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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 - 폭격기의 달이 뜨면

by Diligejy 202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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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북센 폭격기의 달이 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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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봤다기 보단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았다. 

시대의 전반적인 흐름과 인물의 심리, 사건 모두 놓치지 않고 서술한 책이다. 

 

책을 읽고나면 2차대전이라는 사건을 단순히 1939년 발발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이해'하는 대신, 영국인의 입장에서 어땠는지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도 관료주의에 빠져 한치 앞을 나가지 못하기도 했고, 사랑에 빠져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고, 클럽에서 춤을 추다 폭격에 맞아 죽기도 했다. 

 

등화관제 속에서도 보름달을 보고 아름다운 밤이라며 운치를 즐기기도 했고, 짝사랑에 빠져 속을 끙끙앓는 젊은이도 있었다. 이 책은 전쟁이라는 사건에 파묻혀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건져올리고 그 모습을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해낸다.

 

어찌나 생생하던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처칠의 아들 랜돌프는 책을 읽는 내내 혐오를 일으켰고 그 이미지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시대였다면 처칠은 수상은 고사하고, 중앙정치인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슬픔과 유머 속에서 이 책의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건 처칠의 엄청난 영웅적 모습이라기 보다도 처칠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을 통해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처칠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소재였을 뿐이다. 책 속에서 처칠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만, 처칠 혼자서 모든 시스템을 가동했던 건 아니다. 처칠의 비서인 콜빌, 친구이자 비행기생산부 장관이었던 비버브룩, 아내인 클레멘틴, RAF 등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중상을 입고 겨우 겨우 버텨낸 것이니까.

 

실제로 처칠은 "나는 그들에게 용기를 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용기를 하나로 모았을 뿐입니다."라며 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괴벨스를 비롯한 수많은 적들은 의지가 꺾이길 기도하며 런던을 폭격하고 그래도 안되면 영국의 모든 도시를 계속해서 폭격했다. 분명 꺾일거라고 생각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꺾여야 정상일테니까. 하지만 처칠과 영국은 꺾이지 않았고, 적들은 어떻게 해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존경심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이 장면을 굉장히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적들이 기대하는 건 의지가 꺾인 채 나약하게 있는 모습이라는 걸 배울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투지를 갖고 강하게 버틴다면 어떤 적들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언제라고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있었겠냐만, 특히나 코로나 이후 더욱 깊어진 절망의 시대에서 필요한 건 이런 투지와 강건함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역사적인 통찰이라는 걸 배웠다.  

 

 

 

밑줄긋기

p.7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에게는 사건의 추이를 앞질러 예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걸 다 안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1940년 11월 12일 네빌 체임벌린 추도사

 

p.47-48

5월 11일 토요일 아침, 루스벨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영국의 신임 총리도 논의의 대상이었다. 핵심은 이 새롭게 확대된 전쟁에서 처칠이 기선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이 해군장관으로 있는 동안 여러 차례 그와 교신한 적이 있지만, 미국 여론을 자극할까 우려하여 그런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국무회의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회의적이었다.

 

그 자리에는 내무장관 해롤드 L. 이키스도 있었다. 뉴딜정책으로 알려진 루스벨트의 사회사업 및 재정개혁 프로그램을 주도한 인물로 루스벨트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문이었다. "듣자 하니 처칠은 술에 취하면 전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가 말했다. 이키스는 한술 더 떠 처칠을 "너무 늙었다"며 폄하했다. 노동부 장관 프랜시스 퍼킨스에 따르면, 회의가 진행되면서 루스벨트는 처칠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단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신임 총리에 대한 의구심, 특히 그의 주량에 대한 의구심은 회의가 있기 훨씬 전부터 심어진 것이었다. 1940년 2월, 미 국무부 차관 섬너 웰스는 유럽을 순방했다. '웰스 미션'으로 알려진 그의 행차는 베를린, 런던, 로마, 파리 등지에서 지도자들을 만나 유럽의 정치 상황을 가늠하기 위한 일정이었다. 그가 방문했던 사람들 중에는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처칠도 있었다. 웰스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그의 집무실로 안내되었을 때 처칠은 난롯불 앞에 앉아 24인치 시가를 피우며 위스키와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위스키를 많이 들이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처칠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주영 미국대사 조지프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총리를 싫어했고 영국의 전망과 처칠의 성격에 대해 계속 비관적인 보고만 올렸다.

