 돌아가던 전통적인 물레방아를 수직 방향으로 바꾸고 기어를 통해 힘을 배가하는 창의적인 방식을 개발했다. 파병 부대와 시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로마 인들이 설치한 많은 물레방아들은 대단히 크고 강력했다. 서기 4세기에 프랑스 아를 지방 근처의 바르베갈에 세워진 유명한 물레방아는 10킬로미터나 되는 수로에서 나오는 수력을 통해 8쌍의 바퀴를 돌렸다. 여기에서는 하루 10톤의 곡물 제분이 가능했다. 이렇듯 로마에서는 가정용 혹은 지방 공동체용 소규모 물레방아가 집중화된 대규모 빵 제조 도구로 변모해 갔다. 이는 곧 국력의 핵심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로마는 그렇게 발전된 물레방아 기술의 엄청난 가능성을 왜 빵 만드는 데만 쓰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는가? 이는 실로 역사적 난제 중 하나이다. 로마는 기계 톱, 축융 망치, 동력 망치, 제철 용광로의 온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송풍구 등 각종 산업 용도에 물레방아를 적용할 수 있는 충분한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노예 노동력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계화의 유인이 없었던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인들이 유용하게 사용한 새로운 엔지니어링 기술로 광업용 수압 기술을 들 수 있다. 화폐와 재정 체계에 필수적인 금을 스페인 산지에서 채굴할 때 인력보다 분출하는 물의 압력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었다. 로마의 엔지니어들은 채굴 지역의 120~240미터 위에 거대한 탱크를 세우고 거기에서 물을 떨어뜨려 그 힘으로 언덕을 파헤치고 금맥이 노출된 바위를 부수었다. 이 방식이 가장 집약적으로 사용된 유명한 사례는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 나타났다.

 

p.112~113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에 물 배분 유형은 권력과 계급 구조의 지도와도 같다. 로마제국의 전성기 때 수로로 배급되는 물 가운데 거의 5분의 1은 고위 귀족의 교외 별장과 농장의 물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이용되었다. 도시 성벽 내에서는 유료로 물을 사용하는 개인 소비자와 산업들, 그리고 황제에게 물 사용 권리를 받은 사람들이 또 다른 물 유산계급(water-Haves)이 되어 5분의 2 정도를 이용했다. 이에 비해 일반인들이 무료로 사용하는 물 공급량은 겨우 10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빵 분배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이나마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은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의 근간이었으므로 로마의 관리들은 이를 조심스럽게 유지하려 했다. 수로로 배급되는 물 가운데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황제가 사용하였다. 공공 기념물, 목욕탕, 해상에서 벌이는 스펙터클 및 그 외의 몇 가지 공공 목적의 용도에 점차 많은 물이 쓰였다. 로마의 고위 귀족은 집에 냉수와 온수가 모두 나오는 상수도, 위생적인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편리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늘날 쓰이는 고압 폐쇄 배관 시스템과 달리 로마의 수로는 수원지에서 자연적인 중력을 이용해서 물을 흘려보냈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 거리에 걸쳐 정확한 기울기를 유지해야 했다. 다만 시내에 들어오면 고지대에 물을 올려 보내기 위해 고압 배관시설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수로는 지하에 묻혀 있었다. 다만 이 시스템의 15퍼센트 정도는 지상에 위치했으며, 높이가 다른 지형 간에도 경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유명한 아치형 구조물을 건설했다. 

 

p.129

치수는 인간의 수기(修己)와 자연 질서와의 관계의 올바른 원칙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틀이 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도가에서는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가차 없는 힘으로 모든 단단하고 강한 장애물들을 쓸어 가는 물이 자연의 요체를 표현하며, 그런 이유에서 인간 행동의 모범이 된다고 주장했다. 도가의 엔지니어들은 치수사업을 설계할 때 물이 가능하면 쉽게 흘러가도록 했으며 그래서 자연 생태계의 동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도자들도 설득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서서히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유가에서는 공익을 위해서는 자연이든 인간 사회든 더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제방이나 댐 같은 가공물을 이용해서 황제와 기술자가 규정하는 인간의 요구에 강이 복종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논했다. 한대부터 21세기 후기 공산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수력학의 지배적인 원칙이 된 것은 유가이지만, 그 밑에 깔린 원칙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공학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물 부족 문제에 대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현재도 지구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p.141~142

