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7
우리는 기계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진보'는 지속되어야 하고 지식은 절대로 억제되어선 안 된다는 관념에 감염되어 있다. 우리는 말로는 기계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 사람이 기계를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계의 발달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지식에 대한 공격이며 곧 일종의 불경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p.17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문학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문학 창작은 창작자의 내면과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때 내가 소설을 여전히 내 일로 여길 수 있을까? 창작자의 내면과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문학에 헌신하기는 어렵다.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문학에 가치를 둔다면,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경지로 문학을 끌어올린다면, 그런 때 내가 소설을 여전히 내 일로 여길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헌신하는 것은 괴롭다. 둘 중 어떤 상황에서건 나는 문학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문학으로부터 소외된다.
아니, 차라리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인간 소설가들과 문학의 관계를 그렇게 아예 끊어준다면 나는 장엄한 운명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될 수 있겠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복잡한 '변질'이 일어날 것 같다.
p.49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바둑을 더 잘 둔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동차가 사람보다 빨리 달리지만 육상에는 여전히 여러 달리기 종목이 있지 않은가? 달리기 선수들의 수입이나 자부심이 자동차 때문에 타격을 입었는가?
그렇게 묻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도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동물이 많이 있었다.
둘째, 많은 사람이 '인간다움'은 신체 능력보다 사고 능력과 더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라는 종의 장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셋째, 자동차가 사람이 달리는 방식을 바꾸지는 않았다.
넷째, 사람이 자동차에게 달리는 법을 배우지는 않는다.
p.58
그때까지 정석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알파고 때문에 그 틀이 깨졌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어요. '바둑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정답이 정답이 아니게 됐다, 이제 마음대로 둬도 된다'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다시 '알파고 정석'이 생겼어요. 그때 자유라는 건 틀이 무너질 때 생기는 잠깐의 해방이었던 거죠. 지금은, 저는 되게 슬퍼요. 지금 기사들이나 학생들이 두는 바둑은 저희가 배운 바둑이 아니에요. 전혀 다른 바둑이에요. 예전에는 정석이 있어도 그걸 비틀 수가 있었어요. 그러면 그때부터 또 난리가 나죠. 살짝 비튼 것에 대한 연구가 막 시작되고, 또 다른 변화가 생겨요. 약간 개성 있는 기사가 정석을 비틀면 거기서 변화들이 조금씩 생기고, 정석들이 조금씩 변화했거든요. 예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정석은 이렇게 여러 기사가 많은 걸 경험하고 연구하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비틀 수가 없어요. AI가 정해주니까. AI를 사용하면 이길 확률이 바로 뜨니까 '이 수는 아웃' 이렇게 돼요. 전보다 더 견고한 성에 답답하게 갇혀버린 느낌이에요. 바둑이 싫어진 건 아니고, 바둑을 좀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뺏겨버린 느낌.
p.60
지금 바둑을 공부하는 세대는 AI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 것 같아요. 반대로 시니어 사범님들은 여전히 AI 수법을 거부하고 해설할 때도 AI 안 보시죠. 그런데 저희 세대는 그럴 수가 없어요. 제 세대는 폭격을 제대로 맞았고, 가장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바둑을 다르게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사랑했던 바둑은 이제 떠나보내 줘야 할 거 같아요.
p.62
은퇴하는 순간까지 "바둑은 나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전부일 것"이라고 말했던 그가, 그러나 이제 직업으로서의 프로기사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는 프로기사들의 상금 수입이 줄어서가 아니다. 긍지와 관련된 문제다. 사람은 의미 있는 일을 자신이 잘해내고 있다고 믿을 때 긍지를 얻는다. 나는 다른 직업에서도 인공지능으로 인해 긍지를 잃을 사람이 많아지리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서 어떤 일의 의미와 인간의 유능함을 납작하게 짓눌러 버릴 것이다.
그 영역에서 문학은 예외일까?
p.75
바둑 AI 프로그램을 사용하다 보면 같은 상황에서 추천수가 바뀌는 현상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시간을 들여 계산을 오래 하다가 판단을 번복하는 것이다. 프로기사들이 비싼 그래픽카드를 사는 이유는 바로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인공지능이 정답을 안다면 일어나지 않을 현상이다.
