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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안티프래질

by Diligejy 2023. 9. 24.

 

 

p.13

바람은 촛불 하나는 꺼뜨리지만 모닥불은 살린다. 

 

무작위성, 불확실성, 카오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당신이 이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활용하기를 원한다. 불이 되어 바람을 맞이하라. 지금 하는 말은 무작위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필자의 반항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다루면서 겨우 살아남기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로마 시대의 공격적인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불확실성에서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려고 한다. 우리의 임무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불투명하고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길들이고, 심지어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p.18

역사상 어떤 순간에도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사람들, 즉 개인적으로 리스크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커다란 권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이제 중요한 윤리 원칙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프래질하게 만드는 대가로 자신이 안티프래질해져서는 안 된다.

 

p.19

블랙 스완 현상은 우리의 두뇌를 강탈해 자신이 이런 현상을 거의 예측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사후에는 블랙 스완 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측 가능성에 대한 환상 때문에 인생에서 블랙 스완 현상의 역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인생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의 두뇌는 역사를 매끄러운 선형의 것으로 바꾸려는 작업을 한다. 이런 작업은 무작위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무작위적인 현상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이에 대해 과잉반응한다. 이런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갈망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논리는 차단된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은 블랙 스완 현상이 주는 피해에 노출되고, 이로부터 결코 혜택을 얻어내지 못한다. 질서를 추구하면 가짜 질서를 얻게 된다. 그러나 무작위성을 수용하면 질서를 얻고 동시에 이를 지배할 수 있다.

 

p.22

프래질은 측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리스크는 그렇지 않다. 특히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의 위험성은 더욱 측정이 불가능하다. 

 

나는 아무리 정교한 계산 방법을 가지고 있어도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나 충격의 위험과 확률을 계산할 수는 없지만,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은 추정하고 심지어 측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험 관리 기법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사건을 연구하는 분야다. 그리고 일부 경제학자들과 정신병자들은 이처럼 미래에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의 발생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남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그들의 실적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p.34

근대는 윤리를 법률로 대체했다. 그리고 이런 법률은 노련한 법조인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타나는 프래질의 이전, 즉 안티프래질을 훔쳐가는 행위를 들추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실명으로 거론할 것이다. 시인과 화가는 자유로운 삶을 산다. 그리고 자유에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가 따른다. 이런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내가 제시하는 첫 번째 윤리 원칙은 다음과 같다.

 

사기꾼을 보고 사기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사기꾼이다.

 

오만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과, 친절한 사람에게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같듯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런 행동을 묵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p.35

타협은 묵인과 같은 의미다. 내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근대 명언은 조지 산타야나가 했던 말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실함을 가지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자유롭다." 이것은 목표일 뿐만 아니라 의무가 되어야 한다.

 

p.38

강건함 혹은 회복력은 가변성이나 무질서에 의해 피해를 보거나 이익을 얻도록 해주지 않는다. 반면에 안티프래질은 이런 것들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몸에 배도록 하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강건하다거나 회복력이 있다고 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은 단지 강건하거나 회복력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절반이 안티프래질하다.

 

p.44

안티프래질하려면, 실수를 싫어하는 상황의 오른편에 있는, 즉 실수를 좋아하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해가 작은 실수를 여러 번 저지르는 것이 유리하다. 우리는 이런 과정과 접근방식을 '바벨'전략이라고 부를 것이다.

 

'건강'과 관련된 범주를 살펴보자.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것은 왼쪽에 있고 제거하는 것은 오른쪽에 있다. 경험적으로 보면 약, 글루텐, 과당, 신경안정제, 매니큐어처럼 자연스럽지 못한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약을 복용하는 것보다 더욱 강건하다. 약을 복용하면, 효능이랍시고 주장하는 진술에도 불구하고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p.46-50

 

 

p.56~58

그리스 신화에는 레르나(Lerna) 호수에 사는 뱀처럼 생긴 생명체, 히드라가 등장한다. 히드라는 머리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데, 머리 하나를 자를 때마다 두 개가 다시 생긴다. 따라서 히드라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기를 원한다. 결국 히드라는 안티프래질을 상징하는 셈이다.

 

다모클레스의 칼은 권력과 성공에 따르는 부작용을 상징한다. 위험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권력을 얻을 수 없다. 당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누군가가 항상 있다. 위험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고요하면서도 냉혹하고 불연속적으로 다가온다. 다모클레스의 칼은 오랫동안 고요하게 매달려 있다가 사람들이 익숙해지거나 그 존재를 잊어버릴 때 갑자기 떨어질 것이다. 블랙 스완은 당신이 잃어버릴 것(성공이나 성장에 따르는 희생)이 더 많아지면서 다가올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도한 성공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의미한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화려한 잔치에 내포되어 있는 부와 권력이 아니라 말총이 얼마만큼 강건한가에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취약성을 식별하고 측정할 수 있으며, 다룰 수도 있다. 여기 나오는 트라이애드가 전하는 요점은 많은 경우 말총이 얼마만큼 강건한가를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붕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성공이 사회에 어느 정도로 해를 끼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천장에 매달린 칼이 다모클레스를 향해 떨어졌을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수적인 피해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규모 기관의 붕괴는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정교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붕괴에 더욱 취약해진다. 이렇듯이 정교하게 변해가는 세상은 블랙 스완에 프래질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생각은 고고학자 조지프 테인터에 의해 우리에게 가깝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그렇다. 성공이 주는 피해를 예방하려면,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 높은 수준의 강건함, 나아가 높은 수준의 안티프래질을 갖추면 된다. 우리는 불사조, 더 나아가 히드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모클레스의 칼끝이 우리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p.68~69

곤경에 과잉반응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바로 혁신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 메시지는 보기보다 아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수준의 혁신과 진보에 관한 현대적인 방법이나 생각과는 상충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혁신이 정부의 자금 지원과 계획을 통하거나 혹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유명 교수(그는 무엇인가를 혁신시켜주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의 강의를 듣는 데서, 또는 컨설턴트(그 역시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혁신시켜주는 사람이 아니다)를 고용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산업혁명에서부터 실리콘 밸리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교육받지 않은 기술자와 기업가들이 기술 진보를 위해 엄청나게 공헌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내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눈에 보이는 상반되는 증거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지혜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생각을 수용하기보다 편안하고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혁신을 추구하려고 한다. 