왜 로마제국은 통합에 실패했는데 중국은 성공했을까? 한 가지 결정적인 요소는 양쯔 강과 황허 강을 연결하는 제국 대운하의 건설이다. 수제국은 진제국과 마찬가지로 거대하고 가혹한 방식으로 기반시설 건설에 매진했다. 500만 명의 남녀 노역자를 동원하여 단 6년 동안에 무서운 속력으로 사업을 진행해 610년에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177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길이에 S자 모양을 한 대운하는 기원전 5세기부터 불연속적으로 건설된 여러 지방 운하들을 연결하고 여기에 새로운 운하들을 더해서 만들어졌다. 모두 합쳐서 4만 8,00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길이의 전국적인 내륙 수로망이 형성되자 재통합된 중국에서는 남중국의 테라스식 언덕배기 논에서 생산한 쌀을 황허 강 유역에 위치한 대규모의 인구 중심지와 군대에 보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아시아 스텝 지역의 호전적인 기마 유목민들의 지속적인 위협을 막을 수 있었다.

 

대운하는 한제국을 무너뜨린 취약성을 극복한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중국의 남북 간 수리학적 단층선을 연결함으로써 지리적으로 상이한 두 구역의 자연자원 및 인적자원의 이용에 시너지 효과를 냈고, 이 덕분에 화려한 중세 황금기를 열었다. 중국 전체에 새로운 경제, 문화적 활력이 넘쳤다. 한 제국에 비해 수와 당 왕조는 더 탄탄한 이중의 토대를 보유한 셈이다. 하나는 전통적인 북쪽 황허 강 유역이고 다른 하나는 수 세기 동안 착실하게 성장해 생산성이 더 높아진 남쪽의 양쯔 강 유역이다. 

 

이에 비해 로마제국과 유럽은 내부 수로와 같은 통합 추진력이 결여되었다. 유럽의 주요 수상 동맥이라 할 수 있는 도나우-라인 강은 지중해 유럽 문명의 초기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흐르기 때문에 그런 목적에는 잘 맞지 않았다. 그 두 강의 유역은 강우 의존형 농경이 힘든 토양인 데다가 호전적인 민족들에게 포위당한 불안정한 변경 지역이었다. 또 지중해는 개방된 바다이므로 대규모로 관개된 강에 비해 통제가 훨씬 어려웠고 따라서 통합 역할도 미진했다. 이 시점부터 중국과 유럽의 역사는 다르게 진행된다. 과거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유럽 대륙은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의 분열된 조합이 되었고 침체된 암흑시대가 장기간 지속된 데 비해, 중국에서는 대운하가 받침점이 되어서 수송, 농업, 산업 면에서 중세 경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p.146~148

중국의 벼농사 혁명은 11세기에 정부가 베트남 중부의 참파 지역에서 60일 만에 익는 다양한 신품종 벼들을 수입한 때에 정점에 도달했다. 조생종 참파 벼는 국내종보다 물도 적게 필요했으며, 그래서 언덕의 논에서도 재배가 가능했다. 이런 지역들도 역사상 처음으로 관개되기 시작했다. 1012년에 송의 황제 인종은 참파 벼 품종들을 농부들에게 나눠주라고 명령했다. 식량 증산을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 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갑자기 관개 논에서 이모작이나 삼모작이 가능해졌다. 곧 인구 증가가 뒤따랐다. 12세기 말에는 중국 인구가 1억 2,000만 명에 도달했는데, 서기 2년 한대의 최대 인구 혹은 700년경 당대 인구의 두 배였다. 이 가운데 약 7,500만 명이 남쪽에서 살았는데, 북쪽 인구가 더 많았던 지금까지의 상황이 역전된 것이었다. 이제 중국인은 주로 쌀을 먹는 조밀한 인구 집단으로 굳어졌다. 이것이 21세기 초까지 중국의 사회경제 구조를 결정지었다. 대운하를 이용한 다량의 식량 수송이 가능해지자 항저우, 카이펑, 뤄양, 베이징 같은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 중심지들이 등장했다. 이는 다시 개인 상업과 공업 발전을 가져왔다. 중국사의 위대한 시대인 송대에 이런 도시 중심지들은 유럽보다 6~7세기 앞서 주목할 만한 과학적 르네상스, 기업가 정신, 원산업화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때 등장한 많은 발명들 중 일부는 인도양이나 비단길을 통해 서쪽으로 전해져서 이슬람 문명과 후일에는 유럽 문명의 성장을 촉발했다.