 

언젠가 케네디는 처칠이 "수전증 때문에 술잔을 양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가 되었고 한 번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한 적이 없다"는 체임벌린의 발언을 루스벨트에게 그대로 전했다.

 

사실 케네디는 런던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처칠의 외무장관인 핼리팩스 경의 부인은 케네디가 영국의 생존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며 영국 공군이 곧 궤멸되리라고 말한 그의 예언 때문에 대사를 몹시 싫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기꺼이 그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p.51

처칠은 아무리 사소한 문제도 소홀히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장관들이 보고서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표현과 문법에까지 간섭했다. 그들은 비행장을 말할 때도 '에어로드롬aerodrome'이 아니라 '에어필드airfield'라고 해야 했고 비행기는 '에어로플레인aeroplane'이 아니라 '에어크래프트aircraft'라고 해야 했다. 처칠은 특히 장관들이 작성하는 전언문의 길이를 한 페이지 이내로 간결하게 줄이라고 다그쳤다. "생각을 압축하지 않는 건 게으르기 때문이오."

 

이런 정확하고 까다로운 소통방식 때문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고 그래서 늘 똑같았던 업무의 진부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처칠의 코뮈니케(공식발표)는 매일 수십 개씩 쏟아져 나왔고 언제나 짧고 정확한 영어로 쓰였다. 하루가 끝나기 전에 그가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당장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거나 그의 관심사가 아닌 문제는 실제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문제가 되었다." 다우닝가 10번지의 비서진들이 '브루키Brookie'라고 불렀던 앨런 브룩 장군은 그렇게 썼다. "그가 어떤 일을 끝내기로 작정하면 다른 일들은 모두 중단해야 했다."

 

그런 효과는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며 행정부의 외진 곳까지 비추는 서치라이트 광선 같았다. 그래서 아무리 서열이 낮고 하는 일이 보잘 것 없어도 그 광선이 언제 어떻게 자신에게 떨어져 하고 있는 일을 낱낱이 드러낼지 몰라 늘 노심초사했다." 브룩은 그렇게 말했다.

 

p.53-54

그가 그들에게 가장 주고 싶었던 것은 행동이었다. 그는 그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혔다. 집무실이든 전장이든 어디서나 그는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그가 특히 바랐던 것은 영국이 공세로 전환해 "그 못된 사내"와 직접 전쟁을 벌이는 일이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그렇게 불렀다. 처칠은 독일인들이 "피 흘리고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말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취임한 지 이틀 만에 RAF 폭격기 37대가 독일의 공업화된 루르지역에 위치한 도시 뮌헨글라트바흐를 공격했다. 그 공습으로 4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어이없게도 영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작전과 곧이어 이어진 몇 차례의 공습은 영국 국민들과 히틀러와 특히 미국에게 끝까지 싸우겠다는 영국의 의지를 확고히 보여주기 위한 선언이었다. 처칠은 5월 13일 월요일 하원에서 첫 연설을 할 때도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다짐하기는 했어도 현재 영국이 처한 냉혹한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런 처지를 그는 한 마디로 명확하게 드러냈다. "나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p.74

실제로 위험 부담이 큰 도박이었다. "전반적인 상황 자체가 영국이 직면한 사태만큼이나 어두웠다." 비버브룩의 많은 비서들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페러는 그렇게 썼다.

 

비버브룩은 새로운 임무를 기분 좋게 끌어안았다.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했다는 게 좋았고, 꽉 막힌 관료들의 생활을 어지럽힐 생각을 하니 더욱 의욕이 솟았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새로 맡은 임무를 시작했고, 자신의 신문사에서 발탁한 직원들이 행정업무를 보좌하게 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이레적인 조치이지만 편집자 중 한 명을 개인적인 선전 요원과 홍보 담당자로 고용했다. 그는 항공기 산업의 생태를 단시간 내에 바꾸기 위해 포드 자동차 공장의 총지배인을 비롯하여 자신의 고위 보좌진들로 고위 경영진을 꾸렸다. 그들이 비행기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든 없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들 산업체에서 부서장을 지낸 베테랑이다. 산업은 신학과 같아 한 가지 신앙의 기본을 알면 다른 신앙의 의미도 두루 알 수 있다. 나라면 로마 교황의 직무를 대신할 사람으로 장로교 총회장을 임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비버브룩은 그렇게 말했다.