 

p.75~76

나는 이런 정신적 겨려함을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가 보았던 가장 높은 산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던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이름을 따서 '루크레티우스 문제'라고 불렀다. 어떤 종류가 되었든, 사람은 이미 보았거나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을 존재 가능한 가장 큰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판단을 오랫동안 해왔다. 관료들이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하향식으로 통치했던 민족국가인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수위가 가장 높았을 때를 표시하고는 이를 미래에 발생하게 될 최악의 시나리오로 추정헀다.

 

2011년 해일이 몰려왔을 때 발생했던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마찬가지다. 후쿠시마 원자로는 과거에 발생했던 최악의 지진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지만,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재앙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에 발생했던 최악의 사건은 예기치 않게 일어났던 전례에도 없던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연방준비은행의 총재를 지냈던 '프래질리스타' 앨런 그린스펀은 의회에 출석해 "이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는 유명한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린스펀과 달리, 자여녀은 더 나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과거에 발생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비한다.

 

인간이 마지막 전쟁을 치렀다면, 자연은 그 다음에 있을 전쟁을 준비한다. 우리 몸은 미래를 대비해 이성보다 더욱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 

 

p.79

생물학에서 박테리아의 저항을 이해한 사람은 세네카의 저서 [디 클레멘시아]에서 나오는 처벌의 역효과에 관한 다음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네카는 "나뭇가지를 쳐내면 수많은 나뭇가지가 자라나듯이, 처벌을 반복하다 보면 몇몇 사람의 증오감은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의 증오감은 더욱 증폭된다"고 말했다. 혁명은 압제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하더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온다. 아일랜드 혁명가의 가사는 이런 현상을 잘 요약해준다.

 

바리케이트가 높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어느 순간, 분노에 찬 군중들은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을 받아 순교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운동이나 반란은 높은 수준의 안티프래질을 갖는다. 따라서 헤라클레스가 히드라를 물리친 것과 마찬가지로 반란 세력을 교묘히 다루면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더욱 기민한 책략을 모색하지 않고서, 무턱대고 힘으로 진압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p.81

고통스러운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떤 생각은 안티프래질적 성격이 너무나 강해서 이로부터 빠져나오거나 강박 관념으로 여기면서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할수록 이런 생각을 오히려 더욱 키우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생각을 통제하는 과정에 내재된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당신이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할수록, 생각은 당신을 통제하게 된다.

 

p.81

정보는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지닌다. 정보는 알리려고 할 때보다 덮으려 할수록 널리 전파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어하려 할수록 오히려 명예를 실추시킨다.

 

교활한 베네치아인들은 비밀인 것처럼 위장하면서 그 정보를 널리 전파하려고 했다. 소문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라. 누군가에게 비밀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해보라. 비밀이라고 하면 더욱 널리 전파된다.

 

p.84

나의 증조부 니콜라스 고슨께서는 정적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던 아주 영리한 정치인이었다(그에게 최대의 적은 나에게는 집안의 고조부뻘 되는 사람이었다). 그의 장남이셨던 나의 할아버지도 정치인의 길을 가셨는데, 증조부께서는 운명하실 때 할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아들아, 나는 네게 무척 실망했다. 나는 너를 두고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너는 질투심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p.86-87

이제 내가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어떤 기업의 중간관리자라고 가정해보자. 항상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어야 하고, 간편한 복장을 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프래질리스타를 비난하면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이런 이력은 영원히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것이다. 나는 정보가 갖는 안티프래질적 특성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거의 최저임금을 받는 건설 노동자, 혹은 택시 운전기사는 평판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롭다. 이런 사람들은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가진 예술가와 비교할 때 단순히 강건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담당하는 중간 간부들은 평판에 매우 취약하다. 사실 그들은 해마다 바베이도스에서 휴가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가치 체계에 사로잡힐 수 있다.

 

워싱턴의 공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다시 말해 강건한가를 확인하려면 이처럼 간단한 경험의 법칙을 활용하라. 몇 안 되는 예외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복장을 하는 사람들은 평판에 대해 강건하거나 심지어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갖는다. 면도를 깔끔하게 하고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람은 자신에 관한 정보에 취약하다.

 

대기업과 정부는 정보가 반발력과 정보를 통제하려는 사람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기업이나 빚에 허덕이는 정부가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들이 취약하며 운이 다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정보는 무자비하다. 투자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기자회견을 개최하면, 투자자들은 달아나고 죽음의 악순환을 일으키면서 결국 뱅크런 사태까지 초래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재정 보수주의를 확고하게 신봉하는 나는 정부의 빚에 대해 강박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 빚이 없다면, 당신은 경제학계에서 자신에 대한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평판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때에만, 좋은 평판을 얻는 경향이 있다. 유혹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별로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훨씬 더 많은 영역에서 정보가 갖는 이런 안티프래질적 특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만약 내가 조상 환경에서 라이벌을 두들겨 팬다면, 부상을 입히거나 영원히 제거시킬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약간의 운동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마피아에게 그를 제거해줄 것을 의뢰하면, 그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웹사이트나 저널을 통해 그를 공격하면, 나는 그를 돕고 나 자신에게는 해를 입히는 꼴이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에게 혜택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은 조언해주고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해치려고 했던(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상당히 착잡하게 한다.

 

p.90

어쨌든 노화에서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부적응과 노쇠의 조화인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있다. 노쇠는 피할 수 없으며 피해지지도 않지만, 부적응은 피할 수 있다. 노화의 상당 부분은 편안함이 주는 효과(현대 문명의 질병)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 수명이 점점 늘어나면서 아픈 사람들도 점점 많아진다. 자연 환경에서 사람들은 노화 현상을 겪지 않고 죽거나, 노화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의 혈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악화되지만,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혈압은 죽을 때까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인위적인 노화는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억압하는 데서 비롯된다.

