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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 - 인문학 이론 | 쿠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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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침 9시에 일어나 이 서평을 작성하고 있다. '왜' 이 서평을 작성할까? 브라이언 클라스의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를 읽었고 서평을 작성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왜' 이 책을 읽었을까? 다른 분이 추천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왜 추천을 해주셨을까? 그 분이 먼저 읽어보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 분은 왜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올라가다보면 한도끝도 없는 인과사슬을 목격하게 된다.
'인과'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건 지금 서술하는 일들이 과거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인과를 아무리 분석했다 하더라도 인간은 3차원의 존재이기에, 그리고 진화적으로 완벽히 이 세상을 인지하도록 진화한 것도 아니기에 모든 변수를 인지하고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위험(Risk)에는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지만, 불확실성(Uncertainty)에는 모든 노력을 다 하더라도 아주 약간의 대비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겪어내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뇌도 그렇고 삶도 수렵채집 시절에 적합하도록 설계(진화)되었던 것 같다. 진화론의 책이든 아니면 어떤 책이든 읽어보면 인간의 뇌는 과거 수렵채집 시절의 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며, 그래서 그런건지 뭔지는 몰라도 인간의 삶에서 안정적 사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숫자는 150~200명이라고 한다. 한 부족의 숫자 정도다.
하지만 인간은 개척하고 또 개척해서 지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확장을 거듭했고 확장한 덕에 생산성이 급속도로 올라가고 기아는 감소하며 평균 생존 연령도 증가했지만 자연 법칙은 그리 쉽게 인간에게 모든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자연 법칙이 허락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무엇이 그런건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들에 비해 월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협동'을 국지적인 지역에서 행하지 않고 전 세계를 통해 진행하며 생산성을 올렸지만, 비용청구서가 도착했다. 복잡성이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건 매우 높은 확률로 내(물론 책에서는 장내 미생물 이야기부터 여러가지 뉴런 이야기까지 나오긴 하지만, 우선 그런 깊은 논의는 뒤로 하고 일반적인 관념에서 '나'라고 하겠다)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지인과 협동을 할 경우 고리가 하나 생기고, 또 그 지인의 지인이 함께할 경우 고리가 더 생긴다.
인간인 우리는 분명 이런 고리를 선형적으로 맺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선형적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순환고리가 되었고 통제/예측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하지만 선형적인 고리만을 생각하던 버릇이 있기에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오만은 강한 처벌을 불러왔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런 고리와 고리 사이들을 관찰하며 보았던 여행기를 들려준다. 저자 또한 인간이기에 전체 고리를 본 것은 아니고 다른 고리를 본 사람들의 이론과 관찰을 토대로 자신의 관찰기록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충분히 숙고한 결과물이기에 읽다보면 그 전보다 더 나은 시야로 볼 수 있게 된다. 어렵지만 흥미로운 기록이다.
밑줄긋기
p.6
우리가 뭔가를 단독으로 고르려고 하다가 그것이 이 세상의 나머지 모든 것과 엮여 있음을 깨닫는다.
- 존 뮤어
p.22
우리가 현재와 비교해 과거를 생각하는 방식은 묘하게 단절되어 있다.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다고 상상할 때 주의해야 할 점도 같다. 절대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미세하게 바꿔놓기만 해도 세상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심지어 우발적으로 미래의 자기 자신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해서는 우리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잘못해서 벌레를 뭉개버릴까 봐 극도로 주의해서 살금살금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 누구도 버스를 한 번 놓쳤다고 해서 미래가 돌이킬 수 없게 바뀌어버릴까 봐 공포에 떨지 않는다. 그러긴커녕 우리는 소소한 일들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 씻겨나가고 정화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세세한 부분이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냈다면, 현재의 모든 순간 역시 우리의 미래를 창조해 낼 것이다.
p.26
아모르 파티는 우리가 가끔은 근사하고 가끔은 큰 하자가 있는 과거의 파생물이라는 진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섰던 인생의 비극들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라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인식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존재는 친절함과 잔인함, 선과 악, 사랑과 증오에서 생겨난다. 그러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p.53-54
카오스 이론은 예측 가능한 당구공조차도 예측할 수 없다고 재분류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당구대 근처에 선 한 무리의 사람이 만들어내는 중력질량의 미세한 당김도 당구공이 다른 공들과 대여섯 차례 튕긴 이후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뱅크슛조차도 몇 차례 부딪히고 나면 어떻게 할지 계획할 수 없다. 이렇게 조그만 당구대 안에서도 그렇다면, 세상을 구성하는 수억 수조 개의 셀 수 없이 많은 원자 당구공은 어떨지 상상해 보자. 가장 작디작은 변동마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따라서 예측 가능한 미래란 허풍선이들과 바보들이 믿는 섭리일 뿐ㅇ이다. 아니면 신학자 페마 초드론의 말마따나 "당신이 보장과 확실성에 집착한다면, 엉뚱한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카오스 이론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로렌즈의 발견은 우리 자신의 존재에 관한 불안한 의문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풍속이 미세하게 바뀐 탓에 몇 달 후 폭풍이 일어난다면, 화요일 아침에 알람을 꺼버리는 대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겠다고 한 결심은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삶은 하찮은 선택을 비롯해 외견상 마구잡이로 찾아오는 작은 불행이나 운에 지배당하고 있을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당혹스러운 의문도 생겨난다. 만약 1926년 헨리 스팀슨의 휴가 계획이 20년 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수십만 명의 목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가 걱정해야 할 대상은 단순히 우리의 알람 시계가 아닐 것이다. 알람 시계와 언뜻 보기에 중요치 않아 보이는 80억 인구의 선택 역시 우리 삶의 궤적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p.55
우리가 세계의 총체적인 단일성을 무시하고 그 대신 모든 것을 깔끔하게 분류할 수 있는 척 가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현실은 상호연결되어 있다. 상호 연결성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며, 우리의 세계는 서로 얽혀 있다. 일단 얽매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사건들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확률과 혼돈, 임의적인 사고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신호'와 '잡음'은 진짜로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잡음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에서 발생하는 잡음은 설사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신호가 된다.
