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
최근 서울에서 한국의 이라크 파병을 북한 핵 문제와 연결시키겠다는 발언이 들려왔다. 이에 북한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지원하는 온건 성향의 지한파들까지 아연 긴장하고 말았다. 상호간의 암묵적인 책임감이 따를 수는 있으나, 이 문제를 가지고 공개적인 거래를 하겠다는 것은 현재 워싱턴이 떠안고 있는 이라크 문제와 이를 바라보는 워싱턴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한국 정부가 파병을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또 한 번의 앙금이 남을 것이다. 줄 거 다 주고도 생색 내기 어려운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p.8-9
미국 정당 연구의 전문가인 정치학자 섀트슈나이더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힘 있는 그룹은 항상 비공식적이며, 최대한 소수만이 정보를 독식하고 문제를 결정하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힘이 없는 측에서는 문제를 공개화 하고 지형을 넓힘으로써 힘 있는 그룹에 맞서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약자 측에서 문제의 공론화에 성공한다면, 이 두 그룹의 관계에서 열쇠를 쥐게 되는 그룹은 제3의 그룹, 즉 이를 바라보는 관중이라고 결론내린다. 약자와 강자 간의 갈등과 경쟁이 공개적으로 드러났을 때, 그에 대한 판정은 관중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지적이다. 섀트슈나이더의 이론을 다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필자는 그의 이론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미 관계에서 한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워싱턴 내에 우군을 만들고 지형을 넓혀 무엇보다 미국의 여론을 얻어야 한다. 그 여론을 얻기 위해서는 워싱턴의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
p.68
사실 미국 내 유대인들이 사회 각 분야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무엇보다 3%에 불과한 인구비에 비해 대단히 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정치권의 경우만 해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느 지역에서의 유대인 선출직 의원 비율은 인구비의 몇 배에 달한다. 한 예로 연방 상원의 유대계 비율은 10%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특히 사회의 반유대적 분위기나 반이스라엘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90년대 중반의 사건으로서 영화 [대부] 등으로 유명한 배우 말론 브란도가 할리우드를 유대인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발언을 한 후 48시간이 못 되어 눈물을 흘리며 사과 회견을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p.97
미국 외교의 마지막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그러나 워싱턴의 성경이라고 표현되는 미국 헌법 제1조는 대통령은 모든 외교 조약 체결이나 대사 임명 등의 사안에서 상원의 자문과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요컨대 상원은 행정부의 외교 정책 결정에 독주를 막을 수 있는, 헌법이 인정하는 유일한 기관인 것이다. 이에 따라 상원에서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인준하는 외교위원회 위원장은 대통령을 제외하고 미국 외교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가 된다. 실제로 행정부는 이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가에 따라 당초에 의도한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도 있고, 또는 양보와 타협을 통해 일부분만 관철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간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p.191
텍사스의 주지사는 다른 주지사들과는 역할이 다르다. 텍사스 주정부는 내각제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다. 사실상의 행정은 부주지사가 하게 되어 있고, 주지사는 외부 영접이나 상징적 업무에 치중한다. 일은 부주지사가 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민들도 주지사의 경험이나 능력에 대해 크게 고려하지 않는 편이다. 칼 로브의 주도로 아들 부시는 94년과 98년 두 차례의 주지사 선거에서 연속 당선되며 서서히 공화당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p.198
독서광으로 알려진 로브는 비소설 분야, 특히 정치, 역사와 관련해서는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라고 그와 얘기해 본 기자들은 전하고 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19세기 말 25대 대통령을 지낸 윌리엄 매킨리를 존경하고, 그와 그를 드러나지 않게 보좌했던 젊은 전략가 마크 한나의 관계를 부시와 자신의 모델로 삼는 듯한 인상을 풍긴 바가 있다. 역대 백악관의 가장 강력한 참모로 기록될 로브는 역사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대통령학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13일]에서 케빈 코스트너가 역을 맡았던 케네디의 참모 케니 오도넬 정도가 비견되지만, 그조차도 로브가 가지는 정치 정책 측면의 영향력에 비하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p.257~258
'오포'는 80년대 후반 이후 맹위를 발휘하고 있다. 1988년 부시의 대통령 선거는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지독한 네거티브 선거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캠페인 기획책임자였던 리 애트워터는 명문 대학 졸업생들로 구성된 '샌님팀(Nerds)'을 구성하고, 이들이 조사해서 보고하는 상대의 약점 공격을 중심으로 한 선거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92년 대선에서 클린턴이 대학 재학 중 당시 교관에게 보낸 징병 연기를 요청하는 편지가 공개된 것도, 클린턴과 내연의 관계였던 3류 가수가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도 모두 이러한 '오포'의 성과물이었다. 96년 선거에서 밥 돌이 클린턴의 사생활을 강하게 공격하지 못했던 것은 자기 역시 한때 외도를 한 적이 있고 클린턴 캠프에서 그에 대한 물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선거가 끝나고서야 알려졌다.
p.260
미국 정부나 관리가 공식적인 입장이나 신원을 밝히기 곤란한 경우에 익명을 요구하고 입장을 밝히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국내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정치에서도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런 방법이 흔히 사용된다. 한국의 97년 대선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익명을 요구한 고위 관리가 한국 정부에 실망을 표시했다고 보도한 일이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대선에서 절대 여당을 지지하고 있지 않음을 비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또 그 직후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 발언에 대해 다시 익명의 관리를 인용한 [월 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를 통해 그 발언에 우려를 표한 것은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경우 이 문제와 관련해 혹시 다른 생각을 갖지 않도록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공식적인 입장을 요구받거나 문의가 있게 되면, 대부분 부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p.265
보여지는 것. 그것이 TV의 힘이다. TV는 더 이상 그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매체가 아니다. TV가 그 사회의 문화를 주도하고 문화 자체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적으로 사고를 한다. 인쇄 매체도 더 이상 읽는 것에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신문도 점점 TV화 되고 이쓴 것이다. 그리고 TV 덕분에 국민들은 만나지 않고도 정치인들을 판단할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들이 국민들의 안방에 찾아와 이야기를 하고, 그 모습을 통해 국민들은 점수를 매긴다.
그러나 TV가 정보 전달이란 본연의 목적 이전에 오락용 매체라는 데 TV가 의존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비극이 존재한다. 정치인들은 점점 더 배우와 같은 연기 능력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정치인을 그의 다른 동료 정치인들과 비교하기보다는 케네디나 레이건, 클린턴과 같은 최고의 이미지를 선보였던 정치인들과 비교한다. 아니, 평범한 유권자들은 더 나아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정치인 역을 맡았던 마이클 더글러스, 찰리 쉰, 로버트 레드포드, 해리슨 포드 등을 잣대로 삼고, 그와 같은 수려한 용모에 감동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따뜻한 정치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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