한편 인공지능의 수법이 과연 인간에게도 좋은 수법인지 따져볼 수도 있다. 사람이 자동차를 흉내 낸다고 자동차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 게 아니고 비행기를 흉내 낸다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사람의 다리와 자동차 바퀴는 구조가 다르고, 사람이 팔을 좌우로 뻗는다 해서 몸을 띄울 정도로 충분한 양력을 받을 수 있지도 않다. 인간의 뇌도 근본적으로 인공지능과 다르지 않은가? 인공지능의 수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 수를 따라 두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공항에서 비행기가 착륙하는 모습을 흉내 내면 서구인들의 비행기가 자신들을 찾아올 거라 믿는 남태평양 원주민의 화물 신앙과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p.91-92
앞서 살펴보았듯 천재형 기사와 노력형 기사의 실력 차이가 가장 벌어지는 곳이 초반 포석이었다. 노력형 기사들이 가장 좌절하는 대목도 초반 포석이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초반 포석의 규칙을 뒤엎었다. 그리고 개인 가정교사가 되어주었다.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내심이 좋은 선생님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창피를 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두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두면요? 이렇게 두면요?' 이런 질문을 하루에 수천 번을 던져도 지치지 않고 충실하게 답해주었다. 인간 선생님처럼 모호한 단어로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바둑 AI 프로그램은 노력형 기사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천재형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졌다. 최대 피해자로 꼽히는 사람이 세계 1인자였던 커제 9단이다. 그는 알파고가 등장하기 전 포석 감각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기사였다.
커제는 2021년 중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과거에는) 수준 높은 기사가 50수 전에 포석으로 일반 기사와 격차를 벌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인공지능이 있으니 모든 프로기사의 포석이 완벽해지고 있다"라며 "암기력이 좋은 젊은 기사들은 초반 50수까지 인공지능처럼 정확한 포석을 두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모두 인공지능을 따라 배우고 두다 보니 계속 봤던 포석들이 나오고 또 나온다"라며 "시각적으로 매우 피곤하고 고통스럽다"라고도 말했다.
p.101-103
바둑계가 '민주화'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사회학에서 민주화는 어떤 분야에서 민주주의 원리들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둑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 하는 문제로 차별을 받는다면 그런 현실은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일으킨 차별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특정 지역 출신, 혹은 전문가가 독점하던 정보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정보 활용의 민주화' 혹은 '지식의 민주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둑계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이 빼어난 포석 감각을 지녔는지 여부로 차별받는 현실도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여기서 깊게 파고들 생각이 없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다. 첫째, 바둑계의 어떤 이들은 인공지능이 가져온 변화를 환영했다. 둘째, 그들은 그 변화를 무척 긍정적인 것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했다. '민주화'라고 표현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다른 업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한다. 인공지능과 같은 강력한 신기술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흔든다. 만약 그것이 기득권의 힘을 약화시키고 주변부에 있던 그룹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 새로운 기술은 적어도 특정 집단으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인쇄술은 성서 해석을 독점하던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켰고, 지식인 집단의 규모와 힘을 키우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지식인 중에서 인쇄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뉴스를 독점하던 종이 신문과 지상파 방송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인터넷 언론과 '대안 매체' 종사자들, 블로거들은 그런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여기에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어떤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려는 사람들이 다 함께, 한목소리로 인공지능을 거부하는 일은 아마도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 업계에 일단 인공지능이 도입되어 영향을 미친 뒤에는 말이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감성을 코끼리에, 이성을 기수에 비유한다. 이성은 자신이 감성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이트는 이성을 감성의 노예라기보다는 변호사라고 설명한다. 감성이 어떤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나면 이성은 그런 결정의 근거가 될 적절한 논리를 찾는다.
한 업계의 종사자와 지망생은 인공지능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인공지능을 거부한다고 의견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공지능이 도입되면, 그로 인해 수혜를 입는 그룹이 생긴다. 그 그룹 구성원은 인공지능이 가져온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람직한 일로 볼 것이다. 그 변화가 '옳은 방향'이라고 믿을 것이다.
p.105-106
나는 일단 인공지능이 어떤 업계에 도입되면, 그 업계 내부에서 인공지능을 옹호하는 집단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문학계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업계 내부에 인공지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이후의 갈등 구도는 더 이상 '인공지능 대 인간'이 아니다. 3장에서 말한 대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전문가 대 다른 인공지능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는 다른 많은 전문가 대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는 구세대 전문가'의 구도가 펼쳐진다.
나는 2023년에 영화계에서 시나리오 작가들과 배우들이 뭉칠 수 있었던 이유도, 아직 인공지능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재 영화계는 평평하지 않다. 상업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는 데에는 외모가 빼어난 젊은 배우가 그렇지 못한 배우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딥페이크 기술은 외모가 빼어나지는 않아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 나이가 많은 배우에게 유용할 수 있다. 그런 배우들에게 인공지능은 일자리를 뺏는 재앙이 아니다. 외모라는 불공평한 장애물을 넘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해주는 은혜로운 도구다. 그들에게 '평평해짐'은 곧 '공평해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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