p.56
우리의 세계는 단순히 뒤얽혀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지 못한대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러분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변화한다. 여러분은 (감사하게도 아주 경미한 수준으로) 노화되고 있지만, 뇌 속의 신경망 역시 여러분이 각 단어를 인지하는 동안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중요한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듯 보일 때조차도 미래의 삶을 바꿔놓을 사건들이 인접 환경 바로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 어떤 사람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같은 강도 아니고, 같은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인 크라틸로스는 우리가 그저 수동적인 관찰자는 아니라고 언급했다. 강물에 발을 담그면, 그 사람이 그 강물을 바꾼다. 그 무엇도 정적이지 않다. 미세한 변화조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합쳐진다.
p.58-59
좋을 때나 힘들 때나 현실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경이로우며, 삶의 모든 순간에 잠재적으로 숨겨진 의미를 부여한다. 또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을 철저히 뒤집는다.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개인적인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으며, 가장 사소한 결정조차도 영원히 세계를 바꿔놓을 만큼 중요하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도입부에는 과학적 진실이 담겨 있다. "모래알 하나에서 세상을 보고 / 야생화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보려면 /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 찰나에 영원을 담으라."
이제는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조정할 때가 왔다. 우리의 혼란하고 얽히고설킨 존재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고 놀라운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지만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p.66-67
'개인'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개념조차 수정됐다. 일부 체계 생물학자들은 우리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을 개인으로 표현하는 대신 각 개인을 전생명체(holobion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생명체는 우리 주변에 사는 유기체들의 무리뿐 아니라 핵심 숙주(우리의 경우 인간이 핵심 숙주다)를 포함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균류와 박테리아, 고세균, 바이러스 및 관련 미생물들과 결합된 인간 세포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최적의 추정치에 따르면 우리 몸 안에는 인간 세포 하나 당 약 1.3배의 박테리아 세포가 존재한다. 생물학자 멀린 셸드레이크에 따르면 "우리 은하계의 별보다 더 많은 박테리아가 내장 안에 살고 있다". 바이러스가 우리의 생체시계에 영향을 미치며, 기생충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미생물군집은 기분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새로운 증거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다만 최근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뿐이다. 길들이는 것이 가능한 세계를 독립적이고 권위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개인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생각이 체내에 사는 작고 보이지 않는 유기체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당혹스럽지만 이게 진실이다.
p.80-81
긴밀하게 연결된 복잡한 세계에서는 의미 없고 우연한 성과를 흔히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큰 힘과 함께 해방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승리에 대한 지분도 조금만 차지하고 실패에 대한 비난도 조금만 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임의적으로 보이는 불운을 마주했을 때 틀린 설명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왜 암에 걸렸는지나 왜 자동차 사고가 났는지 설명할 때 임의성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나쁜 소식은 그 이면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해야만 하며, 고통을 겪는 진짜 이유를 알아내지 않고는 불운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의미 없는 재난일지라도 모를 상황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의미를 찾아내려는 탐구를 하게 된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어"는 일자리를 잃거나, 갑작스럽게 실연당하거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흔히 듣는 대처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의미 없는 데서 의미를 찾는다. 모든 것에는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계획이 있다는 미신에서 위로를 얻고 도움도 받을 수 있으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저 유용하고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허구일 뿐이다. 아무리 중요하거나 부아가 치밀거나 끔찍한 일이 있더라도,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질 뿐이다. 이것이 상호 연결된 혼돈스러운 세계에서 맞이할 필연적인 결과다. 사고와 실수, 그리고 무엇보다 임의적이고 중성적인 변화가 생물종을 창조해 내고, 사회를 형성하며, 우리의 삶을 바꾼다.
p.110~111
우리 대다수는 진실이 당연히 유용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우리는 현실이 아니라, 세상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환상인 '현시적 이미지'를 본다. 호프먼은 자신의 의견을 입증하려고 컴퓨터를 은유로 사용한다. 한 컴퓨터의 '진실한' 기계적 운영은 비전문가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이콘을 더블클릭했을 때, 키보드를 경쾌하게 두드렸을 때, 또는 파일을 삭제했을 때 물리적 수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려 할 때 말을 잇기 어렵다. 감사하게도 기술의 마법사들은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쉽도록, 완전히 부정확하지만 유용한 환상을 개발해 냈다. 우리는 이를 '데스크톱'이라고 부르면서 만화처럼 생긴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 안에는 데스크톱도 커서도 없다. 그 대신 이진법 계산을 수행하는 실리콘과 플라스틱, 구리 뭉치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호프먼의 의견에 더해, 이런 비유가 MS-DOS 운영체계 같은 개인 컴퓨터의 초창기 형태를 생각하면 더욱 명료해진다고 덧붙이고 싶다. 이 운영체계는 우리 같은 컴퓨터 사용자들을 현실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데려갔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현실과 훨씬 동떨어졌지만 더 유용한 비주얼 데스크톱이 등장하면서 MS-DOS는 쇠퇴했다.
p.117
우리는 유형을 과하게 탐지해 내도록 진화됐다. 잠복해 있던 포식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고 잘못된 추측을 하는 것이, 이를 쌩뚱맞은 바람 소리라고 무시하는 바람에 사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 우리 뇌는 생존을 위해 움직임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극도로 민감해졌다. 진화철학자 대니얼 데넷은 우리가 움직임뿐 아니라 신념과 욕망, 정보, 목표, 그리고 타인의 목표에 동조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우리는 진화를 통해 "누가 무엇을 아는가?"와 "누가 무엇을 원하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도록 배웠다고 한다. 여기 있는 송곳니 달린 낯선 생물은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가, 아니면 그저 호기심이 일었을 뿐인가? 이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다. 머나먼 과거에 목숨을 잃은 이들은 유전자를 물려주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인류의 미래로부터 추려졌을 것이다. 거짓 양성은 짜증나지만 부정 오류는 치명적인 세상에서 신경과학자들과 진화생물학자들은 우리 뇌가 언젠가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유형을 탐지하는 데 과도하게 맞춰져 있다고 주장한다.