 

1100년까지 중국은 세계 최고의 기술적 리더였다. 코크스를 이용한 철융해, 대운하 운송, 교량 디자인, 수력을 이용한 직물 생산, 철제 농기구 생산 등은 유럽보다 600년 정도 앞서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초석(질산칼륨)과 숯, 황을 섞어서 만든, 가열하면 폭발하는 물질, 다시 말해서 화약을 최초로 발명했다. 또한 총포, 천문과 항해를 계량하는 과학 도구들, 물시계, 인쇄술, 활자, 지폐, 심지어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까지 발명했다. 

 

북송대 중국의 최고의 도시이자 아마도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는 수도인 카이펑이었다. 1100년에 이 도시는 등록된 인구와 군대를 합쳐서 약 140만 명이 살고 있어서 고대 로마보다도 컸다. 대운하와 황허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춘 이 도시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쌀 운반 바지선도 쉽게 들어왔고, 북중국의 광산에서 채굴된 철과 석탄도 수상 운송 체계를 통해 쉽게 들어왔다. 카이펑은 중요한 공업 중심지로 부상했다. 서기 1000년경에 이 지역 전체에서 삼림이 벌채된 채 자극을 받아 용광로에 목탄 대신 석탄을 가공한 코크스를 사용하는 혁신적인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들은 또 주철을 이용하여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 내는 탈탄소법을 발명했다. 1078년이 되면 중국은 11만 4,000톤의 선철을 생산했는데, 700년 후 영국 전체 생산량의 두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직물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기 1300년 이전에 중국의 직조공들은 끓는 물에 담근 누에고치들에서 여러 가닥의 견사를 뽑아 낼 수 있는 수력 방직기를 사용했다. 영국의 더비에서 최초의 수력 방적기를 사용하여 견직 스타킹을 짠 것이 공장제의 출현에 일조했다고 하지만, 중국은 이보다 400년이나 앞섰다. 사실 중국인들은 유럽에 비해 적어도 200년 앞서서 정교한 기어와 정확한 자동 메커니즘을 갖춘 기계식 시계를 발명했는데, 이는 정부 관료들이 지극히 중요한 공식 일정표를 정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090년에 카이펑의 탑에 장착된 유명한 물시계는 9미터 높이의 노리아 형태로서 25분마다 징과 벨이 울렸는데, 이 시계는 황제가 121명의 황후와 처첩들에게서 후손을 얻기 위해 동침 일정을 조정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라는 오래된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126년에 여진족이 침입해 들어왔다. 이들은 전통적인 강력한 기병대에다가 중국에게 배운 철제 무기 제조법을 결합해 막강한 힘으로 카이펑과 북중국을 유린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1234년에 몽골 족에게 격퇴되었다. 남쪽에서 계속 생명을 유지한 남송은 항저우에 새 수도를 정했다. 광대한 양쯔 강 자체가 자연적인 보호망이 된데다가, 새로 고안한 수백 척의 선박으로 구성한 함대로 1차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선박들은 외차와 트레드밀로 동력을 얻고, 선상에 화포를 설치하는 동시에 창병과 사수들을 승선시켜서 강과 운하에서 전투를 벌였다. 양쯔강 뒤로는 진흙 벼논이 2차 방어선이 되었는데, 몽골의 가공할 기병들도 여기에서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어망들 덕분에 그들은 칭기즈 칸의 후예의 공격에 맞서 1279년까지 버틸 수 있었다.