 

p.89~90

자신감과 대담함이야말로 리더가 직접 선보이고 가르쳐야 할 태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처칠은 모든 장관들에게 강인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렇게 암울한 시기에 고위 관료들 뿐 아니라 정부에 있는 총리의 모든 동료들이 집단 내에서 드높은 사기를 유지해준다면 총리로서는 더없이 감사한 일입니다.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유럽 전체를 자신들의 발밑에 놓으려는 적의 의지를 꺾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우리의 능력을 자신있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처칠은 또한 영국이 히틀러와 평화를 모색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추측도 완전히 단념시키기로 했다. 25명의 각료들을 놓고 연셜하는 자리에서 처칠은 프랑스의 몰락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도 평화 협상을 잠시 고려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순간이나마 협상이나 항복을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 모두가 들고이어나 저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오랜 섬의 역사가 결국 끝나려면, 우리 각자가 땅에 쓰러져 자신의 피에 코를 박고 숨이 끊어질 때나 가능할 것입니다."

 

순간 전율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장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둘러싸고 그의 등을 치면서 동의의 함성을 외쳤다.

 

p.95

처칠이 연설에서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덩케르크 철수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3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상공과 지산의 협공을 뚫고 용케 해협을 건넜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런 사실에는 불길한 교훈도 있었다. 입장을 바꿔 영국군이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것처럼 독일군도 수백 척의 작은 배와 바지선과 쾌속정에 병력을 태워 대규모로 쳐들어온다면 영국군 사령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저지하기가 더 어려워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RAF가] 폭격을 한다 해도 보쉬들(Boasches - 독일군)도 똑같은 방식으로 영국에 병사들을 상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영국 본토방위군 사령관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그렇게 썼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역 덩케르크였다.

 

p.146

처칠은 옆에 있던 의회 사무차관에게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가 좋으면 다 좋아 보인다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미워해서도 안 되지."

 

p.180

지금까지 그는 영국 정벌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가 함락되고 덩케르크 이후 영국군이 혼란에 빠졌을 때 히틀러는 영국이 기회를 보아 전쟁에서 발을 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돼야 하고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영국은 서부전선의 마지막 장애물이었지만, 히틀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련 침공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라는 장애물을 걷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선을 둘로 나눠야 한다. 신조어를 만드는 독일인들의 능력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츠바이프론테크리크(Zweifrontenkrieg - 양면전). 히틀러는 제아무리 처칠이라도 계속 자신에게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인정할 것이라고 믿었다. 히틀러가 보기에 서부전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은 가망이 없소." 히틀러는 육군총참모장 프란츠 할더에게 그렇게 말했다. "전쟁은 우리가 이겼소. 이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하오." 히틀러는 영국이 협상에 응할 것이라 확신하여 그의 군대의 25퍼센트에 해당하는 국방군 40개 사단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처칠은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스웨덴 왕과 바티칸을 포함한 여러 경로를 통해 간접적인 평화 제의를 여러 차례 건네 상대의 의중을 떠봤지만 모두 거부당하거나 묵살되었다. 히틀러는 평화 협정을 위한 어떤 실마리도 놓치기 싫어 루프트바페의 수장 헤르만 괴링에게 런던의 민간 지역은 절대 건들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침략은 고민이 많이 되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타당한 이유가 있어도 장고를 해야 할 신중한 문제였다.

