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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전략

주변인으로서 관찰하기 - 씩 데이터

by Diligejy 2023. 8. 31.

 

미스터 소크라테스 中

"중요한 거니까 한 번 따라해보시죠. 주변인, 경계인,..."

 

옛날 영화긴 한데 미스터 소크라테스에 나오는 '내가 뽑은' 명장면 중 하나다. 블랙코미디 영화로서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면서 김래원이 연기한 구동혁 형사의 존재를 나타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주변인'

 

구동혁은 깡패이자 경찰이다. 그가 경찰이 되고자 한 이유는 누군가를 팰 수 있는 '면허', 즉 자유와 권한을 갖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철저하게 조직의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자해를 해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다. 

 

이렇게 그가 자신의 삶을 혁신할 수 있었던 건 주변인으로서 사고하고 그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히 리스크를 감당하며 주변 사람들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다.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도 이런게 아닌가 싶다. 여러 인류학적 이론에 대한 강조와 사례를 들지만, 결국 기존의 틀에 얽매여 혁신하지 못하는 것을 개선하고 싶다면, 편안함과 안전함을 혼동하지 말고 자기 내부에 있는 모순을 인식하는 주변인적 사고를 한 뒤 다시금 재정의를 해서 혁신을 하거나(물론 그 과정은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주변인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즉, 지금 이번 분기의 매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 계획과 업의 본질을 바라보라는 의미와도 같다.

이를 위한 도구가 꼭 책에서 강조한 인류학이 될 필요는 없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한다.

 

밑줄긋기

p.5

측정할 수 있는 것이 항상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 트리시아 왕(인류학자)

 

p.28

최근 맥킨지에 근무하는 인류학자는 270명에 달한다. 몰락해 가던 레고가 세계 최고의 완구 기업 자리를 탈환하도록 도운 연구팀의 이름은 '레고 인류학자'였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PT 크루저의 디자인 작업에 저명한 인류학자 클로테르 라파이유를 참여시켰고, 인텔은 2010년 '상호작용 및 경험 연구소 Interaction Experience Research'를 설립하면서 그 책임자로 인류학자 제네비브 밸(Genevieve Bell)을 임명했다. 이외에도 제록스, 제너럴모터스, 코닥,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닛산, 넷플릭스, 코카콜라 등 수많은 기업이 인류학자와 협업하고 있다.

 

이러한 유수의 기업들에 왜 인류학자가 필요할까. 제품이나 서비스의 질 못지않게 소비자 경험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의 운명이 소비자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달렸다는 말과 다름없다.

 

p.31-32

한일월드컵을 몇 개월 앞둔 2001년 11월,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 식용 이슈를 두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동물보호 단체를 이끌고 있던 브리지트 바르도는 우리나라의 개 식용 및 잔인한 도살 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은 야만인"이라고 표현했다. 손석희 앵커가 프랑스에서도 개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한국에 온 프랑스인이 개고기를 먹기도 한다고 지적하자 브리지트 바르도는 "프랑스인은 절대 그런 야만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우리 국민의 공분을 샀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개고기를 즐겨 먹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같은 해 국회의원 20명이 발의한 일명 '개고기 합법화 법안'은 반대 여론에 부딪혀 본회에 상정되지도 못헀다.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에도 개 식용을 마뜩잖아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동물보호를 외치던 브리지트 바르도는 미운털이 박혀야 했을까.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해서가 아니라 식문화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고려하지 않고 '한국인은 미개하고 야만적이다'라는 서구 중심적인 생각을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토 에코는 계간지 <세계의 문학>과의 인터뷰에서 브리지트 바르도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며 "어떤 동물을 잡아먹느냐는 문화인류학적인 문제"라고 일갈했다. 그의 말처럼 한 사회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지는 자연환경, 사회경제적 요건, 문화의 특수성에 따라 결정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저서 <음식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힌두교도가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인도의 환경 및 경제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인도와 같은 소규모 농업 환경에서 소는 밭을 갈고 우유를 제공하는 이로운 동물이므로 잡아먹지 않는 편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p.36-38