 

p.154

1433년에 이 모든 탐험은 급작스럽게 끝났다. 황제가 칙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외 항해와 외국인과의 접촉, 원양항해 선박의 건조를 금했다. 심지어 돛대가 2개 이상인 배도 금지할 정도였다. 정화의 거대한 전함들은 방치되어 썩었다. 해군에 종사했던 선원들은 대운하를 오가는 작은 배로 옮겨 탔다.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중국은 세계와 멀어져 국내로 향했다.

 

자신이 조우하는 모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고, 심지어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갈 수 있는 선박들을 보유하고 있던 강력한 세력이 갑자기 자신의 강점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순간이다. 역사가들은 만일 포르투갈 선박이 1498년에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직교역 원양 해로를 건설하기 위해 아프리카 남쪽을 돌아서 아시아로 진입해 들어갔을 때 강력한 중국이 인도양의 핵심 지역들과 주요 해로를 통제하는 상황에 직면했더라면 세계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해 보곤 한다. 더 나아가서 만일 중국이 세계와 단절되는 대신 자신의 해상력과 공업의 우위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하고, 대서양의 조류와 풍향 시스템을 파악하고, 콜럼버스와 다가마가 닻을 올리기도 전에 유럽과 아메리카에 나타났다면 혹시 유럽이 정복과 식민화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p.155~156

해상 수송로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곧 폐쇄되었다. "1411년 베이징까지 연결하는 대운하가 재건설되고 1415년에 주요 해상 수송로가 봉쇄되면서 해군은 처음으로 필수품이 아니라 사치품이 되었다."라고 중국사가인 마크 엘빈은 지적했다. 1415년 이후 조선을 담당하는 재원은 운하 통행용 보트 건조를 맡았다. 1419년부터 모든 원양항해용 선박 건조가 중단되었다. 1433년 이후 정화의 원정을 중단하고 중국 내부의 자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은 똑같은 내향적 정책 결정의 또 다른 단계일 뿐이었다.

 

새 대운하의 완성은 중국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서 나머지 세계와 단절하게 된 정책적 전환의 계기였다. 더구나 대운하는 더 자족적이고 통제적인 수리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명의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높여주었다. 황제와 그 주변의 보수적인 신유교 관료들은 지주 계급과 결탁하여 아직 잔존한 상인층을 힘으로 억눌렀다. 바로 이 계층이 활기찬 송대 황금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은 당시 유럽과 대조를 보인다. 유럽은 전체를 통합하는 내륙 수상 수송 체계가 없고 그 대신 해상 수송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작은 국가 단위가 만들어졌고, 이런 체제가 완성되면서 통제받지 않은 교역과 자유시장 기업들이 확대되었다.

 

14세기 이후로도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지만, 중국의 내적인 활력과 창조적인 혁신성은 점차 쇠퇴했다. 이것이 두 번째 역사적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세의 중국은 산업적으로 매우 발달해 있었고 필요한 모든 과학적 노하우를 갖추고 있어서 서구에서 결정적인 돌파가 이루어지기 수백 년 전에 근대 산업주의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다음 단계로 진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적인 답만 간략히 이야기하라면 강력한 고립주의적, 중앙집권적 국가의 등장이 시장지향적인 경제 엔진의 등장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18세기에 영국이 이윤 동기와 기술 혁신을 결합해 산업혁명으로 이행하는 돌파구를 만들어 낸 요소였다. 중국의 산업상의 이륙을 가로막은 또 다른 핵심 요인은 벼농사를 짓는 사회의 특성 때문에 늘 값싼 노동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증기기관처럼 인력을 절감하는 기술을 발전시킬 정치적, 경제적 유인이 높지 않았다. 증기기관은 제철과 함께 초기 산업시대를 추동하는 시너지 효과를 낸 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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