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46~147
한국의 특별한 '청춘 예찬'은 '새것 숭배 신드롬'이 인간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면 쉽게 풀린다. 과도한 '청춘 예찬'과 그에 따른 '비청춘 박해'의 사회적 효과는 '계급'문제를 '세대'문제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춘은 계급 갈등의 비무장지대DMZ라고 할 수 있다. 청춘에겐 꿈이 있기 때문이다. 꿈의 특성은 통계적 자료에 의해 논박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새것 숭배 신드롬'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사실 계급 갈등이 일어날 시간조차 없다. 장면이 워낙 후다닥 바뀌기 때문이다.
p.192
진실은 안개와 같다. 멀리선 보이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그 실체는 없다. 안개는 태양과 바람에 의해 사라지거나 다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진실 규명은 지하 광물을 캐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다.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뒤집으려는 힘이 끊임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p.193~194
우리 인간이 늘 진실을 알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진실은 상처를 준다. 차라리 진실을 모르고 넘어가길 바라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사실과 진실을 외면하려 애쓰는 이유에 주목했다. 셸던 월린의 해설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생성의 세계a world of becoming를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불변적인 것들을 갈망한다는 점을 특기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를 마치 행위의 진정한 근거인 양 취급한다. 인간의 행위의 관점에서 이것은 종종 일정한 습관이 사건의 흐름에 의해 오래 전에 무용지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거기에 집착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인간은 재조정의 고통스러운 작업을 새롭게 수행해야 하는 '현실' 세계의 불안보다는 친숙한 거짓 세계의 안전을 선호했다."
p.194
정희진은 "예전엔 상처받은 사람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달라요. 상처는 깨달음의 쾌락과 배움에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고, 안다는 것은 곧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p.197
프로파간다나 선전활동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은 정보가 객관적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정보가 진실인 것처럼 들리느냐 하는 것이다. 개연성probability이나 신뢰성credibility이 진실에 앞선다. 설사 어떤 정보가 정부의 장점을 밝히는 것일지라도 그 사실이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정부는 그 정보를 억누르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p.209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 체험 상처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다. 사회적 갈등에 대한 논리적 이성적 분석과 처방은 서구적이다. 한국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각기 다른 기억 체험 상처를 통합시켜주는 기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다.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보편주의적 관점에 선 민족주의 국가주의 비판이 그 비판자의 세련된 감각과 양식을 과시하는 효용에만 머무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p.212
독일의 역사학자 알프 뤼트케의 일상사 연구는 1933년 나치의 정권 장악 이후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탐구했는데, 그건 정치보다는 사생활을 중시하던 일상적 태도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의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자존심을 걸고 투쟁했는데, 그건 '고집'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었다. '고집'은 '저항성'과는 다른 것으로, 노동자들이 "항상 제3자나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강요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들을 갖고자"하는 것이었다.
이 고집은 외부의 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인간의 근본적 성향으로 작업장에서 감독관과 동료들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여러 가지 일탈행위를 통해 잘 드러났다. 나치 체제 아래서 노동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운동가들이 노동 대중의 관심사와는 유리된 채 거대한 정치적 이슈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p.213
신념이 도덕적 우월성과 만나면 독선으로 빠진다.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하는 사람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반대자들의 도덕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에드워드 기번이 초기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p.234
배신에 대한 인식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비대칭 또는 불균형을 이룬다. 매우 둔감하거나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거나 뻔뻔한 사람의 사전엔 배신이라는 단어가 없다. 배신을 당했다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자신이 배신을 저질렀다 해도 왜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p.267
한 가지 분명한 건 배신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좀처럼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배신자의 심리를 누구보다 더 잘 꿰뚫어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배신의 상처나 '사회적 비용'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코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이 이타성을 무기로 휘두르면서 자신의 배신을 정당화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건 매우 오래된 게임이다.
p.270
배신을 당한 사람들이 꼭 명심해야 할 게 하나 있다. 자신이 당한 배신의 상처를 광고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어리석다는 말만 들을 뿐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 원초적으로 동정할 수 없게끔 돼 있다. 이게 바로 배신의 특수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에서건 픽션에서건 배신에 대한 응징이 주로 살인으로 나타나는 건 배신의 상처가 남의 공감을 받기 어렵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신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배신의 주된 이유가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유념하여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이익'의 몫을 키우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게 부질없다고 생각한다면 대범한 관용을 키우는 것이다. 배신의 상처에 괴로워하면서 남의 동정심을 구걸하거나 자신을 소홀히 하는 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또 한번의 배신을 저지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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