보험에 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을 뒤집으려면 문화 상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즉 기업이 아닌 고객의 시선으로 보험이 어떤 역할을 할까에 집중해야 했다. 고객이 보험에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귀한 시간을 들여 보험 상품 설명을 듣거나 가입을 권유받길 원하는 고객은 없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전문가가 자산 불리기, 내 집 마련, 자녀의 교육 결혼 독립을 위한 재원 마련, 노후 자금 준비 등을 세심하게 계획해 준다면, 그리고 생애 주기에 맞춘 이러한 재무 계획을 보험 상품이 지원해줄 수 있다면 고객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처럼 '보험 상품 판매'가 아닌 '컨설팅 서비스 제공'으로 고객에게 접근하는 것이 바로 컨설팅식 세일즈다.

 

이를 위해 맥킨지와 고객사는 생애주기에 맞춰 기존 보험 상품을 재정비하는 한편, 일명 '보험 아줌마'로 불리던 보험설계사를 재교육하고 복장 규정을 통해 전문가다운 이미지를 갖추게 했다. 호칭도 FC로 바꿨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생명 FC'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시선을 기업에서 고객으로 조금만 옮기면 고객의 숨은 욕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기업이 이를 잊는 우를 범한다. 특히 우월한 기술력을 보유한 빅테크에서 종종 이런 실수가 나타난다.

 

'Killed by GOogle : Google Graveyard'라는, 사장된 구글 서비스들을 모아 놓은 웹사이트가 있다. 일종의 '디지털 무덤'인 셈이다.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는 서비스 하나가 2009년에 선보인 웨이브(Wave)다. 구글 측 설명으로는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블로그, 멀티미디어 관리, 문서 공유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협업 및 커뮤니케이션 툴이다. 한마디로 '웨이브 하나면 다 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용자들의 반응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였다. 서비스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탓에 결국 웨이브는 공개 1년 만에 구글 무덤에 묻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구글의 회심작, 웨이브가 사망 선고를 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웨이브는 모든 기능 하나하나에 놀라운 기술력이 숨어 있는, 그야말로 '어벤져스'와 같은 서비스였다. 가령 웨이브의 인스턴트 메시징은 타이핑하고 있는 내용을 실시간으로 상대방에게 전송해주는 가히 혁신적인 기술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기술은 사용자들을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었다. 내 실수와 오타가 실시간으로 상대방에게 전송되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도 질색할 만한 기능이었다.

 

내가 메시지를 쓰는 동안 상대방 화면에는 메시지 작성 중임을 알리는 말 줄임표만 나타나도 충분하다.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 기술은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혁신적인 기술이 때때로 실패하는 건 이렇게 새롭고 놀라운 기술을 소비자가 싫어할 리 없다는 개발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술만 생각하다가는 사용자의 욕구를 간과하기가 쉽다.

 

p.40-41

이처럼 무늬만 '글로벌'이지 본질적으로는 미국 기업, 유럽 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 꽤 많다. 나도 여러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과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본사 방침만 고수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발견했다. 블리자드만 해도 한국을 무척 중요한 시장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 유저들의 취향과 욕망을 완벽하게 파악한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가령 와우와 같은 장대한 규모의 게임을 할 때 한국 유저들의 플레이 방식이 미국 유저들과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본사는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 유저들이 게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체험형 플레이를 한다면 한국 유저들은 최종 보스와 대결해 이기는 목표지향적 플레이를 즐긴다. 그렇다 보니 한국 유저들은 단시간에 파워나 경험치를 올리길 바라는데, 블리자드에서는 파워 아이템을 판매하지 않는다. 게임 세계관 안에서는 돈이 아닌 게임 플레이 실력으로만 인정받게 하겠다는 블리자드의 핵심 가치 'Play Nice, Play Fair'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블리자드 팬덤이 더 공고하고 두터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유저들로서는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는 한국팀과 함께 경험치를 두 배로 올려주는 물약 아이템 개발을 본사에 건의했다. 경험치 아이템은 파워 아이템과 달리 본사의 핵심 가치에 반하지 않으면서 한국 유저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선사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듭된 요구에 본사에서도 마침내 한국 유저들의 특성을 반영한 아이템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출시된 물약 아이템은 한국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p.47

필립모리스의 신제품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선을 보인다. 그러나 신제품을 출시하자마자 경쟁사에서도 신제품을 내놓고, 까다로운 소비자가 깐깐하게 피드백하는 한국이야말로 제품을 파일럿 테스트하기 가장 적합한 시장이다.

