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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2
소련이 과학과 기술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을 감안한다면, 트루츠코 같은 소련의 과학도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반도체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한 미국의 결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만큼 세계 어느 나라건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는 실리콘밸리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표준을 만들고 혁신을 해 나가는 속도에서 다른 나라들은, 심지어 미국의 적국이라 해도 따라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p.110~111
다른 나라의 발달한 기술을 그저 베끼라는 이 '제안'을 들은 소련 과학자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미국의 화학자나 물리학자에게 뒤처지지 않는 과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보낸 소련 교환학생들은 윌리엄 쇼클리의 수업에서 별로 배울 게 없다고 보고했다. 모스크바에서 배울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소련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있었다. 잭 킬비가 집적회로 발명으로 2000년에 결국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때(당시 집적회로의 공동 발명자인 밥 노이스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러시아의 과학자 조레스 알페로프가 공동 수상했다. 반도체 소자로 빛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기초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1957년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고, 1961년에 세계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배출하였으며, 1962년 오소킨이 집적회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으니, 소련이 과학 강대국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했다. 심지어 CIA 마저도 소련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쇼킨의 "베끼시오" 전략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었다. 핵무기 제조에서는 모방 전략이 통했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이 끝날 때까지 고작 수만 개의 핵탄두를 만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반도체, 그 외 다른 반도체 회사는 이미 반도체 대량 생산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생산 규모를 끌어올리는 핵심 요소는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모리스 창이나 앤디 그로브 같은 미국의 칩 제조업자들이 1960년대 내내 집중해 온 도전 과제였다. 소련 쪽과 달리 미국의 칩 제조사들은 더 나은 광학 기술, 화학 물질, 순도 높게 정제된 물질, 혹은 다른 생산 장비를 갖춘 타 회사의 전문성에 의존할 수 있었다. 미국 기업의 도움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 페어차일드나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독일, 프랑스, 혹은 영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 나라들도 각자 나름대로 발전된 산업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석탄과 철강을 대량으로 생산했지만 거의 모든 선진 제조업에서는 뒤처져 있었다. 소련의 강점은 물량이었지 품질이나 제품의 순도가 아니었는데, 품질과 순도야말로 반도체의 대량 생산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게다가 서방의 연합국들은 반도체 소자를 비롯한 고급 기술이 공산권 국가로 이전되는 것을 막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조직이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ordinating Committee for Multilateral Export Controls)인 COCOM이었다. 소련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그곳을 통해 COCOM을 우회하곤 했지만, 이런 경로로는 밀반입 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분명했다. 결국 소련의 반도체 설비는 상대적으로 덜 섬세한 장비와 덜 순수한 재료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정상 작동하는 칩의 생산량이 적다는 것을 의미했다.
p.113
소련의 지도자들은 어째서 "베끼는" 전략이 그들을 뒤처지게 만들고 있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소련 반도체 산업은 모두 일종의 방위 산업체처럼 작동헀다. 비밀주의와 상명하복이 만연했고, 군사 시스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명령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방 공정은 소킨 장관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다고, 그의 부하 직원 중 한 사람이 회고했다. 소련 반도체 산업은 베끼기 전략에 몰두한 나머지 몇몇 반도체 공작 기계는 미국 설계를 베끼기 편하도록 미터법 대신 인치법을 사용했다. 소련이 다른 부문에서 미터법을 쓰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베끼기" 전략 탓에 트랜지스터 기술에서 미국에 몇 년 뒤처진 채 시작했던 소련은 결코 미국을 따라잡지 못했다.
p.120
모리타의 "라이센스" 전략은 소련의 장관 쇼킨이 구사했던 "베끼기" 전략과 완전히 정반대에 서 있었다. 일본에는 인정사정없이 제조 효율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명성이 높은 회사가 많았다. 소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그 시장을 노리는 전략을 통해 앞서 나갔다. 모리타의 꿈은 실리콘밸리의 최신 회로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소비자 기기를 내놓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계획은 소비자에게 무슨 제품을 원하냐고 묻는 대신 새로운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이끄는 것이다. 대중은 무엇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우리는 안다."
p.142
창과 셰퍼드의 첫 대만 방문은 1968년의 일로, 그들은 새로운 반도체 조립 시설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만 방문은 최악이었다. 셰퍼드는 자신이 주문한 스테이크에 뿌려진 간장 소스를 보고 격노했다. 텍사스에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스테이크를 먹지 않았던 것이다. 수완 좋고 박식한 인물인 동시에 실권자이기도 했던 대만 경제부 장관 리궈딩과의 첫 만남 역시, 장관이 지식재산권을 "제국주의자들이 저개발국을 괴롭히기 위한 수단"쯤으로 선포하면서 험악한 분위기로 끝나고 말았다.
