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
우리의 불매 운동은 맥주, 자동차, 유니클로에 집중되었는데, 사실 우리가 일본에서 수입하는 제품의 90% 이상은 일반인들이 평생 이름을 들어 볼 일이 없는 원자재와 자본재이다. 생각해 보자. 수출 규제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불화 폴리이미드와 포토레지스트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
p.72~73
일본에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100년 넘게 다양한 분야에서 관찰되던 화혼양재의 개량 능력은 1990년대 이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최근 10년간 삼성전자와 애플이 경쟁하듯이 혁신적인 차세대 스마트폰을 선보이자, 처음에는 두 기업을 모방만 하던 중국 기업들도 최근에는 꽤 가성비가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 중에는 세계 시장에서 팔릴 만한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발명보다 혁신이 장점인 일본인들에게 최근의 제품 개발 속도가 너무 빠를 수도 있다. 또 베타 버전을 출시하고 버그를 수정해 나가는 식의 최근의 제조업 트렌드가 완벽한 품질을 보장하려는 일본 스타일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서 뭔가 배우려는 노력을 예전보다 덜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작은 1980년대부터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 되자 일본인은 누구나가 "이제 서양을 캐치 업 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다녔다. 사실이 그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는 당위론이 득세하고, 지금의 한류처럼 일본 문화가 전 세계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다들 알다시피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이 잃어버린 10년, 20년을 넘어 30년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이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관건은 깊은 잠에 빠진 화혼양재의 개량 능력을 다시 깨울 수 있을지의 여부다.
p.174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 인터넷 전문 은행을 도입한 인터넷 은행 강국이다. 우리의 경우 2017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카카오뱅크와 K뱅크가 인터넷 전문 은행의 효시이지만, 일본은 2000년에 재팬넷은행(현재의 PayPay은행)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0개 가까운 인터넷 전문 은행이 성업 중이다.
p.206
일본형 장기 불황이 주목을 끈 이유는 낮은 성장률 때문이 아니라 성장률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제1차 오일 쇼크에서 회복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은 3.6% 성장한 반면, 같은 기간 프랑스는 1.9%, 독일은 2.5%, 미국은 1.9% 성장했다.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성장률과 비교하면 일본(-3.0%)은 프랑스(-0.9%), 독일(-1.4%), 미국(-0.3%)에 비해 훨씬 큰 폭으로 성장률이 감소했다. 결국 1990년대 들어서 일본의 성장률 감소 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가장 급격했기 때문에 '잃어버린'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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