 

비단 필립모리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치열한 경쟁, 까다로운 소비자, 극심한 규제가 있는 한국 시장은 오히려 모든 글로벌 기업의 인플루언스 마켓 또는 파일럿 마켓이 될 수 있다. 이미 LVMH와 같은 글로벌 기업은 한국을 파일럿 마켓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국 명품 시장이 날로 커진다고는 해도 중국 시장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도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한국을 최초 출시 국가로 선택하는 이유는 호기심이 강하고 트렌드에 민감하며 안목이 깐깐한 소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시장이 주변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플루언스 마켓임을 일찍이 알아본 것이다.

 

p.56

소비자는 소비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비자이기 이전에 국가, 지역, 직장, 가족, 취향 공동체 등 수많은 공동체의 일원이다. 따라서 컴퓨터 앞에 앉은 유저나 마트 매대에서 가격표를 확인하는 쇼핑객으로만 그들을 한정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무엇 때문에 웃고 왜 화를 내는지, 어디에 관심을 쏟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총체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비로소 그들의 소비 패턴도 보일 것이다.

 

p.69-70

이러한 '우연의 개입'은 참여관찰의 약점이 아니라 최대 강점이다. 인류학자들은 자신이 참여관찰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전혀 모른다. 자연과학이나 여느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가정을 세우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지만, 인류학자는 어떠한 추측이나 가정 없이 일단 관찰부터 한다. 관찰한 바를 세세하게 기록은 하되 연구 대상이 되는 요소가 사회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맥락이 발견될 때까지는 함부로 재단하거나 추측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참여관찰에서는 무언가가 늘 '우연히' 발견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참여관찰의 핵심이 있다. 가정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연구 방법은 연구자의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참여관찰은 실험과 달리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한다.

 

소비자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쇼핑의 과학>은 관찰이 어떤 대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 파코 언더힐이 설립한 인바이로셀이라는 컨설팅 회사는 분석을 의뢰받은 매장에 '추적자'로 불리는 조사원을 배치해 쇼핑객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추적자로 불리는 인류학자가 쇼핑몰로 현지조사를 나가는 셈이다.

 

인류학자가 선입견 없이 참여관찰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진실을 우연히 발견하듯이 추적자들도 마찬가지다. 가령 반려견 사료 제조업체의 의뢰로 슈퍼마켓을 조사하던 추적자들은 성인은 반려견 사료를, 어린이와 노인은 간식을 주고 구입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후 쇼핑객을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한 결과, 어린이와 노인에게 반려견의 사료를 먹이는 일은 귀찮은 의무지만 간식 던져주기는 재미있는 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그간 선반 맨 위쪽에 진열했던 반려견 간식을 어린이와 노인의 손이 쉽게 닿는 매대로 옮겼더니 매출이 금세 뛰어올랐다고 한다.

 

p.76-77

"사자가 사냥하는 법을 보려면 동물원이 아닌 정글로 가라."

 

한때 위기에 처했던 P&G의 구원투수로 불린 앨런 래플리 전 회장이 한 말이다. 동물원에서는 사자의 본성을 제대로 볼 수 없듯 설문조사지로는 소비자의 맨얼굴을 볼 수 없다. 소비자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들이 거주하고 쇼핑하며 놀고 일하는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며 감탄하고 불평하는 상황에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마치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처럼, 갓 세상에 태어난 어린이처럼 선입견 없는 눈으로 그들을 관찰해야 한다.

 

p.80-82

요즘 젠지(Gen Z)들에게 '휴대전화란 곧 애플의 아이폰'이지만, 아이폰이 갓 출시된 때만 해도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제조사'는 누가 뭐래도 노키아였다. 그러나 노키아는 지금 젠지 대부분이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회사가 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노키아가 몰락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내게는 인류학자인 트리시아 왕이 'big data에 thick data가 필요한 이유 - Why Big Data Needs Thick Data'라는 글에서 피력한 의견이 가장 인상적이고 흥미롭다.

