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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인의 탄생

by Diligejy 2023. 11. 11.

 

 

밑줄긋기

 

p.22~23

현재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한국 문명은 세계 최초로 조직적이고 인공적인 쌀농사에 성공했다. 즉 곡물로 개량된 쌀 그러니까 우리가 쌀이라고 부르는 그 작물은 한반도가 원산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쌀은 단위면적당 인구부양력이 가장 높은 작물이다. 어째서 쌀농사를 경험한 모든 국가, 모든 문명 중에서 가장 척박한 한반도가 처음 쌀농사에 성공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거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가장 척박하기 때문에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쌀농사에 성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는 단연코 전 세계에서 쌀농사를 짓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이다. 바로 그 때문에 쌀농사가 전 세계 퍼졌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이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성공했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쉬운 만큼이나 빠르고 넓게 퍼질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역시 한반도의 척박한 땅이 생산력을 가로막는다. 한국인에게 쌀은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부족한 잘문이었다. 

 

p.25~26

마늘의 주성분인 알리신의 효능은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주된 효능은 인체에 해를 끼치는 세균을 처치하는 것이다. 알리신은 세균의 단백질 구조를 분해한다. 한국인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기 위해, 즉 이런저런 식재료에 붙어있는 각자 고유하면서도 다양한 세균을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알리신을 필요로 한 것으로 보인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먹는 것인데, 그렇게 애써 먹었다가 세균에 감염되어 죽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요리에는 마늘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며, 아주 많이 들어간다. 그것도 주로 반드시 먹을 수밖에 없게끔 대체로 잘게 다진 형태로 들어간다. 한국인의 입맛은 마늘을 맛있다고 느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늘 맛이 느껴지지 않으면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집착한다. 단군신화의 또 다른 식물인 쑥도 마찬가지다. 쑥은 감염을 막는 효과를 갖고 있으며, 특히 음식으로 섭취할 경우 내장의 감염을 저지해 결과적으로 소화를 돕는다. 쑥과 마늘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것들을 먹기 위한 차원에서 중요하다.

 

한국의 신화에서 인간성은 마늘과 쑥에 의해 탄생한다. 한국에서 인간성이란 본질적으로 숭고함과 거리가 멀다.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지옥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한국인이 인정하는 인간성이다. 관념에 존재하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의 과제다. 한국인은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속물적이고 세속적인데, 놀랍게도 한국인의 숭고함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한국인은 중국인, 일본인보다 훨씬 보편적 가치와 원리원칙을 중요히 여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한국 문명의 목표는 '내가 산다'에서 '함께 산다'로, '함께 산다'에서 '남을 살린다'로 진화했다. 

 

p.51

불행한 삶에서 한국인은 어떻게 에너지를 얻는가? 임진왜란 전후에 고추가 들어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식의 색깔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자극은 한국인에게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운 맛은 과학적인 차원에서는 맛이 아니라 고통이다. 입안의 고통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한다. 부정적인 언어 역시 부정적인 현실에 자극을 줄 수 있다. 불만족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거꾸로 저주를 퍼부어 오히려 선명한 자극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 한국의 욕은 강도가 심하고 다양해서 가장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일본인을 놀라게 한다.

 

p.67

현재 티베트인과 위구르인이 받는 고통, 그리고 중국이 한국사와 한국 문화에 대해 드러내는 노골적인 욕망은 중국적 팽창이라는 오랜 역사가 연속되어 나타난 현상이지, 결코 중국 공산당이라는 한 집단의 특징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대만을 흡수해 천하통일을 완수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들만의 태평성대를 위해 한국을 공략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 정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도 당연한 수순이다.

 

p.72~73

소 한 마리는 퍽 잘 사는 농민의 거의 전 재산이었으며, 말은 그보다 더 비쌌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조선의 말, 소, 당나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원래 서양에서라면 이런 녀석들은 풀밭에 풀어놓으면 알아서 먹고 자라며, 기껏 사람이 챙겨줘봐야 건초나 채소 따위를 얻어먹을 뿐이다. 반면 조선의 소는 가을에서 봄까지 주인이 하루에 두 번 이상 직접 끓여다 바치는 쇠죽을 먹었다. 말 역시 말죽을 먹었다. 아예 서울에는 '말죽거리'라는 지명도 있다. 그렇게 먹이지 않으면, 척박한 한반도의 자연이 여름에만 찔끔 내주는 식물만으로는 초식동물 가축이 살 수 없었다. 서양인들에게 한반도의 가축은 오만하고 게으른 응석받이로 여겨졌다. 적당히 내버려두어도 씩씩하게 자라는 고향의 가축을 떠올리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의 가축은 성격도 나빴다. 특히 조랑말의 성질머리에 놀랐는데 '맹수', '악마의 동물'로 기록할 정도였다.

