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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마음사전(1)

by Diligejy 2015. 11. 20.

p.21~22

차단되고 싶으면서도 완전하게 차단되기 싫은 마음, 그것이 유리를 존재하게 한 것이다. 그러고 싶으면서도 그러기 싫은 마음의 미묘함을 유리처럼 간단하게 전달하고 있는 물체는 없는 것 같다. 가리면서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유리로 된 용기는 두루 사용된다. 술병도 그러하고 화장품 용기나 약병 같은 것도 그러하다. 안에 있으면서도 밖을 동경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은 분명 유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면서 동시에 허무는 것. 그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렇게 단순하게 안과 밖 혹은 이분법적인 구분이 아닌 것들로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유리는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p.23

거울은 배면이 수은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풍경 밖으로 걸어가기보다는 풍경 안에 침잠하게 하며, 유리는 아무것으로도 배면을 닫아놓지 않기 때문에 풍경 밖으로 걸어가게 한다. 마음을 확산하는 것이 유리라면, 마음을 수렴하는 것은 거울인 셈이다.

 

p.25

뜨거운 물에 차 알갱이가 풀려나가고, 담배 한 모금의 연기가 허공에 풀려나간다. 그 풀려나가는 실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매듭을 푼다. 찻물을 끓일 때에도 담배를 피워 물 때에도 불이 필요하다. 차와 담배는 온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를 볶을 때에도 녹차 잎을 말릴 때에도 열기가 필요하고, 담배를 피울 때에도 점화가 필요하듯이, 마음에도 열기와 점화가 필요하다. 냉정함이 열정의 한 방법이듯이, 냉정해지는 것에도 온기 있는 한때가 전제된다. 차 한잔과 담배 한 모금을 음미할 때처럼.

 

p.26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차 한 잔을 원한다. 찻잎이나 차 열매가 물기 하나 없이 건조된 후에야 뜨거운 물과 조우할 수 있듯이, 사람도 그와 같다. 충분히 건조되었을 때에야 온몸으로 응축하고 있던 향기를 더 향기롭게 퍼뜨리는 뜨거운 차 한 잔처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마주한 시간도 그와 같다. 향기롭게 발산하기 위하여 나에겐 언제나 따뜻한 물과 같은 당신이 필요하다.

 

p.30

 

방향

 

몸의 귀도 한쪽만 쓰면, 소리의 방향에 둔감해진다고 한다.

마음도 그렇다. 방향을 잃는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잘 듣지 못하고 헤맨다.

 

내 마음은 언제나 귀를 잘 닦고 양쪽을 함께 쓰고 싶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 잘 듣고

어디서 들려오는지 잘 알고

헤매지 않고 가 닿고 싶다.

마음이 가는 방향을 두 개의 귀의 균형 속에서 결정할 수만 있다면,

방황하고 소모하는 시간들을

아주 조금은 줄일 수 있으리라.

 

p.31

 

어둠

 

전등불을 갑자기 끄면 사방은 칠흑이지만,

이내 그곳에도 빛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물들의 실루엣이 보이다가

사물들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마음이 칠흑일 때,

차라리 마음의 눈을 감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길 기다린다면

그리고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따라간다면

 

이내 사물을 읽을 수 있고,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밝음 속에서 읽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온 마음으로 잘 읽힌다.

 

p.32

 

 

마음에도 망막이 있다.

망막이 물체를 뒤집어서 받아들이듯,

나도 당신의 표현을 뒤집어보곤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표현 너머를 볼 수 없어서

 

빛이 과하면 동공이 작아지고

빛이 모자라면 동공이 커지듯이

빛을 한 아름 품고 달려오는

당신 앞에서 나는 언제나 마음이 무한대로 부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점처럼 작아지곤 한다. 

 

p.53~54

 

죄책감

 

죄책감은 한 집단의 질서를 관장한다.

가장 인간적인 호소를 하며 집단의 질서를 창출한다.

규칙이나 약속을 어기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 우리의 죄책감은 찾아온다.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할 때에 죄책감을 느끼며,

도둑은 훔치려고 한 물건을 훔쳐내지 못하고 주저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더 깊은 죄책감에 빠졌을 것이다. 창밖에 퍼붓던 장마에 '이 비로 세상이 잠겼으면'하는 과대망상에 잠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고 나자 정말로 방방곡곡에서 홍수가 일어나 수재민들의 비참함이 뉴스에 보도된다면 꺼림직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가한 어느 시간에, 눈물과 한숨을 동반한 죄책감이 불쑥 찾아올 때도 있다. 아이였을 때에는 괜스레 부모에 대해 죄책감을 들곤 하며, 어른이 된 이후에는 인간이라는 그 사실에 죄책감이 들곤 한다. 이것은 나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하여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더 커질 때에 생기는 일차적인 감정인데,

적어도 덜 미안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종의 노력을 기울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뼈저린 죄책감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진화된다. 아이였을 때 사랑하던 강아지가 죽었던 경험으로 생명에 대한 애착을 깨달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부모와 사별한 후에 죄책감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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