 

아이폰 출시 2년 후인 2009년, 노키아는 새로운 스마트폰 개발 전략을 위해 어마어마한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는 한편, 인류학자를 고용해 중국 저소득층의 휴대전화 사용 실태를 조사하기로 한다. 이때 노키아와 협업한 인류학자가 바로 트리시아 왕이다. 그는 중국 10대들과 인터넷 카페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건설 노동자에게 만두를 파는 등 저소득층의 일상을 파고들어 수개월 간 참여관찰을 시행한 끝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다다른다. 저소득층도 스마트폰을 향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으며 자기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일지라도 아이폰을 구매할 의사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노키아가 추진하던 저소득층 사용자를 위한 저렴한 스마트폰 개발 전략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키아는 트리시아 왕의 연구 결과를 무시한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수집한 Big Data로는 그런 징후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으며 샘플 크기가 겨우 100개 정도에 불과한 트리시아 왕의 연구는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정성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연구 결과는 믿기 어렵고, 샘플 크기가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경우에만 그 결과를 믿을 수 있다는, 정량적인 데이터에 대한 맹종에서 비롯된 의사결정이었다.

 

우리는 노키아의 이러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잘 알고 있다. 트리시아 왕은 노키아가 지나치게 숫자에만 의존한 나머지 쉽게 측정할 수 없는 정성적인 데이터를 해석하는 법은 잘 몰랐다는 점이 패착이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항상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 What is measurable isn't the same as what is valuable'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p.98~101

한때 '20세기 최고의 장난감'으로 칭송받던 레고가 1990년 들어 출산율 저하, 비디오 게임의 부상 등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레고는 문제 해결을 위해 대규모 설문조사를 벌여 Big Data를 수집한다. 그 결과 요즘 아이들은 시간 압박이 심하고 놀이 시간이 거의 없으므로 오랜 시간을 들여 조립하는 브릭 장난감은 더는 인기를 못 끌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레고는 사업 영역의 변화를 꾀한다. 창의력과 인내심을 덜 요구하고 즉각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비디오 게임과 더 매력적인 외양을 지닌 캐릭터 인형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레고의 새로운 전략은 어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릴 때 레고를 가지고 놀던 부모 세대에게도 외면 받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레고 경영진은 근본적인 문제부터 점검하기로 한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덴마크의 컨설팅그룹 ReD다. 이들은 전통적인 경제학과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 특히 현상학을 컨설팅 기법에 접목하기로 유명하다. 이 회사의 공동 대표 크리스티안 마두스베르그와 미켈 B. 라스무센은 2014년 11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인간이 숫자와 데이터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숫자로 나타난 정보는 사람의 부분일 뿐 이를 아무리 조합해도 완벽한 한 사람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런데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고객을 이해한다면서 각종 숫자와 데이터에만 몰두한다. 정작 고객은 만나지 않으면서 숫자와 데이터에 의지해 고객을 추측하려 한다."

 

이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ReD는 Big Data 사업을 하지 않는다. 대신 고객의 생활반경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대화하고 관찰한다. 직원 대부분은 MBA 출신이 아니라 인류학 사회학 철학 전공자다. 

 

ReD가 레고의 의뢰를 받고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질문 바꾸기였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좋아할까'를 '과연 장난감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바꾼다. 그런 다음 '레고 인류학자 Lego Anthros'라는 조사팀을 꾸려 미국과 독일의 가정집에 파견한다.

 

공동 대표 두 사람이 집필한 <우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에는 레고 인류학자들의 활약상이 자세히 묘사된다. 레고 인류학자들은 고객에게 친숙하고 안전한 공간, 즉 가정으로 들어가 그들을 심층 인터뷰하는 한편 아이들이 놀고 쉬며 공부하는 일상을 영상물로 남기고, 함께 장난감을 쇼핑하면서 몇 달 간 Thick Data를 수집한다.