p.120-121
E. M. 포스터는 언젠가 "'왕이 죽었고, 이후 왕비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왕이 죽었고, 이후 왕비가 슬픔을 못 이겨 죽었다'는 플롯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추리 소설가 P. D. 제임스는 여기에 동의하면서도 플롯이 "모든 사람은 왕비가 슬픔을 못 이겨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왕비의 목에서 찔린 자국이 발견됐다"는 부가적인 설명을 더해 발전된다고 말했다. 이 세 문장은 가장 기억에 남지 않는 문장부터 기억에 남는 문장까지 차례로 이어진다. 첫 문장에는 원인이 없고, 따라서 그저 관련 없는 사실들의 목록이자 기억하기에 가장 어려운 유형의 정보가 담겨 있다. 두 번째 문장은 인과관계를 언급하지만, 왕비가 죽음을 맞이한 원인을 즉각 제시하는 바람에 우리의 흥미를 꺾어놓는다. 그러나 세 번째 문장은 누가 왕비의 목을 찔렀는지 궁금하게 하므로, 이 인과관계의 스릴러는 기억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미스터리 소설가들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잘 오르는 이유이자, 실제 범죄가 팟캐스트와 다큐멘터리 순위를 독차지하는 이유다. 우리는 누가 그랬는지 알고 싶어 하고, 무엇보다도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 한다.
p.134-135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메뚜기들이 왜 무리를 형성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워했다. 최근 조사에서 마침내 이 수수께끼가 풀린 것처럼 보였는데, 그 답은 밀집도에 있었다. 제곱미터당 열일곱 마리보다 적은 메뚜기가 있을 때, 메뚜기들은 계속 혼자인 상태를 유지했다. 메뚜기들의 움직임에는 협동이나 목표가 빠져 있고 명료한 유형 없이 쉽게 변동해서 그 경로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거의 완벽한 무질서였다. 각 메뚜기는 서로에게서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연결과 상호 의존보다는 고립과 독립이 고독한 메뚜기의 삶을 규정헀다.
더 많은 메뚜기가 무리에 합류하면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다. 제곱미터당 스물네 마리에서 예순한 마리 정도의 메뚜기가 존재하는 중간 정도의 밀집도에서 이들은 작은 무리를 지었다. 다소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지만, 이 작은 떼는 독립적이다. 각각의 반 유기적인 무리는 하나로 움직이지만, 집단들 사이에 통합된 움직임은 없다. 군인보다는 고등학교 파벌에 가깝다. 그리고 파벌처럼 꽤 변덕스러울 수 있는데, 마치 어떤 유행을 따르다가 날쌔게 또 다른 유행을 향해 움직이듯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방향을 바꾼다. 각각의 메뚜기는 파벌 내에서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다른 파벌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메뚜기는 제곱미터당 정확히 73.7마리가 있게 될 때 하나의 메뚜기 떼가 되어 행진하기 시작한다(어떻게 또는 왜 메뚜기가 이 특정한 밀집도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는지는 묻지 말자. 자연은 여러 비밀을 품고 있다). 애들레이드대학교의 교수이자 이 연구를 수행한 제롬 뵐은 "상당히 확고한 티핑 포인트"라고 말했다. 이렇게 와글거리며 몰려들면서 행진이 시작된다. 당연히 이 고밀도 메뚜기 떼는 메뚜기가 군집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형태다. 이들은 하나가 된 전체로 움직이며, 가차 없이 강제로 배열된다. 메뚜기 한 마리가 무리를 거슬러 움직이려 한다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이는 메뚜기 떼가 반드시 함께 움직이게 만드는 동족 살해의 법칙이다. 그리고 메뚜기 떼는 함께 움직인다. 하나의 구름이 되어 행진한다.
p.137-139
과거는 대개 지역적인 불안정성으로 정의됐다. 일상생활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하루는 건강하지만, 다음 날은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출산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흉년이 들거나 한때 흔했던 동물들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었기에 굶주림은 지속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머나먼 조상들은 국제적인 안정성을 경험하기도 했다. 세상이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단 뜻이다. 부모가 농부라면 자식도 농부가 됐다. 오늘날과는 달리 조부모와 손주는 같은 세상에 살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술을 가르쳤으며, 그 반대로는 가르칠 수 없었다. 석기시대처럼 기술혁명은 몇 달이 아닌 몇천 년마다 찾아왔다.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가 되어 행진하는 메뚜기 뗴처럼, 엄청난 질서와 명백한 질서가 존재한다. 인구가 급증하고 밀집도가 예측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아도 그렇다. 80억 인구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현대의 규칙 기반 경제에서 문명으로 결집했고, 극도로 예측하기 쉬운 유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상들과는 달리 우리는 더욱 지역적인 안정성을 경험하고 있다. 익명 처리된 휴대전화 데이터를 활용한 최신 연구에서는 특정인이 시간의 약 93퍼센트를 어디에 쓰는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반복과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개인행동에 중대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대한 쇳덩이를 몰고 좁은 아스팔트 길을 시속 110킬로미터로 달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규칙을 따를 것이라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이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무리와 반대로 움직이는 바보 같은 메뚜기처럼 죽을 수도 있다.