 

p.92

복잡한 세상에서 '원인'이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가 수수께끼다.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실제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이는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원인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신문을 무시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p.95

안티프래질적 특징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스트레스의 빈도가 어느 정도 중요하다. 인간은 만성보다 급성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급성의 경우 회복을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때 스트레스 요인이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키보드에서 뱀이 나오거나 흡혈귀가 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 뒤에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 동안 바로크 음악과 함께 카밀레 차를 마시는 것은 건강에 좋다. 물론 뱀 혹은 흡혈귀에 맞서 영웅처럼 격렬하게 싸움을 해서 그것들을 제압하고 시체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런 스트레스는 사장의 잔소리, 주택담보대출, 세금 문제, 소득신고서 작성, 시험, 집안일, 이메일 답장, 각종 서류 작성, 출근처럼 삶을 구속하는 부드럽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보다는 확실히 더 낫다. 다시 말해서, 현대 문명이 주는 압박보다는 더 낫다는 말이다. 실제로 신경생물학자들은 첫 번째 형태의 스트레스는 건강을 위해 필요하지만, 두 번째 형태는 해롭다고 말한다. 회복되지 않은 낮은 단계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해로운가를 알기 위해서 중국에서 벌어지는 물고문을 생각해보자. 머리 위의 같은 곳에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고문 받은 사람이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든다.

 

사실 헤라클레스는 머리의 절단 부위를 불로 태우는 방법을 써서 히드라를 제압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머리가 다시 생겨나지 않도록 했는데, 달리 표현하자면 안티프래질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히드라가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p.115

우리는 프래질, 실패, 안티프래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당신이 프래질하면, 정밀하게 계획된 프로세스에서 최대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탈은 도움이 되기보다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프래질은 예측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역으로 말해, 예측 가능한 시스템은 프래질을 초래한다. 만약 이탈을 원한다면, 당신은 미래에 발생 가능한 결과의 분포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결과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안티프래질한 사람이다.

 

착오를 정보로 인식해 합리적으로 처리한다면, 시행착오 속의 무작위적인 요소가 그렇게 무작위적이지는 않다. 모든 시행이 효과가 없는 정보만 제공한다면, 오히려 해법에만 집중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시도는 가치가 있고 실패보다 비용에 가깝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발견한다.

 

p.118-119

가변성은 실패와 적응을 낳고 누가 당신의 친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인생에서 바람직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간혹 당신 자신의 잘못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나서야 그 살마의 성격을 알게 될 때도 있다(나는 내 잘못을 용서해주는 사람들의 관대함에 놀라움을 느낄 때가 더러 있었다).

 

물론 타인의 잘못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지를 만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의 한 학급 친구가 떠오르는데, 그녀는 참한 느낌의 소녀로 반물질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내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그리고 순수한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마더 테레사나 로자 룩셈부르그와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부자였던 첫 번째 남편이 처음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자, 그를 버리고 돈이 더 많고 권력이 있는 남자에게 갔다. 환경이 변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를 이상주의자나 성녀로 착각했을 것이다.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귀중한 정보를 얻었지만, 다른 구성원(그녀에게 버림받은 남편)은 대가를 치렀다. 

 

나는 실패를 한 후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그 이유를 찾기보다, 자기 반성을 하지 않고 실패를 활용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당혹스럽고 방어적인 자세만 취하는 사람을 패배자로 규정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나쁜 상사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인다. 실패를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에 비해 믿음이 더 간다. 또 실패(똑같은 실패는 아니다)를 여러 번 겪어본 사람은 실패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믿음이 간다.

 

p.120-121

문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기업가들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비즈니스 강좌를 듣는다. 그러나 전체 경제는 그들이 살아남지 못하기를 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승산이 있다는 믿음에 눈이 멀고 위험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기를 원한다. 각각의 산업은 수많은 실패로부터 발전한다. 자연과 자연 비슷한 시스템은 개별 경제 주체의 자기 과신을 원한다. 자신의 실패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서,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실패의 위험을 지나치게 낮게 보는 자기 과신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전체적이 아닌 국지적인 자기 과신을 원한다. 

 

레스토랑 주인들은 자신은 파산하지 않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레스토랑이 파산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성업 중인 레스토랑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리스크를 성급하게 수용하는 것이 자신의 파멸을 부르기도 하지만, 경제 전체로 봐서는 바람직한 것이다. 모두가 같은 리스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리스크가 작고 국지적인 상황에서는 말이다.

 

정부는 이런 모델을 붕괴시키면서 대기업에게 구제금융이라는 혜택을 제공한다. 다른 기업에 미치는 전염성을 막기 위해 대기업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구제금융은 리스크 수용의 건전성(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기업으로 프래질을 이전하는 것)에 역행하는 행위다. 사람들은 구제금융이 어느 누구도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마저 몰락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지속적인 실패만이 시스템을 보존해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대부분의 정부 개입과 사회 정책은 약한 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기존 세력을 강화시켜준다.

 

p.132-133

장인, 택시 운전기사, 매춘부(대단히 오래된 직업이다), 목수, 배관공, 재단사, 치과의사는 소득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소득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크지 않은 블랙 스완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위험 요소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안정적인 회사원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인사팀이 주는 전화 한 통에 소득이 제로가 되는 끔찍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 회사원에게는 위험이 숨어 있다.

 

기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무작위성 덕분에 일정 수준의 안티프래질을 가지고 있다. 작은 변화는 그들에게 적응을 요구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배워서 끊임없이 변화하라고 압박한다. 스트레스는 정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적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선물을 받거나 놀랄 만큼 좋은 소식을 듣거나, 공짜 옵션을 가질 기회도 생긴다. 조지는 가끔 엄청난 요구를 받는다. 물론 거절할 자유도 얼마든지 있다.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로 영국 항공사가 운항을 중단했을 때, 결혼식에 참여해야 하는 어떤 돈 많은 여자 손님이 프랑스 남부까지 태워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었다. 왕복 2000마일이나 되는 멋진 여행이었다. 마찬가지로, 가능성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매춘부 역시 자기한테 홀딱 반해서 비싼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고객을 만날 수도 있고, 심지어 청혼을 받을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녀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고용주인 조지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할 자유가 있다. 실제로 많은 택시 운전기사들이 80살이 넘어서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하지만 50세가 넘어서는 취업이 거의 불가능한 존은 그렇지 못하다.

 

p.140-141

지역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규모가 크고 추상적인 공공 지출을 다루는 방식과 크게 다르다. 과거에 우리는 규모가 작은 씨족 사회에 살면서 그런대로 잘 처리해왔다.

 

게다가 생물학적 반응은 규모가 큰 시스템보다 자치 환경에서 더 잘 나타난다. 공직자들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 과도하게 예산을 지출하거나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더라도 생물학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동료와의 눈 맞춤은 서로의 행동을 변화시키지만,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들에게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고, 더 많은 책임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작은 지역 단위에서는 수치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단위가 커지면, 다른 사람들은 추상적인 항목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람들과 사회적 정서적 소통이 별로 없는 공직자들의 뇌 구조는 감정보다 숫자, 도표, 통계, 이론에만 매몰되기 쉽다.

