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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프랑스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Diligejy 2023. 8. 20.

p.13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p.15~16

그녀의 입술에서 신열의 약간 텁텁한 냄새가 느껴졌고그는 마치 그녀 육체의 은밀함 속에 파묻히고 싶다는 듯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그녀가 오래전부터 그의 몸속에 있어왔고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불현듯 그녀가 죽고나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곁에 나란히 누워 함께 죽고 싶었다. 그는 이러한 상상에 잠겨 그녀의 얼굴에 뺨을 대고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체험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p.17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p.20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p.53

수천 톤이나 나가는 소련 탱크의 무게도 이 중압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ㄱ ㅗ통만큼 무겁지 않다.

 

p.55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선수다.

 

p.57-58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uders sein.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_'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p.72

어머니는 테레자에게 어머니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며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다. 아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테레자는 삶의 최고 가치는 모성애이고 모성애란 큰 희생이라고 믿었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p.78

테레자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호가인한느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토마스 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의 도피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지었다.

 

p.80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p.81

필연과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p.84-85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시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토마시 대신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토벤과 푸줏간 주인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지만.)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p.85-86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p.98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p.113

그녀의 많은 사진은 각종 외국 신문에 실렸다. 탱크, 위협적인 주먹, 파괴된 건물, 피 묻은 삼색기에 덮인 시체들, 긴 장대에 체코 기를 달아 흔들며 오토바이로 탱크 주위를 빠르게 맴도는 젊은이들, 성적으로 굶주린 불쌍한 소련 군인 눈앞에서 행인에게 키스를 퍼붓는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차림 소녀들의 사진이 실렸다. 거듭 말하지만 소련군의 침공은 비극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도 그 이상한 도취감을 이해하지 못할 증오의 축제이기도 했다.

 

p.125

강해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해졌을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약자다.

 

p.135-136

정부 앞에서 이토록 자신감이 결핍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겐 자기 자신을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들이 만난 직후 처음 호감을 드러낸 살마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그는 미남이며 학계에서도 출세가도의 정상에 서 있어서 심지어 전문 학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고차원 지식과 자기주장은 동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매일 되풀이해야만 할까?

 

나에게는 이 설명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공적인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그 대척점이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프란츠의 사랑이란 언제 공격이 올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p.143~14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p.149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 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p.161

보헤미아를 떠난 지 일이 년 뒤, 소련 침공 일주년이 되는 날 그녀는 우연히 파리에 있었다. 그 날 항의 시위가 있었고, 그녀는 그 시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프랑스인들이 주먹을 치켜들고 소련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외쳤다. 그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으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입을 맞추어 구호를 외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놀랐다. 그녀는 시위 대열 속에 단 몇 분 밖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체험을 프랑스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점령당한 너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야?"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p.162-163

사바나가 말했다. "비의도적인 아름다움. 물론 그래.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실수에 의한 아름다움이라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아름다움이 잠깐이나마 존재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실수 때문이지. 실수에 의한 아름다움이란 미의 역사에서 마지막 단계야."

 

p.188-189

그 순간, 그는 불현듯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사비나라는 육체의 존재가 그가 믿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 그 누구도 그로부터 앗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그의 손에 헤라클레스의 빗자루를 쥐어주었으며 그는 그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의 삶으로부터 쓸어 내 버렸다. 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이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편안함, 이 희열,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https://youtu.be/u35L4o4lj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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