인구 간의 연결성 역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인간 군집에서 나타나는 문화와 관습의 수렴으로 이어졌다. 세계 어디에서든 엘리베이터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자. 모든 사람이 문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어떤 규칙이나 법도 언급할 필요가 없다. 사무실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마닐라에서든 맨해튼에서든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복장일 것이다. 엄청난 문화적 격차가 비즈니스 정장의 딱딱한 매력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세계 어디에서든 ATM의 비밀번호는 네 자리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은행으로부터 즉각 돈이 인출된다. 118개국에서 동일한 맥도널드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다. 현대 인간 사회는 전례 없는 규칙성을 보인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질서정연하고, 엄격하며, 구조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견고하고 예측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행진하는 메뚜기 떼와 같이 모든 것이 즉각 변한다. 우리 삶은 종종 금융위기와 팬데믹, 전쟁처럼 대대적인 사회적 충격에 의해 자주 파괴된다. 우리는 이 거대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중대 사건들, 즉 검은 백조들로부터 불시에 습격을 당한다. 그로 인해 우리의 존재는 국제적인 불안정성에 좌우된다. 오늘날 그 누구도, 아무리 세상을 등진 사람이더라도 우발성의 변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이것이 군집의 역설이다. 인간 사회는 질서 있는 규칙성을 향해 일제히 수렴해 가고 있으며(따라서 매력적이게도 예측 가능해 보인다) 더욱 우발적이 되어간다(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혼돈 상태다).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나, 우리 세계는 인류 역사상 어느 사회적 환경보다 난잡하고 무질서하다.
p.177
확률은 위험성을 다루는 멋진 도구이며 관련 문제에서는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불확실성의 경우에 "나는 몰라"라고 인정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곳을 탐험하기 위해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틀린 확률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낫다.
p.180
네이트 실버가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71.3도 아니고 71.5도 아닌) 71.4퍼센트 확률로 이기리라 예측했다면 이는 무슨 의미일까? 컴퓨터 모델에서 선거를 반복적으로 재실시할 때 클린턴이 그 시간의 71.4퍼센트만큼 이긴다는 의미인가? 좋다. 하지만 현실에는 결과가 한 가지인 단 한 번의 선거가 있을 뿐이고, 다 지나고 나서는 아무리 되돌리고 싶어도 절대로 몇 번이고 되돌릴 수 없다. 아니면, 선거는 주사위를 굴리는 것과 같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주사위는 6분의 1 확률이 아닌 71.4퍼센트를 이기도록 가중치를 주었다는 의미일까? 클린턴이 졌을 때는 71.4퍼센트의 예측이 틀린 것일까, 혹은 그저 덜 그럴듯한 결과가 나왔을 뿐일까?
p.192
우리는 건강한 수준의 불확실성을 수용하기보다는 잘못된 확신을 고수한다. 우리 세계의 대부분은 이해하는 이가 거의 없는 복잡한 모델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문제는 점차 영향력이 커지면서 모델이 그저 모델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는 데 있다. 모델의 의도적인 단순화는 상황 자체를 의도적으로 부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지도는 지역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지도가 지역은 아니다. 모델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트레이드 오프가 필요하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모든 단순한 것은 잘못됐다. 모든 복잡한 것은 쓸모가 없다." 그 누구도 1:1 척도의 지도를 원치 않는다.
p.212-213
"우리가 유명한 서사의 급속한 확산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제와 경제적 행위의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실러는 이렇게 주장했다. 너무 뻔해서 흔하게 들릴지 몰라도, 내러티브 경제학은 최근까지 학계에서 변방의 영역으로 취급받았다. CNBC나 블룸버그로 가서, 하락하는 주가 수익성 지표가 아닌 입소문 서사가 어떻게 불황의 조짐이 되는지 이야기해 보자. 그러나 이런 것이 자성 예언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가끔은 입소문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경제불황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겨울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소비를 줄이기도 한다. 막 투자를 하려던 기업들은 이를 거둬들이고, 경제가 얼어붙는 계절을 대비해 자본을 아낀다. 이미 그 냉기를 느껴서가 아니라 겨울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그 사건이 벌어지는 원인이 된다. 이는 이야기꾼 동물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시장경제가 아니다. 시장은 수십억 이야기꾼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서사가 우리를 몰아가고, 그에 따라 우리가 건드리는 모든 것을 몰아간다면 여기에는 정치든, 경제든, 우리의 일상생활이든 뭐든 다 포함된다.
문제는 측정화된 서사가 이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야외에 온도계를 부착한다고 해서 그 온도계가 날씨를 더 덥거나 춥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경제에 대한 신뢰를 조사하고 그 숫자를 보도하면, 소비자 신뢰에 영향을 미친다. 측정과 보도는 여러분이 측정하고 보도하는 대상을 바꿔놓는다.
p.229-230
오늘날 '지리적 결정론' 또는 '환경결정론'에 의존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역사와 사회과학에서 심각한 모욕이자 즉각 학술적인 주장을 무시하는 방식이다. 지형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개념의 몇천 년동안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관중'이라는 이름의 법관이 빠르게 흐르는 구불구불한 강 근처에 사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탐욕스럽고, 무례하며, 호전적이다"라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스키타이인들이 거친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스키타이 남성들은 분명 발기부전일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다. 14세기 아랍학자이자 사회과학의 아버지인 이븐 할둔은 더 어두운 피부색이 더 더운 날씨 때문에 생겼고, 한 민족이 유목민인지 정착민인지는 환경이 결정한다고 주장헀다. 몇 세기가 흐른 후 이 이론들은 프랑스 사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몽테스키외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는 유럽인들을 인종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꼭대기에 올려놓는 기후 기반 이론으로 되돌아갔다. 차례로 지리적 인종차별은 백인 압제자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지적으로 파산한 개념의 신전에 소중히 간직됐다. 따라서 편협한 신념과 폭력, 심지어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이런 비열한 인종차별주의적인 과거에 관한 일련의 생각들은 몹시 의심스러워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
p.234
식민주의는 혐오스러운 존재였으며 불평등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그러나 근대의 불평등이 힘없는 비유럽 국가들을 억압하는 강한 유럽 국가들로 인해서만 생겨났다고 인정하게 되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왜 강한 유럽 국가들은 애초에 상대적으로 덜 발전된 사회들을 괴롭힐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전히 왜 아프리카가 유럽을 식민화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화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식민주의 이전의 차이를 뭐라도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p.235
지리가 인간의 궤적과 불평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은 어쨌든 역사나 의사결정의 중요성과 문화, 그리고 더 전통적인 역사적 서사에서 행해진 잔학 행위를 부인하지 않는다.