 

p.200-201

비버브룩은 시민들의 참여의식을 높일 또 다른 수단도 발견했는데 이것 역시 간접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처칠처럼 그는 상징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RAF 조종사를 공장으로 보내 자기가 조종할 비행기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게 했다. 그는 이들 조종사들이 단순히 책상물림만 겨우 면한 RAF 장교가 아니라 군복에 달린 날개 기장이 부끄럽지 않은 투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추락한 독일 비행기의 동체를 전국에 전시하도록 지시하여 국민들이 항공기생산부 장관의 노력을 의심하지 않게  했다. 그는 추락한 항공기를 트레일러에 싣고 폭격당한 도시를 순회하도록 하면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서커스'라고 불렀지만 그런 쇼는 항상 좋은 반응을 불렀고 피해를 심하게 입은 지역에서는 특히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 비버브룩은 처칠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추락한 적기를 보고 매우 기뻐했고 서커스는 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농부들과 마을 원로들과 골프장 운영자들이 논밭이나 마을광장이나 골프장에 떨어진 적기를 두고 불평을 했을 때에도 비버브룩은 일부러 늑장을 부려가며 천천히 치웠다. 고칠 수 있는 RAF 전투기를 서둘러 회수했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한 골프장에서 항의가 들어왔을 때에도 그는 독일 비행기를 그대로 두라고 지시했다. "격추된 기계는 라운딩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홍보담당자에게 말했다. "이겨야겠다는 투지를 더욱 불태울 테니까."

 

p.230

처칠의 리더십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꿔 다른 총리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일에도 다들 진지하게 집중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재미있는 특징일 수도 있지만 골칫거리일 수도 있었다. 처칠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p.272~273

전쟁의 트라우마를 진정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처방은 단연 차였다. 차는 전쟁을 견딜 힘을 주었다. 사람들은 공습이 계속되는 중에도, 산산조각이 난 건물에서 시신을 찾다 잠깐 쉴 때도 차를 끓였다. 차는 1,000여 곳의 관측소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영국 상공에 뜬 독일 항공기를 감시하는 3만 명의 관측요원들의 네트워크에도 힘을 불어넣었다. 관측소에는 예외없이 차와 주전자가 갖춰져 있었다. 휴대용 반합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가 끝도 없이 나왔다. 선전 영화에서 차를 끓이는 모습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적 비유로 사용되었다. "차는 런던 생활에서 거의 마법 같은 비중을 획득했다." 전쟁 중 런던을 다룬 한 연구자료는 그렇게 밝혔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 한 잔은 실제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차는 매스옵저베이션 일기 속에서도 강물처럼 흘렀다. "공습 때는 차가 애물단지다." 한 여성 일기기록원은 그렇게 불평했다. "무턱대고 끓여놓기만 하면 다들 마시는 줄 안다." 사람들은 차에 기대어 그날 하루를 버텼다. 처칠은 탄약보다 차가 더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실제로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위스키와 물을 더 좋아했다. 차는 위안이고 역사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국적이었다. 차가 있는 한 영국은 존속했다. 그러나 이제 전쟁과 함께 실시된 엄격한 배급제는 모두가 기대는 가장 평범한 기둥마저 흔들겠다고 위협했다.

 

p.297

처칠처럼 그는 외적인 모습의 힘과 중요성을 이해했다. "누구라도 마음에 품고 있는 근심을 털어놓을 때는 자신감 부족, 사기 저하, 의심, 저항 의지를 꺾어놓는 온갖 음해 행위 같은 재앙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p.333

그날 밤 메리는 한 살 더 먹는다는 생각에 일기를 길게 썼다. 토요일은 "'달콤했던 17살'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쟁 중이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었다. "정말 멋진 한 해였어!" 그녀는 그렇게 썼다. "기억에 특히 남을 한 해였던 것 같다. 세상이 고통에 신음하고 다들 불행하지만 그래도 나는 매우 행복했다. 그래도 아무런 개념 없이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행복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주변 세상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쬐끔 두렵고 불안하고 슬펐던 것 같다. 난 젊음이 좋고 그래서 18살이 되는 게 그리 달갑지 않다. 완전히 치기 어린 짓을 하고 '엉뚱한'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지난해에는 꽤 많이 성장한 것 같다. 그만 하면 됐지 뭐."

p.416

오후 5시 46분 코번트리가 등화관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앞서 오후 5시 18분에 떠오른 달 때문에 사방이 훤했다. 시민들은 암막 블라인드와 커튼을 쳤고 기차역도 모든 등을 껐다. 늘 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등화관제에도 거리는 빛으로 환했다. 달은 눈부셨고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무기 공장의 공구계측원 레너드 대스콤은 일터로 가는 길에 "주택의 지붕들 위로 비추는" 달빛이 아주 화려하다고 생각했다. 달이 밝아 굳이 차의 헤드라이트를 켤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신문도 읽을 정도였다. 정말 멋진 밤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새로 선출된 시장 존 "잭" 모즐리의 딸 루시 모즐리는 회상했다. "바깥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이렇게 환한 11월 밤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모즐리 부부가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았을 때 가족 중 한 살마이 달을 가리키며 "크고 정말 끔찍한 '폭격기의 달'"이라고 한마디 했다.

