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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해변의 카프카(상)

by Diligejy 2017. 8. 17.

p.17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p.19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p.68

전생의 인연 - 설사 하찮은 일이라도 이 세상에 완전한 우연은 없다는 뜻이야.


p.206

인간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게 쉽게 자기 힘으로 사물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p.207

인간은 무엇인가에 스스로를 밀착해 살아가는 존재지


p.215

어떤 종류의 불완전함을 지닌 작품은 불완전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 적어도 어떤 종류의 인간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긴다는 거야.


p.216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전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p.218

인간은 이 세상에서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지만.


p.256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p.258

내가 무엇을 상상하는가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이다.


p.285

눈을 감아서는 안 되네. 눈을 감아도 사태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으니까. 눈을 감았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사태는 더 악화되어 있을 거라네.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걸세, 나카타 상. 눈을 똑바로 떠야 하네. 눈을 감는 것은 약자가 하는 짓이야.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자가 하는 짓이란 말일세. 자네가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있단 말이야, 똑딱똑딱하고.


p.298

자연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평온함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위협적인 거야. 그 같은 배반성을 잘 받아들이려면, 그 나름의 준비와 경험이 필요해.


p.299

그리스의 신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화적이거든.


p.307

당사자 이외의 타인에게 행복이란 교훈적인 우화이고, 불행이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일 경우가 많지.


p.351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p.352~353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둘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가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p.365

관계성이 하나하나 모이면, 거기에서 자연히 의미라는 것이 생겨나거든. 관계성이 많이 모이면, 그 의미도 한층 더 깊어지고 말야.


p.366

상대가 어떤 것이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주위에 있는 모든것과의 사이에 자연히 의미가 생겨난다는 거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거지. 머리가 좋으냐 나쁘냐, 그런 게 아니라구. 그것을 자기 눈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그 문제일 뿐이지.


p.369

관계성도 변화하지. 누가 자본가이고 누가 프롤레타리아인가. 어느 쪽이 우파이고 어느 쪽이 좌파인가. 정보 혁명, 스톡 옵션, 자산의 유동화, 직능의 재편성, 다국적 기업 ......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사물의 경계선이 점점 소멸되고 있거든.


p.384

네 선택이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조금도 어김없는 너인 거고, 너 이외의 아무도 아닌 거야. 너는 너로서 틀림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p.384~385

인간이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인간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리스 비극의 근본을 이루는 세계관이지. 그리고 그 비극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하고 있는 것이지만-아이러니컬하게도 당사자의 결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사자의 장점을 지렛대로 해서 그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거야.


p.385

세계의 만물은 은유라고 하는 메타포거든. 누구나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메타포라는 장치를 통해서 아이러니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스로를 깊게 그리고 넓게 다져나간다는 얘기야.


p.442

그녀는 소년을 '해변의 카프카'라고 불렀다.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방황하고 있는 외톨이인 영혼. 아마 그것이 카프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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