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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by Diligejy 2023. 9. 8.

 

p.12

선조 대는 정치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정치세력의 다양성 면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 흔히 선조 대를 당쟁이 '발생'한 시대라고 한다. 정확한 말은 아니다. 당쟁이 없던 시기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이 책이 '동서분당'이 발생한 선조 8년(1875)부터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일단락된 선조 23년(1590)까지 15년간의 당쟁을 살펴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이 시대만큼 정치에서 이상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몹시 비극적이었다.

 

p.14~15

어떤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대개는 그 앞 시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선조 대 당쟁도 다르지 않아서 기묘사화(1519)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선조 대 당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황, 조식, 이준경, 백인걸 같은 제일 연장자급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바로 기묘사화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20세 전후에 겪은 기묘사화는 그들 생애 전체를 규정해 버린 원초적 경험이다.

 

반정을 통해서 중종(재위 1506~1544)은 갑자기 왕이 되었다. 그는 즉위 당시 19세였고, 반정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반정공신들에게 떠밀려 말 그대로 갑자기 왕으로 추대되었다. 때문에 즉위 직후 그는 국왕의 권위와 힘을 전혀 갖지 못했다. 심지어 아내와도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즉위 전, 그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의 부인 신씨의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자 반정 당시 좌의정이었다. 반정공신들의 강요로 신씨는 폐비가 되었다. 

 

하지만 재위 8년쯤 되었을 때 조정 상황에 변화가 왔다. 반정의 중심인물들이 차례로 사망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중종에게 자신의 정치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먼저 자기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도학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며 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사류가 중종에 눈에 들어왔다. 

 

p.16

신진사류의 정치적 이상은 쉽게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던 거서이 사실이었다.

 

중종과 신진사류의 관계는 오래지 않아 중종에게도 점차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신진사류의 정치적 요구가 중종이 상정했던 수준을 지나치고 있었다. 신진사류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받던 훈구대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앟았다. 결국 중종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신진사류를 몰아냈다. 그 몰아내는 과정이 격렬했는데, 그것이 기묘사화다. 

 

기묘사화로 피해를 입은 신진사류를 기묘명현이라 부른다. 대표적 인물이 조광조이고, 그 외 김정과 기준, 한충, 김식 등을 들 수 있다. 조광조는 능주(현 전남 화순)에 귀양 갔다가 곧 사약을 받아 죽었고, 나머지도 귀양 갔다가 일부는 사형을 당했거나 자살했다. 그들 대개 30대 초중반이었다. 이들 외에도 그들을 옹호하던 우의정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 고위 관직자들이 조정에서 쫓겨났다.

 

p.16~17

기묘사화로 사림은 커달나 타격을 받았다. 상당 기간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타격이었다. 조정에 있던 신진사류는 추방되고, 그것을 본 지방의 신진사류는 중앙에 진출하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조정은 권신의 각축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남곤, 심정이, 뒤에는 김안로가 권력을 잡았다.

 

한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사내아이를 낳은 직후 사망했다. 이 아이가 5년 뒤 세자로 책봉되고 나중에 인종으로 즉위한다. 2년 뒤 중종 12년(1517)에 중종은 두 번째 계비를 맞았다. 그녀가 문정왕후 윤씨이다. 그녀는 내리 세 명의 공주를 낳은 후 중종 29년(1534)에 34세의 나이로 아들을 낳았다. 그가 후일의 명종인 경원대군이다.

 

경원대군이 태어나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문정왕후의 친오빠 윤원로와 친동생 윤원형이 세자 교체를 계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문정왕후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들과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사이에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윤임을 대윤, 윤원로 윤원형을 소윤이라고 불렀다.

 

중종 33년(1538) 김안로가 실각하고 곧 사사되었다. 사사란 임금이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했다는 이유였다. 김안로는 인종과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의 아들이 인종의 누이 효혜공주의 남편이다.

 

김안로의 패사 후 조정에는 크게 두 흐름이 나타났다. 하나는 사림계 인사들이 조정에 복귀하고 우호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힘을 얻었던 것이다. 중종 35년(1540)에 김안국이 대제학이 되었고, 유배 갔던 이언적도 다시 돌아왔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중종 38년(1543)이다. 다른 하나는 대윤과 소윤 사이에 중종의 후사를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된 것이다.

 

p.18

요컨대 대윤은 사림세력과, 문정왕후 소윤은 훈구세력과 연결된 관계가 인종 대에도 계속되었다. 인종이 사망한 즈음에는 유관, 성세창이 각각 좌우정승, 이언적이 좌찬성, 윤임이 형조 판서에 있었고, 홍문관에는 이황, 이약해 등이 있었다.

 

인종은 사림에게 우호적인 이미지를 남긴 채 재위 8개월 만에 사망했다. 뒤이어 경원대군, 곧 명종이 12세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그에 따라 대윤은 권력을 잃었고 윤원형 등 소윤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p.18-20

인종은 1545년 7월에 사망했다. 을사사화는 인종의 졸곡도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다. 1545년 8월 문정왕후는 예조참의인 친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렸다. 형조 판서 윤임, 이조 판서 유인숙, 좌의정 유관 등을 제거하라는 내용이었다. 병조 판서 이기, 지중추부사 정순붕과 협력하라는 뜻도 함께 전해졌다. 