 

p.420-421

폭탄은 아침 6시 15분까지 떨어졌다. 7시 54분이 되어서야 등화관제가 해제되었다. 맑은 새벽하늘에 달은 여전히 빛났지만 폭격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성당 지붕에서는 아직도 납이 녹아 떨어졌고, 검게 그을린 목재 조각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폐허 더미 위로 무너졌다. 도시 전역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깨진 유리를 밟을 때 나는 바작거리는 신발 소리였다. "유리가 너무 두텁게 쌓여 거리가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것 같습니다." 한 뉴스 리포터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끔찍한 장면들이 목격되었다. 애시워스 박사는 "어린이의 팔을 입에 물고" 거리를 달리는 개를 보았다고 했다. E. A. 콕스라는 남자는 폭탄 분화구 옆에서 머리가 없는 사람의 시체를 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폭발한 기뢰에 까맣게 탄 몸통들이 널려있었다. 임시 영안실엔 시간당 60구에 이르는 속도로 시신들이 들어왔고, 장의사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시신은 시신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40~50퍼센트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의 훼손'으로 분류됐다.

 

상태가 온전한 시신들은 발견한 장소와 짐작이 가는 신원을 기재한 수화물 꼬리표를 달아 여러 층으로 쌓았다. 생존자들은 주변을 다니며 실종된 친구와 친척을 찾아다녔지만, 인근 천연가스 저장 시설에서 터진 폭탄이 시체안치소의 지붕을 찢으면서 그나마도 중단되었다. 비가 내려 수화물 꼬리표도 엉망이 되었다. 시신 하나를 놓고 서너 명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등 신원 확인 과정도 너무 섬뜩하고 성과가 없어 당국은 결국 사람들의 출입을 중단시키고 사망자의 몸에서 수거된 소지품을 통해 신원을 확인했다.

 

영안실 밖에는 표지판이 붙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저희 영안실로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돼 인척들에게 시신을 보여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p.617

그는 청중들에게 "균형감각"을 잃지 말라고 촉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하게 "낙담하거나 당황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p.645

요제프 괴벨스는 처칠의 하원 연설이 "변명"만 가득할 뿐 알맹이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나약하다는 조짐은 안 보인다." 그는 9일 금요일 일기에 그렇게 인정하면서 덧붙였다. "영국의 저항 의지는 여전히 멀쩡하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공격을 계속해서 강대국이라는 저들의 지위를 무색하게 만들어야 한다."

 

괴벨스는 일기에서 처칠에 대한 새삼스러운 존경심을 털어놓았다. "이 사나이에겐 영웅심과 교활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만약 그가 1933년에 정권을 잡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몇 가지 문제가 더 생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할 수 있고 실제로 해결할 것이다. 그래도 여느 때처럼 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 같다."

 

p.684~685

보름달이 떴던 어느 주말 디츨리에서 정보부 장관 더프 쿠퍼의 아내 다이애나 쿠퍼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것이 가장 잘하신 일이었다고 처칠에게 말했다.

 

처칠은 수긍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용기를 준 적이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용기를 하나로 모았을 뿐입니다."

 

런던은 중상을 입었지만 결국 견뎌냈다. 1940년 9월 7일 런던 중심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1941년 5월 11일 일요일 아침 사이 영국 대공습이 끝날 때까지 2만 9,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2만 8,556명이 중상을 입었다.

 

다른 도시들은 피해가 조금 덜했다고 해도 1940년과 1941년 사이에 런던을 비롯한 영국 전역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총 4만 4,652명에 달했고 5만 2,370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중 5,626명은 어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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