p.244
인생의 모든 순간에 나타나는 그 우발성을 상세히 살펴보자.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사슬처럼 연결된 구조에서 각 디테일은 태어나야 할 바로 그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아야 한다. 이 진실은 여러분에게도, 내게도,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p.251
1920년과 1930년대에 역사학 분야에서는 프랑스에서 아날학파가 등장했다. 이 학파는 사회적 변화를 특정한 개인이나 핵심 사건 대신 장기적이고 사회 전반적인 추세를 분석해 이해하려고 하는 학자들이 세웠고, 점차 영향력을 크게 넓혀갔다. 이 학파의 주창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마르크 블로흐는 유대계 역사학자로, 나중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 중반에 블로흐는 체포와 고문을 당했고,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됐다. 블로흐가 자신의 죽음을 설명했다면, 그의 역사철학은 아기 히틀러로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장기적인 사회적 역학을 강조했을 것이다.
아날학파는 '역사를 해석'한다는 의미를 바꾸었다. 훗날 이를 따르는 역사학자는 핵심적인 움직임과 동요를 만들어낸 사람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른바 "아래로부터 역사"를 채택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장기적인 변동이 어떻게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지를 살폈다.
p.254-257
권력의 주변인들조차 엄청나게 중요할 수 있다. 왜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이겼는지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자. 그러면 다양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분명한 논리를 지녔다. 북부에는 우월한 물자공급선과 제조업이 있었다. 북부는 봉쇄가 가능한 대규모 해군을 보유했다. 북부에는 남자가 더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전쟁은 몇 가지 작은 변화로도 다르게 진행됐을 수 있다. 특히나 남부동맹군이 지나치게 소심하고 제대로 관리받지 못한 북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던 초기에는 더욱 그렇다. 1862년 가을이 되자 북군에 대한 추가적인 일격이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영국은 남부연합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할지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이 영구적으로 반으로 갈라질 수도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를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어느 뛰어난 장군이나 튼튼한 공급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버려진 담배 세 개비, 그리고 이를 발견한 적절한 인물에 있었다.
1862년 9월 13일 토요일 아침 9시 경, 북군의 27 인디애나 연대의 바턴 W. 미첼 상등병이 행군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따가운 가을 햇볕을 피하기 위해 그는 허둥지둥 인근 울타리 옆에 드리운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휴식을 하며 기지개를 켜던 중, 나무뿌리 근처 잡초 사이에 숨겨진 뭔가가 눈에 띄었다. 담배 세 개비가 종이 한 장에 싸여 있었고, 종이 위쪽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일급기밀) 본부 북군 버지니아. 1862년 9월 9일. 특수명령 191호." 바턴은 우연히 남부동맹군의 행군 명령을 발견했고, 군이 기습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바턴은 특사의 행낭에서 떨어진 귀중한 첩보를 우연히 발견했고, 이로써 전쟁의 흐름이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첩보가 진짜였을까?
서류에는 'R. E. 리 장군'의 명령에 따라 'R. H. 칠턴'이 서명을 했다. 매우 그럴듯해 보였으나 허위 서류에 속았다가는 대재앙이 닥칠 수도 있었다. 편지는 북부군의 사단장인 알피오스 S. 윌리엄스 장군에게 전해졌다. 그의 텐트 바깥에서 서류는 우선 부관참모인 새뮤얼 피트먼 대령에게 전해졌다. 피트먼은 종이를 펴서 읽으며 그 중요성을 파악하다가 밑부분의 서명을 보고는 멈칫했다. 금세 그는 명령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이 첩보로 무장한 북부군은 남부군 부대를 만나려고 행군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혈이 낭자했던 날인 앤티텀 전투가 나흘 후 뒤따랐다. 북부군은 심각한 사상자들로 고통받았으나 미리부터 공격에 대비해 왔다. 앤티텀 전투를 계기로 남부군이 후퇴했고, 전쟁의 모멘텀이 바뀌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은 전투가 성과를 올려 링컨 대통령이 전투를 마치고 5일 후에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고 북부 지역의 노예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명령할 자신감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중추적인 사건들이 부분적으로는 버려진 담배 세 개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새뮤얼 피트먼은 어떻게 그 명령이 진짜인지 알았을까? 서류에 섬여한 자는 R. H. 칠턴이었다. 전쟁 전에 피트먼은 디트로이트주의 은행 출납계에서 근무했고, 칠턴은 미군의 경리계에 있었다. 칠턴은 지불을 위해 수표에 서명을 해야 했고, 피트먼은 칠턴의 서명을 수천 번도 더 보았다. 담배를 감고 있던 종이 위 서명을 보았을 때 피트먼은 곧장 그 서명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잃어버린 담배 세 개비와 딱 적절한 그늘에서 쉬고 있던 군인 한 명, 우연히 그 서류가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북군 손에 들어간 적의 명령 때문에 근대사가 방향을 바꿀 가능성은 이상하지만 있을 법하다. 우리는 가끔 역사에서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면서, 왜 상황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더 명확하고 이성적인 '원인'을 찾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임의적이고 우발적인 세계에서는, 상등병 미첼이 발견했듯이 들여다봐야 할 적절한 장소가 잡초 안쪽일 때도 있다.