 

나의 동료 마크 블라이으세엑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면, 그는 '스탈린은 지방자치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을 불쑥 내뱉는다.

 

작은 것이 여러 모로 아름답다. 작은 것(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전체가 된다)이 큰 것보다 더욱 안티프래질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실제로 큰 것은 부서지게 되어 있단느 말은 슬프게도 대기업, 덩치가 큰 포유동물이나 행정기관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국가의 추상적인 측면과 관련해 또 다른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 인간은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마음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은 수천 명의 죽음보다 옆에서 우는 한 명의 아이에게 더 쉽게 흔들린다. 하나는 통계에 불과하지만, 다른 하나는 비극이다. 인간의 감성 에너지는 그럴듯한 사건을 맞이해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미디어는 자극적인 사건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우리의 감성 에너지를 이용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리고는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매 7초마다 한 명이 당뇨병으로 죽어간다. 그러나 뉴스는 허리케인으로 집이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만 다룬다.

 

문제는 우리가 관료주의를 만들어 놓고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의사결정을 하는 공직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일할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 데 있다.

 

p.144

당신의 칼로리 흡수량은 평범의 왕국에서의 변화다. 1년 동안의 칼로리 소모량을 늘리려 해도 하루 만에 큰 성과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1년 동안의 칼로리 소모량이 80만 칼로리일 때, 하루의 칼로리 소모량인 5000칼로리는 전체에서 0.5%를 조금 넘는다. 따라서 예외적이고 아주 드문 사건이 전체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하지 못한다. 하루 만에 체중을 두 배로 늘릴 수도 없다. 한 달 혹은 1년을 주더라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재산을 한순간에 두 배로 늘리거나 절반을 날려버릴 수는 있따. 

 

이와 대조적으로 소설 판매부수를 보면, 상위 0.1%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아마 전체 이윤으로 보면 90% 정도를 차지할 것이다). 따라서 출판 시장에서는 0.1%에 해당하는 예외가 전체를 지배한다. 마찬가지로 역사가 불연속적으로 움직이면서 점프를 하여 다른 상태로 바뀌듯이, 경제와 금융 현상도 극단의 왕국에서 벌어진다.

 

p.152-153

고대 이집트 왕조는 국가를 제국처럼 통치하지 않고 통합된 국가처럼 통치했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이런 통치 형태는 크게 다른 유형의 가변성을 낳게 된다. 국민국가는 중앙집권적인 관료들에게 의존한다. 반면 로마 제국이나 오트만 제국과 같은 제국은 지역 엘리트에게 의존하므로 실제로는 도시국가가 번성하고 자치권을 보장해주게 된다. 이런 자치권이 군사 부문이 아니라 상업 부문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된다. 실제로 오토만 제국에서는 신하와 영주가 군사적인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런 관계는 군사적인 유혹을 제거하고 모두가 번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이런 시스템은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부당하게 여겨지는지와는 상관없이, 지역 엘리트들이 전쟁보다 상업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바로 데이비드 흄이 자신의 저서 [영국사]에서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전쟁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소규모 국가를 선호하면서 제기한 주장이다. 

 

로마 제국이나 오토만 제국이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역 엘리트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편의상 그렇게 했을 뿐이다. 제국과 자치권을 갖는 지역 간의 결합은 별개의 국민국가와 국경을 가진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보다 더 많은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국가들이 이집트와 중국처럼 중앙집권적 통치 형태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로마 제국이나 오토만 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자들과 관료들이 중앙에 집중되어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당시에는 인터넷 송금 혹은 계좌 송금을 감시하는 방식으로 조세 징수를 감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신, 철도, 전화와 같은 근대의 통신 네트워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국가는 칙서 송달관에게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지역의 통치자들이 국왕처럼 행동하면서 많은 문제를 처리했다. 중앙집권적 국가의 경우 최근까지도 경제 전체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5% 정도였다 (지금 유럽 국가에서는 이런 수치가 거의 10배에 달한다). 그리고 정부는 전쟁 문제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경제 문제는 기업가들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p.155

어떤 살마은 칠면조처럼 순진하게 세상은 점점 더 안전해지고 있으며, 신성한 국가가 이런 안전을 책임져준다고 믿는다. 지구상에서 폭력 사건이 가장 덜 발생하는 국가가 상향식 시스템을 지닌 스위스인데도 말이다. 이런 믿음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경우의 수가 적기 때문에 핵무기가 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폭력 사건의 발생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전쟁은 훨씬 더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미국이 소련을 향해 핵무기를 막 발사하려던 참이었던 1960년대에 최악의 재앙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었다. 극단의 왕국에서 리스크를 생각할 때는 증거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증거는 너무 늦게 나온다), 잠재적인 피해를 생각해야 한다. 세상은 더 큰 피해가 발생할 만한 단서를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데이터를 신봉하는 살마들에게 리스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설득하기가 어렵다.

 

p.155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요소를 적절하게 조정해) 데이터를 더욱 엄밀하게 살펴보면, 어떤 전쟁은 세계 인구의 10%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주장이 통계적으로 완벽하게 타당하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결코 '아웃라이어'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벤 버냉키는 자신이 말한 대안정기라는 표현에 스스로 칠면조가 되어 속아 넘어갔다. 위에서 가변성을 억누를 때, 사람들은 이처럼 가변성이 축소된 프로세스의 특징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스티븐 핑커와 같은 사람은 통계적 프로세스의 성질을 오해하고는 재무학에서의 '대안정기'와 비슷한 논문을 썼다.

 

p.164-165

고대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무작위적인 제비뽑기를 해서 그것을 신의 계시로 생각했다. 제비뽑기는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지 않고 출구를 무작위적으로 선택하게 해준다. 따라서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신이 결정해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나중에 결과를 알고 난 후 후회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베르길리우스의 점'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아무렇게나 펼쳐서 거기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까다로운 결정을 할 때는 이런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목이 쉴 때까지 다음과 같이 반복할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무작위성을 활용하기 위해 신비하고도 세련된 방법을 개발했다고 말이다. 실제로 나는 경험을 통해 레스토랑에서 이런 무작위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레스토랑에서 길고 복잡한 메뉴가 주어지고, 선택을 하고 나서는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는, 다시 말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선택의 횡포를 경험한다. 이럴 때 나는 일행 중 가장 뚱뚱한 남자의 선택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바알신이 나를 위해 선택해 준 셈 치고, 메뉴를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위적으로 골라버린다.