셰퍼드를 미 제국의 하수인으로 본 리궈딩의 관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을 자신의 나라에서 쫓아내고자 했던 북베트남인들과 달리 리궈딩은 결국 대만이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수록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만과 미국은 1955년 이래 조약 동맹국이었지만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충격이 여전한 가운데, 대만의 안보를 지켜주겠다는 미국의 약속은 허술해 보였다. 대한민국부터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반공주의 정권은 미국의 베트남 철군이 자국에서 되풀이되지 않게 보장해 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또 경제적 불만이 커지면 국민 중 일부가 공산주의에 경도될 수 있으므로 일자리와 투자를 얻는 것도 중요했다. 대만의 두 가지 문제를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음을 리궈딩 장관은 깨달았다.
p.144~145
처음에는 마크 셰퍼드를 제국주의자라고 비난했지만 리궈딩 장관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관계를 잘 맺으면 대만 경제가 환골탈태하며,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세우고 기술 노하우도 전수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편 전자제품 조립은 대만이 보다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른 투자를 촉진할 것이었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두고 미국인의 태도가 점점 회의적으로 바뀌고 있으니 대만으로서는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다변화할 방안이 절실히 필요했다. 대만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는 미국인이라 해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서려 할 것이다. 이 섬에 더 많은 반도체 공장이 세워질수록, 미국과의 경제적 유대가 더 탄탄해질수록 대만은 더욱 안전한 섬이 될 것이다. 1968년 7월,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대만 정부의 관계는 한층 부드러워졌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이사회는 대만에 새로운 설비를 건설하는 안을 가결시켰다. 1969년 8월 그 공장에서 첫 번째 기기가 조립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10억 번째 제품이 출하되었다.
반도체 공급망이 경제 성장과 정치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나라는 대만뿐이 아니었다. 1973년,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에서 싱가포르의 "실업을 일소하기 위해" 수출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의 협조 아래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내셔널세미컨덕터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에 조립 설비를 건설했다. 다른 칩 제조사도 그 뒤를 따랐다. 1970년대 말, 미국의 반도체 기업은 해외에서 수만 명을 고용헀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칩 제조사들과 아시아의 독재자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시아 반도체 조립 설비를 채우고 있던 화교 노동자들 사이에 새로운 국제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반도체는 아시아 지역에 있는 미국 동반국들의 경제와 정치를 재구성했다. 정치적 극단주의의 온상이었던 도시는 근면한 조립 라인 노동자들이 완전히 바꿔 놓았다. 실업 상태였거나 보조금에 의존하는 농부였던 이들이 행복하게도 보다 나은 월급을 받으며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초, 전자 산업은 싱가포르의 국민총생산 중 7퍼센트, 제조업 일자리의 4분의 1을 담당했다. 전자 제품 생산을 놓고 보면 60퍼센트가 반도체 소자였고, 나머지도 반도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제품이었다.
p.150
인텔은 D램 칩 시장을 지배할 계획이었다. 메모리 칩은 기기에 맞춰 특화할 필요가 없으므로 같은 설계를 수많은 종류의 기기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메모리 칩을 큰 단위로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반면에 "기억"이 아닌 "계산computing"을 하도록 되어 있는 다른 유형의 칩은 모든 기기마다 각기 다른 연산 과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장비에 맞춰 특별히 설계되어야 한다. 예컨대 계산기는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므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다른 종류의 논리 회로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 개별화된 수요는 비용 증가로 이어졌다. 그래서 인텔은 메모리 칩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대량 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p.158~159
마셜 같은 전략가들은 소련의 양적 우위에 맞서는 유일한 답은 질적으로 더 우수한 무기를 생산하는 것뿐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한가? 마셜은 일찌감치 1972년부터 미국이 컴퓨터에서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우위"를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적어두었다. "좋은 전략은 우위를 개발하고 전쟁의 개념을 전환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셜은 거의 완벽한 정확도로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병기를 그려 보면서 미사일에 "신속한 정보 수집", "정교한 명령과 제어" 및 "종말 유도"를 구상했다. 만약 미래의 전쟁이 정확도 싸움이 된다면 소련은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셜은 여기에 승부를 걸었다.
페리는 연산력의 소형화 덕분에 마셜의 미래 전쟁 구상이 머잖아 실현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혁신에 친숙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만든 회사의 기기에 인텔 칩을 사용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에 사용된 수많은 무기 체계는 진공관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최신형 휴대용 계산기에 사용되는 칩은 구형 스패로 3 미사일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연산력을 지니고 있었다. 페리가 볼 때 미국은 이런 칩을 미사일에 탑재함으로써 소련을 훌쩍 앞질러서 승부를 내야 했다.
페리의 추론에 따르면 유도 미사일은 단지 소련의 양적 우위를 "상쇄"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었다. 유도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은 엄청난 비용의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페리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펜타곤이 배치할 예정인 3000기의 순항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모스크바는 5년에서 10년, 300억에서 500억 달러가 필요할 터였다.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모든 미사일이 소련을 향해 발사된다면 소련은 날아오는 미사일 중 고작 절반가량만 요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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