 

성격이 나쁘기로는 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소란 녀석들은 자신이 심한 노동 착취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농사일을 거부하고 파업하기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꼴과 쇠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식투쟁까지 했다고 하며, 휴식과 아첨 그리고 보양식을 챙겨주어야만 기분을 풀었다고 한다. 보양식은 곡물, 소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쇠죽 안에 잘 숨긴 낙지나 뱀(육식을 제공하는 대역죄를 들키면 주인은 더 고생해야 했다), 콩과 식물의 잎과 뿌리 등 다양한 증언이 있다. 워낙 귀한 존재들이었으니 성격이 나빠질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쌀농사는 세계에서 가장 힘들었지만, 가축 키우기는 그보다도 어려웠다.

 

한반도 주민은 농지의 면적과 단위면적당 생산력에서 중국에 수십 배 압도당했지만,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가축의 수에서는 기마민족에 수백 배 짓눌렸다. 전근대 전투에서 기병 하나의 전투력은 보수적으로는 보병 5~15명, 많게는 20명 이상으로 계산된다. 몽골, 거란, 여진과 같은 기마민족의 전투력은 상식적 차원에서는 한반도 주민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한반도는 인구도 식량도 가축도 부족했다. 중국 한족 보병의 머릿수와 호전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살아있는 탈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들은 서로 투쟁하는 동시에 터무니없이 많은 중국의 농민 보병을 상대하며 세련된 전술과 투쟁심을 가다듬었다.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 돌궐처럼 가공할 정복민족이 되거나, 아니면 게르만족처럼 강력한 정복민족을 탄생시켰다.

 

p.75~77

산성은 말 그대로 산세를 따라 산에 지은 성이다. 한국에서는 꼭 첩첩산중이 아니더라도, 경사지에 지은 성을 산성이라고 한다. 어차피 한반도는 산악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인이 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주지와 번화가 대부분은 지리학적으로 산이다. 한반도인은 흙을 조금만 파면 드러나는 암반 지대를 정복할 수 없었다. 한반도는 2/3 이상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강암과 변성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변성암의 대부분은 역시 단단한 편마암으로 구성된다.

 

넓은 평지와 원,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조는 건축의 기본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넓은 평지를 확보하기란 꿈같은 일이며, 있어도 농사에 쓰는 게 먼저다. 한반도에서 건축의 기본을 발휘하기는 매우 힘들다. 물론 발휘하기는 하지만, 규모가 작아진다. 그래서 궁궐도 한옥도 좁다. 돌은 너무 단단하고 무거워 쪼개고 옮기고 연마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노동력을 잡아먹는다. 목재도 부족하다. 개량종 식수가 도입되기 전 한반도의 나무는 변화가 심한 나무와 척박한 토양으로 더디게 자라는 데다가 왠만해선 굵고 곧게 자라지 않으며 지나치게 단단하다. 더욱이 단단한 암반 지대는 나무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뿌리를 뻗어 나가는 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한다. 그래서 한국적 자연을 상징하는 풍경 중 하나가 화강암에 악착같이 뿌리를 박은 채 구불구불 자란 소나무다. 보기에는 아름답다만 먹고살기 좋은 나라의 풍경은 못 된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한국을 방문한 중국 사신과 서양인은 서민이 사는 집을 보고 각각 충격을 받았다. 서양인에게 초가집은 너무 초라해서 가축의 우리처럼 보였다. 거기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고 놀란 것이다. 중국 사신은 초가지붕에 놀랐다. 중국의 지배 엘리트들이 보기에 고려와 조선의 문명이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은 수많은 사료로 확인된다. 그런데 기원전 춘추전국시대 중국 시골에나 있었을 법한 저 지붕은 무엇이란 말인가. 중국인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공존하는 모습을 극단적인 양극화로 해석했다. '이 나라의 백성은 너무 가난하구나.' 가난이 상대적인 거라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초가지붕에 먹거리가 되는 덩굴식물을 키워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건축 자재가 부족했다. 