p.259
뇌는 우리가 재빨리 사람을 카테고리로 나누고 잠재의식으로라도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설계됐다. 매끈한 정장을 갖춰 입고 탁월한 학위와 매력적인 자신감을 뽐내는 진지해 보이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경제를 박살내고, 전쟁으로 몰아가며, 국제적으로 엄청난 괴로움을 가한다. 그러니 이는 누가 뭔가를 말했는지의 문제가 아닌, 우리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의 문제가 된다. 우발성 위에 우발성 위에 우발성이다. 우리는 메시지만큼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례로 카산드라의 문제를 언급하지만, 이는 역사를 비합리적이고 임의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또 다른 인지편향이기도 하다.
p.260
링컨이 콜체스터를 믿었다면 더 좋았으리라. 콜체스터는 진짜 예언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분명 사기꾼이었다. 그러나 콜체스터는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고, 콜체스터의 가까운 협조자 중 한 명은 역시나 교령회에 참석하면서 심령술을 믿는 사람이었다. 바로 존 윌크스 부스였다. 링컨에 대한 콜체스터의 경고는 단순한 추측이 아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한 남자의 카산드라적 경고였다. 링컨은 콜체스터의 경고를 무시하고 포드 극장으로 갔으며, 부스의 손에 암살당했다.
p.261-262
20세기에 과학철학의 두 거장 칼 포퍼와 토머스 쿤은 현대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포퍼는 나쁜 아이디어를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더 객관적인 과정에서 변화를 이끌어가는지 강조했다. 반면에 쿤은 개인의 주관적인 역할을 강조헀다. 포퍼의 입장에서 과학자들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나쁜 아이디어를 분해하려고 하며, 위조를 통해 잘못된 이론을 내던졌다. 이 과학자들은 계속 모든 제안된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하고, 증명 후에 그 아이디어는 과학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과학적 발견은 적절히 수행했을 때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발전하고, 냉철함을 고수하며 개인이나 정치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과학 분야에서 글래디에이터 식의 전투를 거치고, 상처 없이 살아남은 아이디어만이 다시 실험 대상이 된다.
반면에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머스 쿤은 우리 모두와 같이 과학자들도 편견과 편향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개별적인 과학자들은 기존의 신념을 품고, 특정한 이론을 믿으며, 이런 관점들이 옳음을 증명하는 데 직업적인 삶을 바친다. 그러나 과학 이론이 틀렸을 때 과학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반려 가설을 보호하려 애쓴다해도 균열이 드러난다. 균열이 커지면 과학 전체 체계가 무너지고, 수십 년 동안 받아들여졌던 진실 혹은 당혹스러운 충격에 무너질 수 있다. 쿤은 이 순간을 과학혁명이라고 칭했다. 예전에는 지배적이었던 패러다임이 새롱누 것으로 교체되고, 그 과정은 반복된다.
쿤의 입장에서는 과학자들 자체가 중요하명, 그것도 아주 많이 중요하다. 개인 연구자들은 과학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 것인지, 어느 가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지, 그리고 누가 돈을 댈지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과학적 진실이 주관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과학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착수한 행동에 수반되는 우발성과 임의성에 취약하다는 의미다.
p.264-265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은 거의 글로 남지 않았다.
왕립해군의 군함인 HMS 비글은 첫 항해에서 프링글 스토크스라는 이름이 인상적인 사람의 지휘를 받았다. 1828년 배가 남아메리카 남쪽 끝에 정박하는 동안 스토크스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음울한 날씨는 너무 암울해서 그는 일기장에 "사람의 영혼이 몸속에서 죽는다"라고 쓰기도 했다. 스토크스는 오두막에 틀어박혀, 스스로 총을 쏜 후 며칠 후 죽었다. 스토크스가 살았더라면 찰스 다윈은 결코 비글호를 타지 못했을 것이다.
그 대신 비글호의 선장직은 왕립해군의 귀족 장교인 로버트 피츠로이에게로 넘어갔다. 피츠로이는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를 준비하며, 지휘관이 외롭게 고립된 자리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낮은 지위의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와 같은 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링글 스토크스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길 바라면서 피츠로이는 바다에서 보낼 몇 년 동안 배 위에서 친구가 되어줄 사람을 비공식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피츠로이의 첫 번째 선택은 성직자였으나 그는 종교적 책무를 저버릴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두 번째 선택은 한 교수로, 아내를 화나게 할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교수는 적합한 도전자가 될 수도 있다며 옛 제자를 한 명 추천했다. 바로 찰스 다윈이었다.
피츠로이는 육체적 특성이 개인의 내적인 성향을 반영한다는 개념인 관상을 믿었다. 피츠로이는 다윈을 만났을 때, 그의 코를 보고 움찔했다. "피츠로이는 신체의 윤곽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다고 호가신했다. 그리고 내 코 모양을 한 사람이 항해를 떠나기에 충분한 에너지와 결단력을 지녔을지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가 내 코 때문에 잘못 생각했다는 데 만족했으리라 생각한다." 다윈은 훗날 이렇게 썼다.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우발성 가운데 하나로, 다윈은 코 모양 때문에 과학을 바꿔놓을 운명의 항해를 떠나지 못할 뻔했다.
p.281
영어에서 대부분의 로만어와는 달리 요일의 이름은 라틴어가 아니라 노르웨이/앵글로 색슨의 신들에게서 파생했다. 노르웨이 전쟁의 신인 티우(Tiw)는 화요일(Tuesday)로 살아남았고, 발할라를 지키는 신인 오딘(Woden)의 날이 그 뒤를 따르며, 토르(Thor)의 날이 그 다음이고, 사랑의 여신으로 오딘과 결혼한 프레이야(Frige)가 뒤따른다. 우리는 잊혀버린 역사의 낯선 단면 같은 그 어원을 되돌아보는 일 없이 꾸준히 그 이름을 말한다. 그러나 애초에 왜 생활 리듬을 주 단위로 맞춰야 하는가? 그 누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7일 주기를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는가?