 

p.168-169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미국의 동맹은 확실히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안정을 의미하는가? 그 안정은 시스템을 '얼마나 오랫동안' 억누를 것인가? 실제로 '얼마나 오랫동안'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안정은 결국 갚아야 하는 대출금과도 같다. 24장에서 윤리 문제를 다루면서, 도덕적으로 확고한 원칙을 위반하기 위해 '무엇을 위해서'라는 정당성을 갖게 해주는 결의론에 관해 설명할 것이다. 한편, 미국을 향한 이란인들의 반감은 자국 국민들을 탄압하고, 미국에게 페르시아 만에 '안정적'으로 접근할 권한을 부여헀던 이란 국왕을 민주국가 미국이 후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늘날 이란의 신정주의 정권은 주로 이런 압제에서 나온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날 부작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특히 2001년 9.11사태 이후로 미국의 대중동 정책이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거의 모든 정권이 사용했던 정치적 수사다)을 걸고 어떤 정치적 변화라도 진압해야 한다는 원칙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를 제거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서구 세력과 아랍의 독재국가 동맹국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탄압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강화시켜왔다. 

 

이제 미국의 정책 담당자들이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국가에 개입할수록,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궁극적으로는 불안정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시점이 왔다. 또 정책 문제에서 정책 담당자의 역할을 축소시켜야 할 시점이 왔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변성 없이는 안정도 없다.

 

p.169~170

나는 근대라는 말을 인간이 환경을 지배하고 울퉁불퉁한 것을 부드럽게 하여 가변성과 스트레스를 체계적으로 제거한 것으로 정의한다.

 

근대는 무작위성이 내재된 생태계로부터 인간을 신체적 사회적 심지어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추출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는 사회학 교과서에서 정의하는 중세 이후, 농경 이후, 봉건 이후의 역사적 기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화(어설픈 합리주의)로 특징 지어지는 시대 정신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설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와 함께 통계학이 등장하면서 종 모양을 한 고약한 곡선도 나왔따. 또 선형을 지향하고 효율성과 최적화를 추구하는 과학도 등장했다.

 

근대는 효율적이고 유용해 보이는 것에 대해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의 길이를 축소시켜야 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다. 일부 유용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항상 부정적인 축소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로운 결과도 가져다 준다.

 

p.187

무엇을 통제해야 하는가? 대체로 규모(기업, 공항, 공해의 규모), 집중, 속도를 제한하기 위한 개입은 블랙 스완 현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개입에는 의원성 질환이 따르지 않지만, 정부의 크기를 줄이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이후로 고속도로의 속도 제한으로 안전이 크게 증진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사고의 리스크는 속도에 불균등하게 증가하며(즉 비선형 관계), 인간은 원래 그런 직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 주장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p.188-189

개입에 관한 나의 입장은 이렇다. 시스템에 개입해야 하는 경우와 내버려둬야 하는 경우를 결정하기 위해 체계적인 프로토콜을 확립해야 한다. 근대가 낳은 의원성 질환에 맞서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개입해야 한다. 특히 이 질환에는 환경이 대규모로 파괴되는 현상과 (아직은 그 피해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잠재적 피해가 집중되는 현상이 있다. 개입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이 생각은 정치적 입장이 아닌 리스크 관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나는 특정 정당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정당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p.191

라틴어 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로마인들만 자발적 태만을 존중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노자는 수동적 성취의 의미를 담고 있는 '무위'의 정신을 설파했다.

 

꾸물거림이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보살피도록 내버려두면서 자신의 안티프래질을 행사하도록 하는 자연적인 방어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꾸물거림은 생태학적 혹은 자연주의적 지혜로서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p.197

국가 원수나 부자들이 주치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쉽게 죽는 것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가? 그것은 약을 지나치게 많이 복용했거나 건강 관리를 지나치게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데이터 수집 부서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제때에 공급받는 경영자나 (프레질리스타 그린스펀과 같은) 정책 담당자들도 과잉반응하거나 잡음을 정보로 잘못 인식할 가능성이 많다. 그린스펀은 경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 클리블랜드의 진공청소기 판매추이까지 꾸준히 챙기려고 했으며, 이렇게 섬세한 점까지 관리한 덕분에 우리를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기업과 경제 부문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데이터에 의존하다 보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오늘날의 데이터는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그 양이 방대하다. 또 데이터를 모으는 데 열을 올리다 보면 잘못된 데이터를 얻게 될 가능성도 높다. 사람들이 데이터에 관해 잘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따. 바로 데이터는 양이 많을 때 유해하며, 심지어 적당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p.200

언론이 사건과 리스크를 이해하는 수준은 너무나 사후적이라서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 보안 검사를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전투가 끝난 뒤에 군대 보내기'에 비유할 수도 있다. 영역 의존성 때문에,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훨씬 더 프래질한 세상에 살면서, 이런 세계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정보의 공급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한하는 것이 개입을 완화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이런 방법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데이터를 많이 확보할수록 상황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고, 의원성 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과학은 더 많은 데이터를 의미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p.206-207

