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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헨리 키신저의 외교

by Diligejy 2023. 9. 16.

 

p.9

마치 어떤 자연법칙에 따르기라도 한 듯, 모든 세기마다 권력의 의지와 지적, 도덕적 추진력을 갖추고 국제체제 전체를 자신의 가치에 따라 형성하려는 국가가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17세기에는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이 이끄는 프랑스가 국민국가에 기반하면서 국가이익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근대적 접근법을 국제관계에 도입했다. 18세기에는 영국이 세력균형의 개념을 정교하게 발전시켰고, 이 개념은 이후 200년간 유럽외교를 지배했다. 19세기에는 메테르니히(Metternich)의 오스트리아가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를 재구축했고, 비스마르크(Bismarck)의 독일은 이 체제를 해체하면서 유럽외교를 권력정치라는 냉혈한 게임으로 바꾸어놓았다.

 

p.10~11

고립주의자와 선교사라는 두 가지 접근법은 일견 상당히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저에 있는 공통의 믿음을 반영했다. 즉, 미국의 정부 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다른 인류 전체가 전통적인 외교 방식을 포기하고 국제법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미국 방식을 따르면 평화와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p.11~12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정책에 관한 미국식 사고와 유럽식 외교 전통이 서로 마주쳤을 때, 서로의 역사적 경험이 상이하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유럽 지도자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기존 체제를 재단장하려고 했다. 미국의 평화 중재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복잡다단한 지정학적 갈등이 아니라 유럽의 잘못된 관행 때문에 발생했다고 믿었다. 우드로우 윌슨은 유명한 14개 조항(the Fourteen Points)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이제부터 국제체제는 세력균형이 아닌 민족자결주의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안보를 군사 동맹이 아닌 집단안보에 의지해야 하고, 더 이상 외교가 전문가들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지 말아야 하며, "공개적 합의, 합의 과정 공개"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명백히 윌슨은 종전에 관한 조건을 논의하거나 기존 국제질서를 회복하려고 회의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3세기에 걸쳐 실천되었던 국제관계의 전반적 체계를 개조하려고 참석했다.

 

미국인들이 외교정책에 대해 숙고하면 할수록, 그들은 유럽의 고난을 세력균형체제 탓으로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이 처음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심을 가졌어야만 했던 이래, 유럽의 지도자들은 세계 개혁이라는 미국이 스스로 부과한 임무에 대해 미심쩍어했다. 미국과 유럽은 마치 상대방이 그들의 외교활동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했으며, 만약 상대방이 더 현명하거나 덜 호전적이었다면, 더 수긍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미국과 유럽의 외교정책 스타일은 양쪽 다 그들이 처한 독특한 여건의 산물이었다. 미국인들은 두 거대한 대양에 의해 약탈적인 강대국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그리고 허약한 주변국들이 있는 거의 텅 빈 대륙에 거주했다. 미국은 견제할 필요가 있는 강대국과 마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균형상태가 도전받는 것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을 괴롭혔던 안보 딜레마는 거의 150년 동안 미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안보 딜레마에 직면하자,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촉발한 세계대전에 두 번 참전했다. 각각의 경우 미국이 참전했을 때는 이미 세력균형이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오히려 역설적인 결과가 생겼다. 즉, 대부분의 미국인이 혐오했던 세력균형이 실제로 계획되었던 대로만 작동했더라면 미국의 안보가 보장되었을 것이고, 세력균형이 붕괴했기 때문에 미국이 국제정치에 끌려 들어온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이 선천적으로 호전적이거나 음모를 좋아하는 구세계의 성향으로 인해 세력균형을 자신들 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국제법을 강조하는 태도가 미국만의 독특한 안보관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면, 유럽의 외교는 험난한 교육을 통해 다져진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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