p.300
제니퍼 타깃과 앤드루 겔만 같은 일부 사회과학자와 통계학자들은 연구를 완전히 폐기 하기 위한 통계적 유의미성을 따지기 위해 P값 기준치가 엄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또한 겔만은 개입이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영가설'이 터무니없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개입은 무조건 무슨 결과든 가져오기 때문이다.
p.303
어느 훌륭한 연구에서 우리가 선형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계속 가정한다 치자. 이 세계는 원인의 크기와 결과의 크기에 비례하며, 모든 것이 직선 위에 놓인 것처럼 지도 위에 그려지는 곳이다. 우리가 여러 차례 살펴보았듯, 이 방법은 분명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에 잘못됐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쓰이는 여러 양적 모델에서는 여전히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왜 그럴까? 정량적인 사회과학이 대부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생겨났고, 당시 컴퓨터는 비싸고 덜 정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의적인 고정 효과로 인해 이런 식의 세계관이 고착화됐고, 대부분의 사회 연구 분야를 계속 장악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정교한 모델링을 할 수 있음에도 그렇다.
p.306-308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 애쓰면서 연구자들은 조심스레 각 팀의 방법론적 선택을 살폈다. 그러나 방법론적 선택은 결과로부터 겨우 5퍼센트의 변화만을 설명할 수 있었고, 나머지 95퍼센트는 설명할 수 없는 암흑물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이 책의 기풍에 걸맞은 결론을 끌어냈다. "가장 사소한 (방법론적) 결정도 그 결과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 특이점을 인식하고 있을 때만 이어서 그 적법성에 대해 생산적인 이론적 토의를 하거나 경험적 연구를 할 수 있다." 가장 사소한 결정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타났다. 이는 더 뛰어난 계산으로 없애거나 해결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도전 과제를 만들어냈다. 그 논문의 제목이 보여주듯, 어려운 문제의 일부는 우리가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76개 연구팀은 특정한 질문에 답하도록 과제를 부여받지 않는다. 거의 항상 단 한 명의 연구자나 단 하나의 연구팀만이 우리 세계에 관한 어느 질문과 씨름하느라 노력한다. 단 한 명의 연구자 또는 단 하나의 연구팀에게만 이 질문을 하고 그 답을 듣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자. 권위 있는 연구에서는 이민이 사회복지에 대한 지지율을 낮춘다고 발표하거나, 또는 이민이 사회적 비용에 대한 지지율을 높인다고 발표할 것이다(이 실험은 각 결론이 동일하게 나올 가능성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연구 하나만 언론에 보도될 것이며 이는 이민에 대한 대중의 관점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연구에서 이민이 사회적 비용에 대한 대중의 지지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 해롭다고 할지는 반반이다.
이제 연구에는 제한이 없고 각 팀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동일한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데이터는 무엇이든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연구는 보통 이렇게 돌아간다. 이것이 또 다른 어려운 문제의 일부다. 우리는 정확히 똑같은 데이터로 정확히 똑같은 질문에 대한 연구를 할 때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합의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해하려고 애쓴느 세상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독재 정권 연구를 들어보자.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정치학자들은 '권위주의 체제 내구성'이라는 개념을 개발해 독재 정권을 설명했다. 이 개념은 간단했다. 일부 독재 정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랫동안 살아남으리라는 것이었다. 타당한 이론이었고,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했다. 심지어 이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전형적인 왕족도 존재했는데,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가다피,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끔찍한 폭군들이었다. 왜 이들의 정권은 회복력 있고 확고한지에 대한 책이 쓰였고, 이 책으로부터 커리어가 발전해 나갔다. 이 개념은 널리 인정받는 지혜가 됐다. 독재자들은 무자비했으나 세상에, 안정성을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2010년 후반, 튀니지의 한 채소 행상이 분신자살을 했다. 곧 이 이론은 사라지는 듯했다. 대표적인 독재자들이 실각했고, 혁명의 선두에 선 성난 군중들은 궁전을 약탈했다. 몇 달 안에 벤 알리는 망명했고, 무바라크는 체포됐으며, 가다피는 살해당했다. 권위주의 체제의 내구성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보였다. 이론의 주요 지지자들은 거물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았고, 세계정세를 진단하는 데 크게 잘못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아탑에 사는 학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놀라움에 휩싸였다. 나는 튀니지로 현지 조사를 수행하러 가기 직전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교수의 연구실에 앉아 이 교수가 이 주장을 증명하려 걸어놓은 포스터 한 장을 올려다보던 기억이 난다. 그 포스터는 중동의 '정치적 위험성 지도'로, 전문적으로 위험성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연구자들이 만든 것이었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국가는 초록색으로 칠해졌다. 2011년 초에 그 지도를 다시 찾아보자, 지도의 모든 초록 국가가 이제는 혁명이나 전쟁 등으로 불타고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이면서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원래의 이론이 틀렸을까 아니면 세계가 바뀌었을까?
p.309
사회 이론에서 뭔가가 틀렸다고 결론 내릴 때 혹자는 이론이 전부 잘못됐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수다. 사회 이론은 화학 이론과 다르다. 동굴인이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함께 합쳐보면 우리와 똑같은 거품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시간과 공간, 문화를 넘나드는 지속적인 안정성이 사회 동역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원인과 결과의 양식이 한 번에 한 상황씩 존재하다가 사회적 세계가 바뀌어 버리고 그 양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간 사회에서 일부 인과성의 형태는 모양을 바꾼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 대한 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그 불변의 진리란 우리가 발견의 정점에 다다랐으나, 사회제도의 실제 진리는 꾸준히 바뀌고 움직이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줄곧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p.312
클린턴이 패하자 실버는 자기 모델을 들어 변명했다. 71.4퍼센트는 100퍼센트가 아니지 않는가! 모델에 따르면 클린턴이 질 가능성은 30퍼센트에 가까웠고 그러니 모델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저 약 3분의 1정도 일어날 수 있던 일이었을 뿐! 우리가 틀렸다고 말한다면 수학을 이해 못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분명한 의문을 자아낸다. 네이트 실버의 모델이 이 선거에서 '틀릴'수가 있었는가? 모델이 낮은 가능성의 사건을 예측했는데 그 사건이 벌어졌다면, 세상이 이상한 것이지 모델이 부정확한 게 아니다. 속일 수도, 허위라고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또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 채 우리는 기존의 틀에 사로잡히게 되며, 세계에 대한 오해는 점차 악화된다.