강요된 시스템이 자연적인 무질서를 몹시 갈망하다가 결국 프래질해질 수밖에 없어서 붕괴되었을 때, 그 실패의 원인을 시스템의 프래질로 간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실패를 잘못된 예측의 결과로 생각한다. 모래성이 무너질 때와 마찬가지로, 프래질한 교량의 붕괴를 마지막으로 건넌 트럭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리고 어떤 트럭이 교량을 붕괴시킬 것인지 미리 예측하는 것은 훨씬 더 멍청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경우를 너무 자주 본다.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 해 봄에 일어났던 이집트 혁명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며 정보 실패라고 비난했다. 과거 지미 카터 대통령도 1979년 이란의 회교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던 정보기관에 책임을 추궁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마지막 모래 알갱이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확률 분포에서 꼬리에 해당하는 숨은 리스크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경제 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07~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서브프라임 붕괴를 예측했으면 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들은 서브프랑미 붕괴가 금융위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서브프라임 붕괴는 금융위기의 증상이지, 바탕에 깔려 있는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예측한다고 해서 금융위기를 막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바마 대통령이 꾸짖었던 정보 실패도 복잡계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정책 실패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강대국들도 평범한 칠면조에 불과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은 국지적인 인과 연쇄(causal chain)에 대한 환상을 설명해준다. 즉 촉매를 원인으로 잘못 생각하고, 어떤 촉매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집트 혁명의 마지막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CIA 혹은 다른 정보기관을 탓하는 것은 사건을 예측하는 데 자금을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현명하지 못하다.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상호의존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개별적인 수준에서는 통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을 예측하기 위해 수십 억 달러를 허비한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의 소용돌이를 설명하면서 촉매를 원인으로 잘못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2011년 '아랍의 봄'을 생각해보자. 처음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발생한 시위의 원인은 독재자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물가 상승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레인과 리비아는 곡물을 비롯해 다른 상품을 수입할 여력이 되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다. 더구나 다른 나라에서는 몇 년 동안 물가가 높아도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논리는 위로가 될지 몰라도 초점은 엉뚱한 곳을 향했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프래질한 측면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침투 이론 percolation theory'에서는 지형의 무작위성이 갖는 특징이 연구대상이지, 지형의 한 가지 요소가 갖는 특징이 연구대상은 아니다.

 

p.213

쓰나미, 아랍의 봄, 지진, 전쟁, 금융위기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을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탓하지 말고 안티프래질 혹은 프래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을 탓해야 한다. 즉 '왜 프래질해져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도록 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쓰나미나 경제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쓰나미나 경제위기에 프래질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역사에 어두운 어설픈 형태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탐욕을 포함하여 사회를 프래질하게 만드는 인간의 결점을 합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만성적 위장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과 같은 훨씬 더 위험한 도학자다. 하지만 더욱 현명하고 실용적인 방법은 탐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상, 더 바람직하게는 탐욕을 비롯한 인간의 결점으로부터 혜택을 얻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p.226

말보다 행동을 강조하는 데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외부 세계에서 인정받는 데 대해 건강을 잃을 정도로 신경 쓰는 성향이 있다. 또 말로 평가할 때는 잔혹하고 부당하다. 따라서 그런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당당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p.230

당신은 일반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예측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더 많은 리스크와 문제를 갖고, 어쩌면 파산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는 있다. 왜 그럴까? 예측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예측에 프래질하기 때문이다. 조종사의 지나친 자기 과신은 결국 대형 사고를 일으킨다. 그리고 숫자로 보여주는 예측 결과는 사람들을 더 많은 리스크로 내몬다.

 

토니는 자신의 프래질한 먹잇감의 반대 이미지를 선택했기 때문에 안티프래질하다.

 

토니의 모델은 지극히 간단하다. 먼저 프레질한 대상을 확인한다. 프레질한 대상의 붕괴에 내기를 걸고, 네로에게 한 수 지도하면서, 뉴저지 생활에 대한 네로의 공격에 반격을 가하고, 붕괴 이후에 큰 돈을 번다. 그리고 점심을 먹는다.

 

p.236-239

성공은 비대칭성을 야기한다. 당신은 이제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훨씬 더 많다. 따라서 프래질하다. 다모클레스의 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좋은 소식은 없고 나쁜 소식들만 대기 중이다. 부자가 되는 순간, 재산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재산을 늘렸을 때의 기쁨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부자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혈당이 증가하고, 유머 감각은 줄어들고, 머리카락은 코끝까지 내려오는 등 다양한 형태의 고통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재산으로 인해 궁지에 빠진다. 세네카는 재산이 우리에게 하강국면을 걱정하게 만들면서 우리가 의존할수록 형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심지어 상황(정확하게 말해서, 상황에서 비롯되는 심적 상태)에 의존하면서 일종의 노예 상태로 만든다.

 

고대 사람들은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 이익과 손실 간의 이런 비대칭성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와 관련해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세네카보다 반 세대 앞서서 "사람들은 나쁜 것을 좋은 것보다 더 강렬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고대 사람들은 주로 세네카 덕분에 지금의 심리학자와 '리스크(혹은 손실) 기피'를 연구하는 트리파트 교수와 같은 의사결정 이론가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 그들은 통속적인 처방을 능가하는 더욱 깊이 있고 실용적인 마인드를 지녔다.

 

현대를 배경으로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당신이 잃을 것은 많고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 있다고 가정하자. 재산이 늘어난 것, 즉 1,000셰켈(약 30만원 - 옮긴이)을 번 것은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같은 금액을 잃었을 때에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당신은 비대칭적인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좋은 것이 아니다. 당신은 프레질하기 때문이다.

 

이런 프래질에 맞서 세네카가 제안하는 실천적 방법은 재산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수양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 즉 고행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이는 손실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세네카는 여행을 떠날 때 주로 배가 난파되는 상황에서 있어야 할 물건만 챙긴다(당시에는 여관히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에서 잠을 자기 위해 담요가 있어야 하고, 당시 상황을 고려해볼 때 1~2명의 시종도 포함되겠다).

 

이 이야기가 현대에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보이기 위해, 이제 우리 인생의 무작위성을 심리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스토아 철학이라는 브랜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설명하려고 한다. 특히 대기업에서 하는 일들이 내가 생각하는 윤리와 맞지 않을 때, 나는 대기업에 고용되어 다른 누군가의 독단적인 견해에 의존해야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8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계속 자영업에 종사해왔다. 그러나 그 전에 마지막 직장에서 사직서를 쓰고 서랍을 잠그고 나서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자유를 느꼈다.