 

기와는 불에 구워야 완성된다. 이 작업엔 나무 땔감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는 산악지대지만 나무가 부족했다. 목재의 질도 문제지만 혹독한 겨울에 많은 뗄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붕의 품질보다는 얼어 죽지 않는 게 먼저다.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조선 시대에 궁궐을 짓는다고 나라가 휘청거렸는지 알 수 있다. 같은 크기의 건축물과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의 수십 배, 일본의 수 배에 해당하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건축에는 목재와 석재가 있는 산속까지 올라갔다가 확보한 자재를 가지고 내려오는 비용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p.80~81

고구려가 당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를 무찌른 안시성 전투는 한국인에게 아주 유명하다. 그런데 안시성은 원래 당나라의 성이다. 고구려는 안시성을 빼앗은 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화강암을 옮겨 한반도식 성으로 개조했다. 당시 중국의 성은 벽돌을 규칙적인 패턴으로 쌓아 올렸는데, 이 벽돌은 진흙을 구워 제작됐다. 안시성 공방전에서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이끈 주력군의 공성 장비와 공성 기술은 중국 성을 기준으로 수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안시성 성벽의 방어력과 수비군의 인내력에 좌절하고 비참한 패배를 하고 말았다. 물론 안시성 개조는 고구려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었겠으나, 안시성이 함락당하는 사태보다는 적은 비용이었다.

 

p.85~87

행복을 나누면 즐겁다. 고통을 나누면 단결한다. 고통은 행복보다 선명한 자극이어서 한결 날카로운 자국을 새긴다. 역사적 습관이란 것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다. 단결도 반복되면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현대에도 산성을 구축해 사용했다. 미군과 연합군을 이뤄 참전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중대전술기지(Company Tactical Base)'라는 특이한 전술 교리를 창안했다. 중대전술기지는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수립한 교리다. 이를 실전에서 증명한 것은 한국군이었다. 이 기지는 중대 규모를 기준으로 고안되었는데, 정글에 숨은 월맹 베트콩을 찾아다니며 물리치는 정석적인 방식을 거꾸로 뒤집는 발상이었다. 오히려 적군이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곤란한 지점에 방어진지를 세우고 그 안에 고립된다. 공격은 하지 않고, 적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린다.

 

중대전술기지는 미군 입장에서 황당한 물건이었다. 성벽이 철조망과 참호로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전근대 성의 구조였기 때문이다. 중대전술기지의 철조망과 참호는 일종의 방벽(Wall)이며, 성곽의 역할을 한다. 미군은 분노하고 반대했다. 한국군이 시대 역행적인 성을 짓고 그 안에 안전하게 숨어 있으려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터뷰한 참전용사들의 즈언에 따르면 전술기지를 구축하는 한국군 병사들의 머리 위로 기관총탄이 난사되곤 했다. 헬기나 전술 차량을 타고 지나가던 미군이 비난의 의미로 경고사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곧 눈앞에 지나가는 한국군 장병에게 선물로 조니워커 위스키를 병째 던져주게 된다.

 

중대전술기지는 '최대한 많이 죽이고, 최대한 많이 살아남자'는 한반도의 전통적인 전술 목표를 이상적으로 발휘했다. 미군과 베트콩은 한국군의 전투력과 중대전술기지의 방어력에 경악했다. 이 싸움법은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짜빈동 전투는 대표적인 중대전술기지 전투 중 하나다. 이 전투에서 294명으로 구성된 한국 해병대 1개 중대는 불과 15명의 전사자만 잃고 2~3천 명의 적을 물리쳤다. 짜빈동 전투 이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한국군과 만나면 일단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대전술기지 운용은 현대전의 기본 교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적지에 원정 간 미군이 선호하는 전술 중 하나다. 그런데 오늘날 원조 한국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외국군은 없다. 중대 방어 전술과 같은 한반도식 산성 방어에는 퇴로가 없다. 승리 가능성은 높다. 모두 살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실패하면 모두가 죽는다. 방어시설이 통째로 적에게 넘어가는 사태는 몰살에 뒤따라오는 덤이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수성에 능했다는 점 때문에 스스로 계산적이기는 하지만 과감하지는 않은 민족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고립을 자처한 후 지켜낸다는 것은 참으로 처절한 싸움이며, 알 수 없는 결과에 운명을 밀어넣는 도발적인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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