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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by Diligejy 2023. 1. 16.

p.26

농성 개시 후 한 달이 지날 무렵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글자 그대로 고립무원에 빠져 있었다. 조정은 '항전론'과 '항복론'으로 분열되었다. 전쟁 발발 전의 '척화론'을 이은 '항전론'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는 주장이었다. '주화론'에 맞닿아 있었던 '항복론'은 옛날 중국의 춘추 시대의 월왕 구천처럼 어떻게든 이번 위기를 넘겨야만 훗날의 와신상담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언뜻 '항복론'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항복을 한들 과연 청군이 국가의 지속과 군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인가? 반면에 적지 않은 근왕병이 아직 미원에 남아 있지 않은가? 설사 그들의 근왕이 끝내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면 천하 후세의 역사에 떳떳하기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강화도로 들어간 원손과 두 대군이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이어갈 희망도 있었다. 

 

p.31

청의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종래의 병자호란 서사가 조선의 '전쟁 실패'를 설명하는 데 주력한 것도 문제로 비친다. '전쟁 실패'의 해명이 기본적인 관심사였기 때문에 조선의 시각에서 연구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병자호란은 분명 조선과 청나라가 서로 싸운 전쟁이었으므로 '조선의 전쟁'인 동시에 '청의 전쟁'이기도 했다. 따라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실상을 온전하게 규명하려면 '청의 전쟁'이라는 시각에서의 접근도 당연히 필요하다. 

 

p.40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1644년 이전, 즉 중원 정복 이전의 청나라 역사 연구에서 조선과의 관계 자체가 기껏해야 주변적인 문제로 취급된 탓이 큰 것 같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주', 몽고와의 관계가 '부'였다면, 조선과의 관게는 간혹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라면,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먼저 제거한 전쟁 정도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병자년에 한정해보자면, 정작 홍타이지는 조선과의 전쟁을 명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위에서 강조했듯이, 병자호란을 친정으로 치렀다. 배후에 명나라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을 비우고 조선에 출정한 셈이니, 종래의 인식으로는 이해 불가이다. 게다가 병자년의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명나라를 먼저 쳤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p.64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을 주변의 적대 세력들과 벌인 그간의 수많은 전쟁 중 하나로 보지 않았다. 친정과 총력전으로 이 전쟁에 임했다는 사실은 그가 병자호란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말해준다. 홍타이지가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병자호란을 일으켰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가 굳이 친정과 총력전을 선택한 동기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p.66~67

홍타이지는 나덕헌과 이확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단지 조선의 사신을 죽인다면 맹약을 먼저 깬 잘못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조선 사신의 '무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칭제', 즉 자신의 존호를 정당화하면서 첫 번째 근거로 내세운 '조선 정복'이 '허구'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병자년 칠월 28일 인조는 나덕헌과 이확의 배례 거부 때문에 "화친하는 일이 이미 끊어져"버렸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사월 11일의 시점에 양국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음을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절화교서'는 아니었다고 치더라도 나덕헌과 이확의 의례 참여 거부가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역시 조선이 전쟁을 자초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당시의 조선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국력 쇠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병자년의 시점에서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는 절대 수용 불가였다. 단지 대명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을지라도, 병자년의 명나라가 여전히 대국으로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무렵의 명나라는 멸망을 코앞에 둔 처지였으니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무슨 대수이냐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청의 입관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홍타이지조차도 명이 곧 멸망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644년 청에게 입관의 기회를 제공해준 이자성의 북경 점령은 문자 그대로 돌발 사태였다. 여기에 당시 조선 땅 철산 연해의 가도에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부렵 가도의 명군은 비록 군사적으로 무의미한 존재였지만, 그들의 주둔 사실 자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따라서 단지 훗날에 태어난 덕분에 옛사람들의 미래를 알게 되었을 따름인 우리가 그들이 시대의 변화에 어두웠던 나머지 전쟁을 자초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어느 쪽이 사실을 엄밀히 따지자면, 홍타이지야말로 애초에 정묘년 이래의 양국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홍타이지의 존호는 논의 당초 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였다. 병자년의 전년인 을해년 십이월 말 홍타이지가 이제 존호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하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차하르 정복과 옥새 획득이었다. 그런데 존호를 칭하라는 요청을 수락하는 자리에서 홍타이지가 돌연 "조선국의 왕은 (나의) 형제가 되어 있다. 그에게 상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제 사신을 보내어 이 이야기를 조선 왕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존호 문제가 홍타이지에 의해 조선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존호를 바치는 대열에 조선의 왕을 동참시키자는 발상을 내놓은 장본인은 바로 홍타이지였던 것이다. 

 

정묘년의 맹약은 어디까지나 형제처럼 잘 지내자는 것이었다. 인조에게 명과의 관계를 끊고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 오히려 그 자체로 맹약 파기 행위였다. 인조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절화교서'를 내세우며 조선이 맹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늘에 고했지만, 정작 '절화교서'가 나온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p.69~70

여기서 홍타이지가 자신의 '희망사항' 때문에 굳이 조선을 끌어들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까닭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 조선이 홍타이지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자년 사월 11일의 '황제 즉위식'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직접 목도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가 내세운 명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사월 11일의 장엄한 의식은 기껏해야 '미완의 황제 즉위식'에 그치고 만 셈이다. 이왕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상 그가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은 , 정묘년의 '조선 정복'은 사실이었으나 뜻하지 않게 조선이 '배신'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침 그는 '배신'의 증거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절화교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배신'을 주장한 이상, 홍타이지로서는 '조선 정복'을 위한 전쟁 발동이 당위이자 필연이었다. 이제 일으킬 전쟁은 1627년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되어야만 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전쟁의 목표는 처음부터 '조선 정복'이었다. 또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 명실상부한 '조선 정복'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만에 하나 이번에 조선을 확실히 정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칭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정당성을 상실하고 말 터였다. 전쟁의 필승을 위해서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는 총력전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정묘호란 때처럼 남에게 전쟁을 맡겨서도 안 되었다. 원정 동안 혹 예상치 못한 우발 사태가 터질 경우, 예컨대 정묘호란 때처럼 원정군의 지휘부가 내부 이견으로 서로 다투는 상황이 재연된다면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남에게 전쟁을 맡겨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 공적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이번의 '조선 정복'은 본인의 정치적 권위가 걸려 있는 사안이었으며, 따라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업적이 되어야만 했다. 홍타이지가 친정을 결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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