 

장난감 업계는 아이들의 주의 집중 시간이 매우 짧다는 가설을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아이들을 실제로 관찰한 레고 인류학자들은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한다. 아이들은 난도 높은 놀이 경험에 강한 의욕을 보이며 이를 통해 성취감을 느낀다. 이런 놀이는 또래 집단에서 나름의 서열을 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알고 보면 아이들이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디오 게임은 즉각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점수를 얻기 위해 매우 정교한 기술 습득이 필요해서 인기 있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은 아무리 오래 갖고 놀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의 차등적인 레벨과 서열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확실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즉 아이들이 레고처럼 복잡한 블록을 조립할 시간이 없고 주의 집중력도 약하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블록을 가지고 놀 시간이 있었고, 블록 조립을 잘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경영진은 '레고의 본질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레고를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아이들의 성취욕을 자극할 만한 제품, 즉 조립에 시간은 걸려도 그만큼 도전할 가치가 있고 재미있는 장난감을 만들기로 한다. 블록 개수가 더 많고 조립 방식이 까다로운 이 신제품에 아이들은 열광했고, 레고의 공식 도면 말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립법을 만들어 공유하기 시작한다.

 

매장에는 아이들이 자유로이 제품을 조립할 수 있는 '레고 클럽하우스'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또 어른을 위한 고난도 레고 시리즈를 출시하고 '레고에 열광하는 성인들의 모임'을 창설해 소비자들과의 접촉을 지속해서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레고다움'에 집중한 결과는 놀라웠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 2022'에 따르면 레고의 브랜드 가치는 세계 63위로 118억 달러에 달한다. 장난감 업계에서는 압도적 1위다. 이는 신규 시장에 섣불리 진출하기보다는 원점으로 돌아가 아이와 부모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귀 기울인 덕분이다. 

 

p.108

이런 과정 끝에 그는 MRI 공간을 어린이를 위한 모험 공간으로 개조하기로 한다. 가령 어떤 기계는 입구에 나무로 만든 커다란 키를 붙여 마치 해적선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MRI 촬영기사는 아이들에게 해적선 내부로 모험을 떠난다고 알려주고 배에 올라타 있는 동안은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MRI 촬영이, 아니 해적선 모험이 끝나면 어린이 환자들은 검사실 벽에 걸린 해적 모형에서 작은 보물을 하나 꺼내 기념 삼아 가져갈 수 있다. 이 어린이용 MRI 덕분에 소아 환자의 마취제 투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MRI 검사를 마친 뒤 엄마에게 내일 또 오자고 조르는 아이가 있을 정도로 환자들의 만족 지수도 향상했다.

 

p.144

1988년 출판물 등록이 자유화되면서 우리나라에 잡지 전성시대가 열린다. 온갖 잡지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가운데 여성지 <마리안느>는 창간 전 소비자 조사로 독자들의 욕구를 확실하게 파악하기로 한다. 조사 결과 독자들은 연예계 뒷소문과 스캔들을 주로 다루는 기존 여성지에 환멸을 느끼고 있음이 드러난다. 저질 기사에서 탈피한 여성지가 있다면 구독할 의사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95%에 달한다. 이에 따라 <마리안느>는 1989년에 無섹스, 無스캔들, 無루머 등 '3無 정책'을 표방한 건전한 고품격 여성지를 창강하짐나, 기대와 달리 판매가 부진해 1년 5개월 만에 폐간하고 만다. 대체 무엇이 잘못됐을까.

 

p.151~152

"아직 적히지 않은 페이지를 읽어 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Our task is to read things that are not yet on the page 

공식 자서전 <스티브 잡스>에 실린, 그가 직접 작성했다는 글의 한 대목이다. 소비자에게 원하는 바를 묻지 말고,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먼저 파악하는 게 자신이 할 일이라는 뜻이다.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할까. 이 제품을 어떻게 마케팅해야 할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서 찾아야 한다. 소비자는 신제품을 만들거나 홍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단서다. 그러나 소비자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소비자 조사는 아니다.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혁신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자 한다면 소비자 조사에 의존해선 안 되며 특히 아이디어 초기 단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스티브 잡스가 '1인 포커스 그룹'이라는 비아냥을 감내한 건 아이디어 초반에 행해지는 소비자 조사가 자신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평범하고 무난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p.162~163

