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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장자 나를 깨우다(1)

by Diligejy 2015. 12. 14.

p.17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온다. 낯선 것과의 마주침을 통해 잠자고 있던 영혼의 감각이 깨어나고, 깨어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그러한 돌아봄은 영혼의 변화로 인도된다. 영혼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인격과 관점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며, 그 결과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인격과 관점의 변화는 종종 '깨달음'이라는 언어로 표현되고, 깨달음은 우리를 자유로운 정신 혹은 그러한 삶으로 이끈다.

 

p.43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라는 말은 우리의 자유로운 정신을 압박하는 모든 거짓된 이념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권위의 무게로부터, 안락함의 위안으로부터, 익숙함의 편리함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신이 특정 시스템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 시스템을 모든 것에 적용하려는 환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신의 성심(成心)을 통해서만 모든 타자와 관계하려는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깨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꿈쏙에 있다는 사실부터 자각해야 한다. 꿈을 꿈으로 파악하는 자발적 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대붕이 북명에서 남명으로 가는 비상을 준비하듯이, 우리 또한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진입할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p.48

최고 경지의 자유인은 '나'에 대한 의식과 집착에서 벗어났으므로, '無己'(무기)라 할 수 있고,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 주고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無功'(무공)이라 할 수 있으며,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지 않으므로 '無名'(무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의 삶'을 사는 사람의 현실적 모습들이다.

 

p.103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 머물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머물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렇게 처신하기도 어렵지만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유위에 불과하고, 유위의 행위는 결국 화를 불러오게 된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란, 이 둘을 초월하는 도의 자리를 가리킨다. 도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화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말라. 어느 경우든 내 삶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길, 그 길이 진정한 쓸모로 가는 길임을 명심하라.

 

p.104~105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그대가 하는 말은 아무 쓸모가 없네."

장자가 대답했다.

"쓸모없음을 안 이후에 비로소 쓸모 있음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네.

  천지는 넓고도 크지만 사람이 다닐 때 필요한 부분은 단지 발 넓이 정도 뿐이지. 그렇다고 발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깊이 파 황천에 이르게 한다면 사람들이 여전히 그 부분을 이용할 수 있을까?"

혜자가 말했다.

"이용할 수 없겠지"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이 곧 쓸모 있음이 된다는 게 분명하군."

(외물)

 

p.127

애태타의 매력은 결국 '비움'에서 나온 것이다. 애태타는 자기를 비우는 데 성공했고, 그 비워진 공간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애태타는 고요한 물과 같았다. 흐르는 물은 제 흘러가기 바빠 남을 비춰주거나 돌아볼 여유가 없다. 비춘다 해도 왜곡된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고요한 물은 늘 남을 비춰주고 돌아본다.

 

p.146

현상적으로 보면 사물들 사이에는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모양, 색깔, 크기, 성격, 지위, 능력, 수명, 지적 수준 등 모든 면에서 제각각이다. 그러나 만물의 본원 즉 도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그 많은 차이들이 홀연히 사라진다. 사물들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놓여 있고, 또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차이라는 것들도 지극히 사소할 뿐이다. 9만 리 상공으로 비상한 대붕이 내려다본 지상의 사물들이 그저 가물가물한 아지랑이 같았듯이 말이다.

 

p.149

마음에서 지식을 걷어내고 나면, 대상은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과 어울림의 대상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 대상은 나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행동과 마음이 스며들 수 있는 무대이고 어울릴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p.151~152

장자의 글은 온통 상지오가 은유로 가득하다. 이번 '포정해우'이야기에서는 주요 은유의 대상이 소와 칼이다. '소'가 삶의 덩어리 즉 인생을 상징한다면, '칼'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 자신 또는 나의 마음을 상징한다.

 

젊은 시절, 부모의 우산 밖으로 나와 처음 대면한 인생은 마치 '거대한 소'처럼 우리를 압도하면서 거칠게 다가왔다. 우리의 손에는 막 시퍼렇게 갈아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지만, 눈앞의 소가 너무도 거대하고 위압적이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거대한 소에 비해 나의 칼은 초라해 보인다. 온갖 시비와 다툼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몸은 터럭만큼도 움직일 여지를 찾을 수 없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는 일단 찌르고 본다. 찌르고 째고 자르고 가르며 이리저리 칼을 휘두른다. 때로는 소의 부드러운 부분을 만나 칼이 쉽게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칼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억센 힘줄을 만나거나 뼈마디에 부딪히면 칼만 다치고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채 쩔쩔매기 일쑤다.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며, 더러는 심각하게 포기를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몇몇 젊은이들은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일찌감치 칼을 내던져버린다.

 

그러나 대부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선인들이 남긴 지혜를 참조해가며 점차 소의 '결'을 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거대한 덩어리로만 보이던 소가 어느 순간 뼈마디, 힘줄, 고깃결 등으로 구분되면서 그사이로 작은 틈이 드러난다. 이제는 아무데나 찌르거나 함부로 베지 않는다. 소의 몸 덩어리 사이사이 드러나는 '길'(틈)을 찾아 조심스레 칼을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그 '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인다. 그러면 살과 뼈가 툭툭 분리되면서 고깃덩어리가 떨어져 나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칼놀림은 조금씩 더 여유로워진다. 두께가 얇을수록 칼의 움직임도 자유롭다. 어느새 칼은 춤추듯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신바람이 나고 흥이 난다. 소를 해체하는 일은 더 이상 힘들고 고된 일이 아니라 하나의 즐거운 놀이가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항상 고비가 있느 법, 소의 뼈와 살이 복잡하게 뒤엉킨 곳에 이르면 칼의 움직임도 지극히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 나아간다. 호흡마저 멈추고 동작은 느려지고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뼈와 살이 엉킨 곳이 툭 하고 떨어져 나간다. "마치 흙덩이가 철썩 하고 떨어지듯이" 말이다. 인생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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