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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했다.
완독 순간의 느낌은 서로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에 대해 대조하고 변증법으로 조화되는 구조에 집중해야 하는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 전반에 걸쳐 이 느낌을 강렬히 받았고 마지막 문장까지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느낌이 너무 강조되었기 때문에 이 구조에만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너무 표면적인 해석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런 구도로 소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마치 나르치스가 상상 없는 이성으로만 세상을 접근하는 것, 골드문트가 관능의 세계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표면적이고 하나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에서 평온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의 나르치스가 결국 골드문트의 말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골드문트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구원받는 것처럼 이 소설은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다루고 있고 이를 통해 구원받는 두 청년의 이야기라고 정의해야 옳을 것 같다.
두 청년 모두 완전함을 향해 나아갔으나 결국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가진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깨닫는다.
소설에 나오듯 완전함은 신의 영역이기에 필멸하는 유한자인 인간이 접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신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것은 사랑을 통해 불완전함 속에서도 구원이라는 완전함을 아주 잠깐 엿볼 수 있도록 틈을 열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은 결코 홀로 이룰 수 없으며, 홀로 깨달을 수도 없다.
인간으로서 구원받고 싶다면 사랑을 깨닫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밑줄긋기
p.64
나는 본성상 학자이며 내 숙명은 학문을 연구하는 거야.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은 네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발견하려는 집념'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학문의 본질을 그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야. 우리 학문하는 사람한테는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 학문이란 말하자면 차이점을 찾아내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
p.95
내 생각에,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나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책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 글자와 낱말들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때때로 나는 그리스어 글자 세타나 오메가 등을 쓰곤 하는데, 그럴 때 펜을 조금만 돌려서 써보면 글자가 꼬리를 치면서 물고기가 되기도 해. 그러면 순식간에 이 세상의 크고 작은 개천과 강물들, 시원하고 습기가 찬 모든 곳, 호머가 항해했던 대양이나 베드로가 걸어갔던 물가도 떠올라. 또 그 글자들이 새가 되어 꼬리를 치고, 깃털을 부비고, 몸통을 부풀리고, 지저귀고, 날아가 버리기도 해. 그런데 나르치스, 너는 그런 글자들이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바로 그런 글자들을 가지고 하느님이 이 세상을 표현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p.96
인간의 정신이란 확고한 것이나 형체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법이어서, 정해 놓은 기호들에 의지할 수 있기를 바라거든. 인간의 정신은 생성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능성보다는 현실성을 더 좋아하지. 오메가라는 글자가 뱀이나 새가 되는 것을 정신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래서 정신은 자연 속에서는 살 수 없고, 오로지 자연에 맞서서 자연의 적수로서만 살아갈 수 있어.
p.236~237
그는 생각을 이어갔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모든 정신의 뿌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덧없이 사라지는 것 앞에서 몸서리치고,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슬픔으로 바라본다. 우리들 역시 덧없이 사라지고 금방 시들어 버릴 것임을 가슴속에서 확신하고 있다. 그런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체계화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는 행위이다. 우리 자신보다 더 오래 영속할 무언가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명인이 창조한 성모 마리아 상의 실제 모델이었던 여인은 이미 시들어 버렸거나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명인도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의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게 되고 그가 앉던 식탁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게 되리라.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그대로 남을 것이며, 조용한 수도원 예배당 안에서 수백 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그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의 빛을 발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꽃향기를 풍기면서도 슬픔을 머금은 그 입으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p.287
그 집 대문을 넘어서자마자 골목길이, 도시가 갑자기 이전과 다른 낯선 표정을 띠었다. 인간의 마음이 작별을 고하면 낯익은 사물들도 갑자기 낯선 표정을 짓는 법이기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대문을 한 번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이제 그에게는 닫혀 있는 낯선 집의 문일 뿐이었다.
p.291
사실 모든 생명은 분열과 모순을 통해 풍요로워지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도취의 상태를 모르는 이성과 냉철함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배후에 죽음이 없는 관능적 욕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성 간의 영원한 대립이 없다면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350-351
골드문트는 통 속에 들어 있는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생선들을 들여다보았다. 전에도 이렇게 생선들을 구경한 적이 있었고, 종종 그것들이 불쌍해 보여서 생선 장수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었다. 또 어느 날 아침에는 생선들을 바라보며 감탄도 하고 동정도 하다가, 무척이나 슬픈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저 강으로 많은 물이 흘러갔겠지만, 그때 무척이나 슬퍼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했는지 이제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렇다. 슬픔은 지나가 버렸고, 기쁨도 절망도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지나간 감정들은 퇴색되어 그 깊이와 값어치를 잃어버리고, 마침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통도 그렇게 꽃잎처럼 떨어져 시들고 만다. 오늘 느낀 고통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까? 스승이 죽었으며 그것도 자기에 대한 원망을 품고 죽었다는 이 절망감, 작업실이 폐쇄되어 창작의 행복을 맛볼 수 없게 된 이 절망감, 영혼에 떠오르는 수많은 영상들을 재현하지 못하게 된 이 절망감 또한 언젠가는 시들고 말까? 그럴 것이다. 이런 고통과 쓰디쓴 괴로움 역시 언젠가는 옛날 일이 되어 잊히고 말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뇌조차도 영속되지 않는다.
