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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냉전의 지구사

by Diligejy 2023. 9. 20.

p.20~22

언어에 민감한 한 친구는 이 책에서 선택한 개념과 다루는 소재가 얼마나 시대 의존적인지를 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요컨대 '냉전'과 '제3세계'는 모두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신조어로서 여러 목적과 문화적 배경에서 활용되었으며,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패권적 담론의 일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친구의 말이 맞다. 이 두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 용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는 사용자가 20세기의 마지막 대립에서 어느 편에 속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냉전'이라는 말은 조지 오웰이 1945년에 처음 사용했다. 조지 오웰은 용어를 통해 소련과 미국의 세계관, 신념, 사회 구조뿐 아니라 미국과 소련 간의 선포되지 않은 전쟁 상태를 비판하고자 했다. "원자탄은 피착취 계층과 민중의 저항권을 전부 빼앗아버리는 동시에 이를 보유한 자를 군사적으로 대등하게 해줌으로써 그런 과정을 완수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를 정복할 수 없기에 그들끼리 계속해서 지배해나갈 것이다." 처음에 '냉전'은 이처럼 비판적 용어로 출발했으나 1950년대의 '냉전'은 소련을 상대하는 미국의 전쟁 개념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냉전'은 전쟁 상태가 아닌 공격적 봉쇄를 의미했다. 다른 한편 고르바초프 시대 전까지 소련은 공식적으로 '냉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소련은 자국은 '평화적'이고 오직 '제국주의'만이 공격적이라는 공식 서사를 고수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유럽) 지도자들은 '냉전'을 오직 소련의 위협을 암시할 때에만 사용했다.

 

'제3세계'라는 말은 1950년대 초에 등장했다. ('제3세계'는 프랑스 경제학자 알프레드 소비가 <롭세르바퇴르> 1952년 8월 14일자에 게제한 "Trois Mondes Une Planete"라는 글에서 처음 등장했다 - 옮긴이) 프랑스어 개념이 먼저 등장했고, 영어 개념이 뒤이어 나타났다. 1955년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 이후 처음으로 함께 모인 반둥(Bandung) 회의 이후 '제3세계'는 널리 확산되었다. 수적으로 가장 많지만 가장 대표성을 갖지 못했던 사회 계급인 '제3신분(tiers-etat)'에서 유래한 '제3세계'라는 용어는 지구적 차원의 '민중'을 함축했으며, 식민주의에 예속되고 짓밟혔으나 이제는 가장 큰 영향력을 누릴 다수를 의미했다. 이 용어는 냉전적 용례에서 볼 때 확고한 어떤 입장을 뜻하기도 했다. '제3세계'는 초강대국의 지배 및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안으로서 '제3의 길'(이 말은 토니 블레어가 사용한 '제3의 길'이라는 위선적 표현과 구분해야 한다)을 모색하는 신생국의 노선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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