그러나 학생들은 이를 사용자 실수로 치부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최종 사용자인 저개발국 산모들이 처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라 여겼다. 실리콘밸리로 돌아온 이들은 미숙아의 부모가 자의적으로 적정 온도를 바꾸지 못하도록 온도를 확인하는 기능을 아예 빼버렸다. 대신 적정 온도인 37도에 도달하면 오케이 표시가 뜨도록 디자인을 바꾸었다. 이렇게 개선된 인펀트 워머는 '사회적 파급력을 갖춘 디자인상' '이코노미 혁신상' 등 각종 상을 휩쓰는 한편 세계적인 유통망을 구축하는 데도 성공한다.

 

사용자가 애초에 의도된 대로만 제품을 사용하리라 믿는 것은 개발자나 마케터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자신들의 기술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심취한 나머지 메뉴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용자가 제품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들이 처한 사회문화적 맥락, 생활 습관 및 기호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콜라병 입구에 바람을 불어넣어 연주하는 부시맨이 어리석지 않듯이 인펀트 워머의 온도를 30도로 낮추는 산모들 역시 그렇다. 애초 의도한 대로 제품이 사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용자가 어리석은 게 아니라 개발자가 최종 사용자를 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한 뒤에는 반드시 사용자가 어떻게 쓰는지 참여관찰을 통해 알아봐야 하는 이유다.

 

p.167

BBC 다큐멘터리 <슈퍼브랜드의 비밀 Secrets of the Superbrands>에 따르면, 일명 '애플 팬보이', 즉 '애플빠'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한 결과 이들이 애플 기기를 볼 떄 보상과 쾌감을 담당하는 중추에서 매우 강력한 반응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독실한 사람이 자기 종교와 관련한 이미지를 볼 때 나타나는 뇌 반응과 같단다. 한마디로 애플이 곧 종교와도 같다는 것이다. CNN 인터넷판은 이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촌평했다.

 

"할머니가 일요일마다 교회에 안 가고 왜 쇼핑몰에 가느냐고 물으면 '애플 교회'에 간다고 말하라."

 

p.189~190

내가 한국필립모리스에서 님 호칭 제도를 시작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궐련을 생산하는 전통적인 제조 기업으로 필립모리스를 정의하면 애써 기업문화를 바꿀 필요가 없다. 여느 제조업이 그렇듯 직급과 서열 중심의 수직적 위계질서로도 문제없이 잘 굴러갈 수 있다. 특히 담배 산업처럼 규제가 엄격한 분야에서는 노련하고 카리스마 있는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립모리스는 이미 전통 궐련을 만드는 제조 기업에서 벗어나 아이코스 디바이스를 생산하는 테크 기업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기업의 주력 상품이 달라졌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일하고 의사소통하는 모든 방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단적인 예로 말보로와 같은 일반 담배는 디지털 광고를 할 수 없지만, 아이코스와 같은 전자담배 디바이스에는 그런 규제가 없어 여러 채널을 통해 다양하게 마케팅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리더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보다 여러 구성원이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의사결정에 빠르고 유연하게 반영하는 형태가 더 효율적이다.

 

p.217~218

다양성에 주목하게 된 오늘날의 기업들이 애타게 찾아야 하는 인재도 결국은 주변인이다. 우리는 흔히 한 조직에 깊이 연루된 '완벽한 내부인'만이 그 조직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거라 믿는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문화는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훨씬 많으며 묘하게도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감춰진 바를 가장 모른다"라고 했다. 이 말처럼 특정 산업 분야에 완전히 적응한 내부인은 조직의 문제를 파악하거나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다고 그 분야와 동떨어진 외부인이 더 유리한 것도 아니다. 외부인은 내부의 사정이나 정보를 알지 못하므로 실효성과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아이디어를 내기 십상이다. 그러나 외부인이 그 분야에 뛰어들어 내부인의 시선을 이해하고 주변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면 조직이 당면한 이슈를 새로이 파악하고 해결하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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