p.370~372
인생에 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웠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물론 관능의 유희에 빠져 살아갈 수도 있었고, 영원한 여성 이브의 품에서 젖을 빨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갖가지 향락은 얻을지언정 인생의 무상함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마치 숲 속에서 자라는 버섯처럼 오늘은 아름다운 색깔을 뽐내다가 내일이면 썩어 없어지리라. 자신을 방어하며 작업실에 틀어박혀 이 덧없는 인생에 하나의 기념비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인생은 포기하고 불멸의 것에 봉사하는 하나의 도구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삶의 자유를, 삶의 충만함과 쾌락을 잃고 말 것이다. 스승 니클라우스의 일생이 그러했듯이.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양자택일에 의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는 창작, 창조의 숭고함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 그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양자택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조를 지키면서도 관능의 쾌락을 놓치지 않았던 가장이, 정주하는 삶을 살았으나 마음의 자유나 모험의 결핍에 시달리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한 이원성, 그러한 대립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여자가 아니면 남자이고, 떠돌이가 아니면 정주자이고, 이성적이 아니면 감정적이었따. 숨을 들이마시면서도 내뱉고, 남자이면서도 여자이고, 자유를 원하면서도 질서를 바라고, 충동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것은, 양자를 동시에 체험하는 존재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어느 한쪽을 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 쪽을 희생시켜야 하지만, 사실 한쪽 못지 않게 다른 한쪽도 중요하고 열망할 가치가 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여성이 좀 더 견디기 수월한지 모른다. 여성은 쾌락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사랑의 행복에서 아이를 얻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성은 그처럼 소박한 결실 대신 영원한 동경의 능력만 타고났다. 그 모든 것을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노여움이나 적개심으로 만물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아닐까? 혹시 스스로 창조한 피조물의 고통을 즐기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지는 않으리라. 만약 하느님이 노루와 사슴, 물고기와 새, 숲과 꽃, 사계절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노여움을 가졌을 리 없다. 하지만 분명 하느님의 창조물에는 균열과 동경이라는 결함이 존재한다. 그것이 실패작이어서든 미완성이어서든 간에, 하느님의 특별한 의도이든 하느님의 적이 뿌린 원죄의 씨앗이든 간에. 그런데 어째서 그런 동경과 균열이 죄가 된단 말인가? 사실 인간이 하느님께 감사의 제물로 되돌려 드리는 모든 아름다운 것과 성스러운 것은, 바로 그런 동경과 균열이 창조해낸 것이 아닌가?
p.400~401
"자네는 예전에 이 세상은 신성하다고, 이 세상은 여러 개의 커다란 원의 조화이며 그 중심에 조물주가 자리하고 계신다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고, 자주 주장했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나 성 아퀴나스의 책 속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이 모순을 어떻게 해명하겠나?"
나르치스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기억력은 놀랍네만 약간 착각을 한 것 같아. 나는 늘 조물주를 완전한 존재로 경배하긴 했지만, 피조물이 완전하다고 한 적은 없네. 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도 결코 부정하지 않았네. 진정한 사상가라면 이 지상의 삶은 조화롭고 정당하다느니, 인간은 선량한 존재라느니 하는 주장은 하지 않을 거야. 성서에서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꾸며지고 지어지는 것은 악하다고 강조하고 있지. 그리고 우리들은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매일 경험하고 있고."
"좋아. 이제야 자네 같은 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겠네. 그러니까 인간은 사악하고, 이 세상의 삶은 온통 비열함과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자네들도 인정한단 말이군. 하지만 자네들의 생각이나 교훈서의 이면에는 정의라든가 완전무결함 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네. 그러니까 자네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증명할 수도 있으면서 그것을 결코 선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일세."
"우리 신학자들에 대한 불만을 잔뜩 쌓아 놓고 있군그래!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사상가가 되지 못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군. 자넨 공부를 좀 더 해야겠네. 대체 왜 우리가 정의라는 이념을 선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우리는 매일, 매시간 그렇게 하고 있네. 예를 들자면 나는 수도원장으로서 수도원을 이끌어 가야 하는데, 수도원도 바깥세상과 마찬가지로 완전하지도 못하고 죄악이 없는 바도 아닐세. 그래서 정의라는 이념을 세워 끊임없이 원죄에 맞서 싸우고, 우리의 불완전한 삶 속의 죄악도 그 이념에 따라 시정하면서 늘 우리들의 삶을 하느님과 결부시키려 애쓴다네."
p.418~419
완벽한 존재는 신이네. 그 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쯤 존재하는 미완의 것이고, 부분적인 것이고, 생성되어 가는 것이며,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고,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하지만 신은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로 이루어진 존재고,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완전한 현실일세. 그에 반해 우리 인간은 덧없이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며, 가능성의 존재이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함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완벽한 인간도 없네. 하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되네. 완전한 것과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일세. 그것이 말하자면 자아실현일세. 자네는 그 과정을 스스로의 경험으로 터득해야만 하네.
p.437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평화는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들 내부에 지속적으로 있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네. 항상 부단한 싸움으로 쟁취해야만 하는, 매일매일 새롭게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될 평화만 있을 뿐이라네. 물론 자네는 내가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다행스럽게도, 연구할 때의 나의 싸움이나 기도실에서의 나의 싸움을 자네는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자네만큼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만 보고 나를 평화롭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보이는 내 삶 역시 싸움이라네. 제대로 된 모든 삶은 다 그런 싸움과 희생에서 얻어지네. 자네의 삶이 그러하듯이.
p.447
그렇지만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즉 하느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질서와 규율에 의한 모범적인 삶이,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는 삶이, 더러움과 피를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 몰입하는 삶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과연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모든 일이 과연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고, 그리스어를 익히고, 관능을 억제하고, 세속에서 달아나도록 창조된 존재일까? 애초에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부터 관능과 충동, 피 끓는 무지함, 죄와 향락과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천성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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