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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by Diligejy 2023. 7. 22.

 

 

p.9

21세기 들어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미국과 합의해 재무장을 공식화하고 일본군의 역할을 재정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군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 한반도에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 망령의 부활이 우려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내놓은 반응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려면 한국정부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초기에 일본제국의 육군 제1군 5만여 명이 제물포에 상륙했을 때 사전에 조선의 동의를 얻었다는 기록은 없다. 5만여 명의 대군이 경성에 진출해 황궁을 점령한 후 일본은 일본군의 주둔을 위해 토지수용권을 인정하는 한일의정서에 서명하도록 고종 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했다. 한일의정서에는 일본군의 주둔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역사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논의 과정에 참여해 일본군의 전력이 강화되는 동북아 안보환경에서 한국군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저 위안부 문제에 집착해 일본과 반목하며 재무장 논의를 미국과 일본이 알아서 하도록 방기했다. 

 

p.10~11

20세기 초 조선의 식민지 전략과 일본의 강대국 부상은 천하의 중심이 어디인지에 대한 양국 지배층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재빨리 서양세력의 맹주인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조선은 영국의 적국인 러시아와 가깝게 지냈다. 서양세력은 일본에게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역할을 부여하고 군사력 증강을 도왔는데, 이로써 일본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견제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자 서양세력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해주었다.

 

사실 조선 조정에게도 세상의 중심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1885년 영국군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직접 사태의 전말을 파악해 대처할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청나라가 종주권을 행사해 후견인 노릇을 하도록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영국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1896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 황제는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해 1년 가까이 머물렀다. 이로 인해 조선은 친러국가로 국제사회에 인식되며 영국의 관심대상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서이긴 했지만, 흑룡강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진세력과 전투(나선정벌)를 벌여 승리했던 경험이 있는 조선 조정으로서는 영국과 교감할 수 있는 밑천을 지니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p.19

-> 그럴까? 한국이 신사참배하라고 해도 같을까?

 

1636년 청 태종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한사코 홍타이지에게 절하길 거부해 청나라 조정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으며, 그 결과 청나라는 명나라 정벌을 위한 입관전투에 앞서 반드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병법의 기본은 적을 속이는 기만인데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머리를 숙이고 적을 안심시키는 것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남의 나라에 축하사절로 가서 분위기 망치는 일을 결행한 조선 사신들의 사고방식은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p.23

외교의 큰 목적은 실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왕위계승권과 영토를 두고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전쟁을 벌였으며, 19세기 초에도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극명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둘도 없는 맹방이 되었다.

 

p.27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 조정을 장악한 것은 민족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이성계는 회군의 명분으로 다음과 같은 4불가론을 내세웠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질 것이고, 많은 군사들이 역병을 앓을 것이다.

 

하지만 이 4불가론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요동정벌의 군사적 성공 가능성이나 실패할 경우의 국가적 손실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이다. 일례로, 넷째의 사유를 보면 장마철이라서 활줄이 풀리기 때문에 활을 쏘지 못한다고 했는데, 고려 군대가 활을 쏘지 못하면 명나라 군대도 활을 쏘지 못하니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이 아닌데 회군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권력을 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성계일파는 고려를 뒤엎을 수 있는 병권이 주어지자 즉시 '다시없을 기회'를 이용해 국가와 민족의 염원을 배신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지, 정벌 실패가 두려워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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