 

윤원형은 처음에는 문정왕후가 지시한 방식이 아닌 공식적인 방식, 즉 양사의 탄핵을 통해 윤임 등을 제거하려 했다. 그쪽이 모양새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양사란 사헌부와 사간원에 대한 통칭이다. 당시 양사에는 집의 송희규, 사간 박광우, 장령 정희증 이언침, 헌납 백인걸, 지평 민기문, 정언 김난상 유희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문정왕후 밀지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아무도 윤원형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특히 백인걸은 윤임, 유관, 유인숙 3인을 처리하는 방법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오히려 윤원형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자 다음 날 문정왕후는 백인걸을 파직시켜 의금부에 가두고 엄히 심문하게 했다. 

 

이어서 이기가 상소를 올렸다. "형조 판서 윤임은 중종조부터 잘못이 많았으므로 근래 스스로 불안해했으며, 좌의정 유관과 이조 판서 유인숙 역시 의심스런 형적이 있습니다." 이 상소는 조정을 뒤흔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병조 판서 권벌이 관련자들에 대해서 관대한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곧, 이를 지지하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여러 사람이 처벌받을 만한 어떤 구체적 내용도 제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여론을 일순 역전시킨 것이 정순붕의 상소였다.

 

정순붕은 권벌이 3인을 구원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3인의 죄상을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문정왕후가 3인의 처리와 관련하여 앞서서 포괄적으로 언급한 사항과 일치했다. 이로써, 애매하던 3인의 죄목이 반역죄로 확정되었다. 문정왕후는 일방적으로 형량을 결정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을 사사하고, 권벌을 자리에서 쫓아냈다.

 

며칠 후 경기 관찰사 김명윤이 윤임의 조카 계림군 이류 및 인종의 이복동생 봉성군 이원에 대해서 상소를 올렸다. 두 사람이 불온한 무리와 결탁해서 명종의 왕위에 도전할 수 있는 위험 소지를 없애야 한다며, 그는 두 사람에 대해 정치적 처리를 신속히 단행할 것을 촉구했다. 김명윤은 봉성군의 이모부이다. 계림군 이류는 김명윤의 상소가 있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난 후 잡혀 와 능지처사되었다. 그는 정철의 매형이다. 당시 18세의 봉성군은 어리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하지만 2년 뒤 '양재역벽서사건' 때 위리안치 상태에서 자결하게 했다. 을사사화가 처리되자 공신 책봉이 있었다. 위사공신이 그것이다. 이기, 정순붕, 임백령, 허자가 1등 공신이었다. 공신 책봉 후 이기가 좌의정, 정순붕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p.22-23

을사사화에서 기유옥사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집권세력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예상되는 누구라도 철저히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훈척세력은 특히 사림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려 했다. 독점적인 정국 운영권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명종 초년의 사화로 사림은 기묘사화 때보다도 더 큰 참극을 겪었다. 이후 사림은 사화에 대해 극심한 공포심을 갖게 된다.

 

p.24-25

이량은 이조 판서가 된 명종 18년(1563)에 자기 아들을 이조 전랑으로 삼았다. 하지만 상피제 때문에 아들이 이조 전랑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번에는 아들 친구 유영길을 밀었다. 사실 이량의 계획은 유영길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이어서 이조 전랑에 차례로 임명하려는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런데 기대승, 허엽 등이 유영길의 임명을 막고 나섰다. 그러자 이량은 이 기회에 사림세력의 대표적 인물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기대승, 허엽을 비롯해서 윤두수, 윤근수, 박소립, 이문형, 이산해 등이 그들이었다. 제거하려고 기록해놓은 사람이 무려 4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황, 이항, 조식 같은 사람까지 포함되었다.

 

이량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또 한 번의 큰 사화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 등장한 사람이 심의겸이다. 그는 전해인 명종 17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이 당시에는 홍문관에 몸담고 있었다. 명종 18년 10월 심의겸이 이량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물론 그 전에 누이 인순왕후와 의견을 맞춘 상태였다. 심의겸은 홍문관 대제학 기대항으로 하여금 이량을 탄핵하게 했고 그 결과 이량은 삭탈관직되었따. 심의겸에게는 사화를 미연에 막고 신진사류의 대표적 인물들을 보호한 공이 분명했다. 나중에 동서분당 당시 선배사류가 심의겸과의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관계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p.25-26

선조 대 초반을 규정한 정치적 조건과 환경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구 체제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둘째는 선조 대가 명종 대를 이어받았던 방식이다. 구체제 청산이 선조 대 초반의 시대정신이었고, 많은 신진사림이 조정을 채웠다. 하지만 이들이 혁명적인 방법으로 조정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권신들이 제거되기는 했지만, 구체제에서 평생에 걸친 경력을 쌓아 온 인물 다수가 조정에 남아 있었다. 다시 말해 선조의 조정에는 대단히 넓은 정치세력의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이 스펙트럼이 구체제 청산의 수준을 놓고 갈등하였다. 셋째는 선조의 정치적 입장이다. 선조의 입장은 즉위 초에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선조 6~7년쯤 드러났다. 그 이전 시기까지 선조의 조정을 특정지은 것은 신구세력 간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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