 

마찬가지로 무작위적인 일들이 넘치고 영혼을 후벼 파는 심리적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트레이더라는 직업을 가졌을 때에도, 나는 매일 아침 최악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가정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럼 나머지 시간은 뜻밖의 즐거움이 될 테니까.) 실제로 이 방법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해주어서 다른 치료법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었고, 게다가 하강국면에서도 침체되지 않도록 해서 최악의 경우가 명백해 보이더라도 위험을 수용하는 자세를 갖게 해주었다. 상황이 잘 돌아갈 때 재산을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수양에 몰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가 수양이 가장 요구되는 순간이다. 나는 가끔씩 세네카의 방식대로 고생스러운 여행을 실천한다(세네카와 달리 1~2명의 시종이 나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지적 활동의 본질은 손실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처럼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재산을 가치 없는 것으로 바라보기 위한 수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손실로부터 고통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무작위성으로 가득 찬 세상은 더 이상 당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p.244-246

안티프래질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우선 상승국면에 접어드는 것보다 하강국면에서 빠져나오는 데 있다. 즉 부의 블랙 스완에 노출되지 않고 자연적인 안티프래질이 저절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프래질의 경감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 말은 명백하게 들리지만, 핵심을 놓치기 쉽다. 프래질은 불치병처럼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깨지지 않는 우편물은 상황이 좋아지면 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프래질한 우편물은 래칫ratchet(한쪽의 방향으로만 돌고 반대 방향으로는 돌지 못하게 되어 있는 톱니바퀴 - 옮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한 번 손상되면 회복되지 않는 비가역성을 띤다. 중요한 것은 선택한 경로 혹은 사건의 순서이지, 최종 결과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두고 '경로 의존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경로 의존성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신장 결석 수술을 먼저 받고 마취를 나중에 하는 것은 반대로 하는 것과 다르다. 또 커피, 디저트와 함께 메인 요리를 먼저 먹고 토마토 수프를 나중에 먹는 것은 반대로 먹는 것과 다르다. 경로 의존성을 생각하면 우리의 접근 방식은 간단해진다. 깨진 것은 영원히 깨진 상태로 남기 때문에, 잠재적인 상승국면과는 상관없이 프래질한 대상을 확인하여 트라이애드의 왼쪽 줄에 두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정태적 사고에 젖어 이윤 창출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생각하고, 생존과 위험 관리를 단지 고려해야 할 요소로만 생각하는 기업가들은 경로 의존성에서 나오는 이런 프래질을 종종 무시한다. 그들은 성공을 위한 생존이 성공에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윤을 벌어들이고 BMW를 구매하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속도나 성장처럼 변화와 관련된 개념이 프래질을 고려하지 않고 제시되었을 때는 공허하고 의미가 없다. 뉴욕에서 시속 250마일로 운전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따라서 실효 속도는 정확하게 시속 0마일이다). 명목 속도가 아닌 실효 속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담론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덮어버린다.

 

경로 의존성하에서는, 경제성장과 불황의 리스크를 구분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금융 수익과 파산의 리스크, 효율성과 사고의 리스크도 마찬가지다. 효율성의 개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박꾼이 돌이킬 수 없는 파산의 리스크를 안고 있다면, 그의 전략이 갖는 잠재 수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몇 년 전에 자신의 대학교 기부금 펀드가 20% 정도의 수익을 올렸다고 자랑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 수익에 파국적인 손실을 초래하는 프래질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1년만 잘못되면 수익을 모두 날리고 대학의 존립 자체가 위협당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이 프래질할 때 깨질 수 있는 리스크를 줄이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개선하거나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진다. 로마의 풍자 시인 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가 말했듯이, 서둘러서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p.248-249

한쪽 끝에서는 리스크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다른 쪽 끝에서는 극단적으로 수용한다. 리스크에 대해 양극단이 아닌 중간 지점에서 대단히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청난 측정 오차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다. 그러나 바벨 전략은 애초부터 하강국면의 리스크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즉 파멸의 리스크를 제거한다).

 

가장 흔한 금융 부문의 예를 들어보자. 금융 부문은 설명하기는 쉽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재산의 90%를 현금(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가정) 혹은 뉴메레르numeraire(모든 상품의 교환비율을 표현하고자 할 때 기준이 되는 상품을 말하며, 뉴메레르가 되는 상품으로는 금 또는 미 달러화 등이 있다 - 옮긴이) 로 보유하고 10%는 가장 위험한 주식에 투자한다면 엄청난 상승국면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10% 이상을 손해보지는 않는다. 모든 재산(즉 100%)을 중간 정도의 리스크를 갖는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은 계산을 잘못했을 경우 전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 이렇게 바벨 전략은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의 리스크가 계산 불가능하고 측정 오차에 프래질한 문제를 해결해준다(여기서 금융 바벨 전략은 최대 손실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미리 알도록 해준다).

 

결국 안티프래질은 공격성과 피해망상의 조합이다. 다시 말하면, 하강국면과 단절하여 극단적인 피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상승국면, 즉 정의 블랙 스완이 스스로 나타나도록 한다. 이제 우리는 세네카의 비대칭성을 보았다. 상승국면이 하강국면보다 많으려면, 중간 지점에서 상황을 개선시키기보다 극단적인 하강국면을 줄여야 한다. 

 

바벨 전략은 중간 지점에서 상황을 그리치지 않으면서 양극단으로 이루어진 이원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바람직한 비대칭성을 낳는다.

 

다시 한 번 바벨 전략을 사용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레스토랑의 예를 들어보자. 이곳은 설 구운 그래스페드 미니트 스테이크와 같은 메인 요리와 샐러드, 말벡 와인을 제공하고, 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면 염소치즈 케이크와 함께 머스켓 와인을 준다. 이 레스토랑은 주문을 받지 않는다. 케이크와 스테이크를 작게 썰어서 그것을 시끄러운 기계에 넣어 혼합한다.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행위는 바로 이렇게 혼합하는 것과 같다. 9장에서 네로는 경비원이나 학자들하고 어울렸지, 중간 수준의 지식인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위험한 일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중간 정도의 기질을 가진 '신중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승무원은 아주 낙천적인 사람, 조종사는 비관적인 사람 혹은 더욱 바람직하게는 피해망상인 사람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p.251

성인들도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약간의 위험을 무시하고, 중대한 위험으로부터는 보호받을 수 있도록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중대한 위험에서만 그렇다는 의미다. 이런 생각은 사회 정책, 보건과 같은 정책에 뚜렷하게 반영될 수 있다.

 

우리는 조상들의 지혜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찾을 수 있다. 이디시어 속담에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라. 최선의 경우는 스스로 알아서 잘 관리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평범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선의 경우에 대비하고 최악의 경우는 스스로 알아서 잘 관리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라. 작은 손실은 혐오하면서 엄청나게 큰 블랙 스완에는 관심이 없거나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작고 일어날 법한 손실에 대해서는 보험을 들어놓지만, 드물게 일어나는 커다란 손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거꾸로 행동한다.

