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 1492년- 콜럼버스의 대항해
25만명 인구 20년만에 1만여명
19C에 노예무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4000만명에 이르는 아프리카인이 노예선에 실렸고
그 중 수백만명이 항해 도중 목숨을 잃었다.
1519년(중종14) 에스파냐 탐험대장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관장하는 총독 벨라스케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유카탄 반도에 있던 아스테카 왕국을 공격했다. 500만명의 인구를 거느린 군주 몬테수마 2세는 수도 테노치너플란에서 불과 5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온 코르테스에게 포로로 잡혔다.
p.13
1532년(중종27) 또 다른 탐험대장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18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들어갔다. 황제 아타우알파는 수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피사로를 맞았다. 아타우알파에게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유럽인을 접견하는 자리였지만, 피사로에게는 제국을 통째로 삼킬수 있는 일생일대긔 기회였다. 에스파냐 병사들이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든 채 숨어있는 피사로를 수행하던 가톨릭 신부가 통역과 함께 아타우알파에게 다가가 성경을 건넸다. 높은 가마를 타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이를 잠시 살펴보다 땅바닥에 내던졌다. "저 이교도를 없애버려요!" 하는 신부의 외침과 함께 180여명의 병사는 달려나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2000여명의 잉카전사가 죽고 아타우알파는 포로가 되었다.
p.14 끓어오르는 유럽대륙
1545년(인종1년) 남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 포토시(지금의 볼리비아)에서 연간 생산량 16톤에 달하는 은광이 발견되었다. 당시 주요 화폐로 쓰이던 은이 쏟아지자 물가가 폭등하는 "가격혁명"이 일어나 유럽경제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경제만이 아니었다. 정치와 종교, 문학 예술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혁명'이 일어나 유럽을 후끈 달구고 있었다.
p.16
16세기 유럽사회의 중세 탈피는 경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 15세기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르네상스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상했다. 1511년(중종6)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가 우신예찬을 1516년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발표해 봉건적 폐습과 성직자들의 횡포를 고발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인류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혁명적인 가설을 내놓았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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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 최대의 사건인 종교개혁의 신호탄은 1517년 터졌다. 교황 레오10세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건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량의 면벌부를 발행하자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이 반박문은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루터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새로운 크리스트교로 지향하며 가톨릭교회에 도전했다.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자)' 이름이 붙은 신교세력과 구교(가톨릭교회) 세력은 이후 1세기에 걸쳐 사활을 건 싸움을 벌여나갔다.
p.16~17
최초의 충돌은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일어났다. 독일을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파 신교를 지지하는 제후들과 내전을 벌였다. 1555년(명종10)아우크스부르크화의로 내전이 막을 내리면서 제후들은 루터파와 가톨릭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얻었다. 1534년 영국왕 헨리8세는 색다른 방식으로 가톨릭교회와 결별했다. 교황이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영국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시켜 자신에게 직속한 것이다. 이러한 '영국 국교회(성공회)'체제는 1559년(명종 14)엘리자베스1세가 제정한 통일법에 따라 확립되었다.
p.17
16세기 종교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장 칼뱅이 주창한 강력한 종교개혁이었다. 1542년(중종37)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칼뱅은 신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예정받은 자의 특징은 직업에 충실하고 근면 성실한 것이라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이는 상공업자의 생산과 저축을 장려하는 것으로 봉건 귀족의 극심한 탄압에 부딪혔다. 1562년(명종17) 프랑스 칼뱅파 신교도인 위그노들이 가혹한 신교탄압에 반발해 봉기하자 이는 가톨릭을 지지하는 귀족과 칼뱅주의를 지지하는 시민, 상공업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 확산되었다. 1598년(선조31) 앙리 4세는 본인이 카톨릭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해 이 전쟁을 끝냈다.
p.17
종교개혁은 신앙의 문제를 넘어 유럽의 정치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는 자타공인의 가톨릭 국가였다. 그런데 1581년(선조14)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가 신교의 자유를 내세워 독립을 선언했다. 식민지에서 들어온 상품을 유럽전역에 내다파는 무역 거점 네덜란드의 독립은 에스파냐에 큰 타격이었다. 에스파냐는 네덜란드와 이를 돕는 영국을 응징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보냈으나, 영국 해군에게 패하고 말았다.(1588)
에스파냐의 시대였던 16세기는 그렇게 에스파냐의 몰락을 지켜보며 막을 내리고 있었다.
p.19 넓어지는 이슬람세계
'지중해의 해결사'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 이슬람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티무르 제국은 16세기 들어서자마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흥 사파비 왕조와 우즈베크족이었다. 티무르의 후손 아부르는 무굴제국을 세우고 이슬람의 영역을 인도 북부로 넓혔다(1526) 이슬람세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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