 

p.255-256

바벨 전략은 이외에도 많이 있다. 심포지엄 막바지에 이르러 술에 취한 고대 그리스인처럼 집기를 박살낼 정도로 미쳐버리지만,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는 이성을 잃지 않는다. 시시한 가십 기사와 고전 혹은 세련된 작품을 읽고, 중간 것은 결코 읽지 않는다. 대학생, 택시 운전기사, 정원기사, 유능한 학자와 대화하지만, 어중간하게 학자인 체하는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시하거나 제거하지, 어중간하게 말로 공격하지는 않는다. 

 

무작위성에 관한 바벨 전략은 프레질을 완화시켜 안티프레질을 달성하는 전략이다. 즉 혐오스러운 사건으로부터 받게 될 고통을 피하면서 잠재적인 이익을 실현하여 하강 국면에 빠져들게 될 리스크를 제거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금융 부문으로 되돌아가서 이야기하면, 바벨 전략은 반드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받는 현금에 투자하고 나머지를 주식에 투자하는 형태가 될 필요는 없다. 파멸의 리스크를 제거하는 어떤 투자라도 바벨 전략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 전설에 남을 만한 투자가 레이 달리오는 투자를 위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즉 파멸의 위험)의 확률이 0인지 확인하라." 바로 이 원칙이 투자가들에게 바벨 전략으로 다가가도록 해준다.

 

p.262-263

옵션은 어떤 대상에 영향을 끼쳐서 성장하게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특정 유형의 사람에게만 이러한 특징이 적용된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정규 교육 수준이 낮다고 한탄한다(특히 수학 성적이 그렇다). 하지만 미국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고 다른 나라에서 그것을 모방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대학 교육 덕분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은 실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산업혁명 시기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자산은 리스크를 수용하고 옵션의 특징을 활용하는 데 있는데, 이는 시행착오를 합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다. 미국인들은 실패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일본인들은 실패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가 되었든 원자력 발전이 되었든 리스크를 숨기려고 한다. 결국 시한폭탄을 안은 채 약간의 이익을 얻을 뿐이다. 이런 태도는 실패를 고귀하게 생각하면서 전사한 영웅을 숭배하는 그들의 전통과는 이상하리만큼 대조를 이룬다.

 

p.266

탈레스의 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주는데, 이런 교훈은 주로 비대칭성과 안티프래질한 보상 구조와 관련이 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다과 같은 설명과 연관된다. "그러나 그는 천문학 지식을 활용해, 여전히 겨울인데도 올리브의 풍작을 예상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탈레스의 대단한 지식에서 찾았다.

 

대단한 지식이라고?

 

탈레스는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비대칭성에 숨어 있는 특징을 활용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승국면과 하강국면 간의 비대칭성은 그가 별자리를 보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간단히 말해서, 탈레스는 비대칭성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가장 순수한 형태의 명쾌한 비대칭성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매자가 권한은 갖지만 의무는 갖지 않는 옵션이었다. 물론 상대방(즉 판매자)은 의무를 갖지만 권한은 갖지 않는다. 탈레스는 수요가 급증할 때 올리브 압착기를 사용할 권한을 가졌지만 의무는 갖지 않았다. 반면에 상대방은 의무는 가졌지만 권한을 갖지 않았다. 탈레스는 이런 권한에 대해 얼마 안 되는 가격을 지불했는데, 실현 가능한 엄청난 이익을 감안하면 얼마 안 되는 손실이었다. 이것이 기록상으로는 첫 번재 옵션이었다.

 

옵션은 안티프래질로 안내해준다.

 

p.270-271

당신이 뉴욕에 있는 어느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고 산다고 하자. 물론 벽면은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당신은 원하는 기간 동안 그 아파트에 거주할 옵션을 갖고 있지만 거주해야 할 의무는 없다. 갑자기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면, 미리 정해진 기간 전에 주인에게 통지하고 잘 지내라는 인사만 하면 된다. 반면, 주인은 당신에게 일정한 월세를 받고 그곳에 당신이 원하는 만큼 살게 해줄 의무가 있다. 주변 지역의 월세가 크게 오르고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끼더라도 당신은 계약 기간 동안만큼은 보호받는다. 반면, 월세가 떨어지면 당신은 다른 아파트로 옮겨서 월세 지출을 줄일 수 있고,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새 아파트를 사고 월 납부금을 낮출 수도 있다. 

 

이제 비대칭성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낮은 월세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있지만, 높은 월세로부터는 피해를 입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다시 말해서, 당신은 옵션을 갖지만 의무는 갖지 않는다. 한편으로 불확실성은 이런 권한의 가치를 높인다. 부동산 가격이 크게 떨어지거나, 크게 올라가는 식으로 미래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 당신의 옵션 가치는 더욱 커진다. 즉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수록 옵션의 가치도 높아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월세 계약은 권한에 따르는 비용이 없으므로 이미 숨어잆는 옵션(embedded option)이다.

 

p.274

지금은 어느 누구도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감히 말하려고 나서지 않는다. 경제 성장은 아시아의 방식으로 평균을 올리는 데서가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는 꼬리 부분의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올리는 데서 나온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상상력과 용기라는 보기 드문 자질을 지녔으며, 결국 세상은 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p.277

옵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옵션 = 비대칭성 + 합리성

 

여기서 합리성은 이익을 위해 좋은 것은 유지하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의미다.

 

p.277

사람들은 운과 시행착오에 관해서 말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왜 그럴까? 실제로는 운이 아니라 옵션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의상 운은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행착오는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옵션은 운의 위쪽 절반을 가져가는 것이다.

 

p.280~281

유대인 율법학자로서 탈무드를 연구하는 내 친구 앤서니 글릭만은 한때 옵션 트레이더로 변신했다가 지금은 다시 율법학자로 되돌아온 사람이다. 그는 나와 함께 옵션의 특징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는 대화를 나누다, 내가 스토아 철학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자 조용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롱 감마long gamma와도 같아." (풀이하자면 '롱Long'은 '무엇으로부터 이익을 본다'는 의미고 '숏Short'은 '무엇으로부터 손실을 본다'는 의미다. 그리고 '감마gamma'는 옵션의 비선형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롱 감마'는 '무작위성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의미다. 앤서니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에도 쓴다.)

 

p.287

인간은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래에 무엇이 중요한지 잘 모른다. 결국 무작위성을 활용하여 발견한 것을 하나하나 배운다. 이것이 바로 안티프래질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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