p.316
"쉽게 측정될 수 있는 것들만이 중요하다"라고 믿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는 '맥나마라의 오류'라고 하는데,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이름을 딴 오류다.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계량하라고 주장했고, 종이에 쓰인 숫자상으로는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심지어 미국이 휘청이며 끔찍한 패배를 향해 가고 있을 때조차 그럤다.
p.321-323
어느 원인이 가장 중요한지 알아내려 시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원인이 한 결과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인과관계가 아닌 유용성에 관한 의문이 된다. 일단 인과관계의 성배 대신 유용성을 좇기 시작하면, 과학이 최선을 다하는 일을 더욱 잘할 수 있다. 즉, 경쟁적인 이론들을 대상으로 '예측'이라는 이름의 산성 시험을 실시해서 어느 이론이 살아남는지 보는 것이다. 예측은 그 자체로 유용하지는 않으나, 결과를 개선하고 재앙을 피하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된다면 우리 삶과 사회를 변화하게 해줄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결과를 얼마나 잘 예측하는가? 그 답은 취약한 가족 챌린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혼 부모와 한 명의 자녀로 구성된 대략 5,000가족이 연구 대상이 됐다. 목표는 우리의 인생 궤적이 얼마나 예측 가능한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동일한 어린이들의 데이터를 한 살, 세 살, 다섯 살, 아홉 살, 열다섯 살, 스물두 살 등 일생의 다양한 시점에서 수집했다. 수집된 데이터는 특별히 상세했는데, 정량적인 측정 기법뿐 아니라 어린이들과의 반복적인 면접도 사용됐다. 그러나 여기에 멋진 점이 있었다. 열다섯 살이 된 어린이들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한 후부터는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연구자들은 대회를 실시해서 경쟁에 참여한 과학자 팀들에게 어린이들의 한 살, 세 살, 다섯 살, 아홉 살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을 주었다. 도전 과제는 누가 열다섯 살이 된 어린이들의 인생 결과를 가장 잘 예측했는지였다. 연구자들에게는 이미 실제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참가 팀들이 현실과 비교해 얼마나 잘 예측해 냈는지 볼 수 있었다. 팀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데이터 분석툴인 머신러닝을 사용했고,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연구자들을 완전히 놀라게 했다. 이들은 일부 팀은 실소가 나올 정도로 틀리겠지만 적어도 몇몇 팀은 정확히 맞출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모든 팀이 다 엉터리였다. 거의 모든 측정 기법에서, 심지어는 최고의 팀들조차 그냥 단순한 평균을 기반으로 임의적인 측정법을 사용했던 팀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싶다면 (엉터리로) 예측을 해야 그 실패로부터 배우고 다음번에 더 나은 예측을 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할 수 있다. 이 놀라운 결과로 인해 취약한 가족 챌린지는 사회 연구의 혁신을 가져온 중요한 기폭제가 됐다. 우리는 그보다 나아질 것이며, 새로운 툴이 쉬운 문제로부터 파생된 여러 난제들을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과 사회의 미래가 정말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로켓 과학이 쉬울 지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계속 살아남아서 인간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우리의 복잡한 세계에서 어떤 불확실성은 결코 무찌를 수 없다.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인생의 우연성은 계속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다.
p.334-336
결정론은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카오스 이론은 결정론적 체제의 초기조건에 무의미해 보이는 뒤틀림을 주었을 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리의 삶은 따라서 결정론적이면서도 완전히 예측불가능하다. 질문은 우리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는지가 아니다(예측할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이 예전에 일어났던 일에서 기인하느냐다. 비구름을 만드는 마법의 속성 같은 것은 없다. 그냥 그 이전에 벌어진 일이 만들어낸, 물리학의 문제다. 그러나 체제가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는 그저 며칠 앞만 신뢰할 만큼 내다볼 수 있을 뿐이다. 2주 이상 넘어가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슈퍼컴퓨터조차 모두 백지화가 된다. 카오스 이론과 결합된 결정론에 따르면, 우리는 대본을 바꿀 수 없으나 바꿀 수 있다면 플롯과 주인공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어도 나머지 연극에서 따라오는 모든 것이 바뀌고 만다. 무대를 건너 훨훨 날아가던 나비의 날갯짓마저도 그렇다.
"잠깐!" 여러분은 다시 화가 나서 외칠 것이다(좀 토닥여 줄까?) "나는 이 '고정된 궤적'이라는 개념이 틀렸다고 꾸준히 증명해 왔어. 나는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웠다고! 나는 몸무게를 줄이려고 결심했고, 이제는 일주일에 세 번씩 체육관에 가!" 이는 사람들이 결정론을 처음 마주했을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정적인 것들로 인해 상황이 인과적으로 결정된다는 개념과 헷갈리기 때문이다. 결정론은 원인과 결과의 맞물린 유형이 고정되어 있고 피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특성이나 행동이 고정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암으로 뒤덮인 폐의 사진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담배를 끊기로 했다고 하자. 이는 결정론적 사고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그 사람이 다큐멘터리를 보던 순간까지 가차 없이 이어지던 과거에서 복잡하게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 다큐멘터리를 보았는가? 친구가 보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왜 추천했는가? 예전에도 폐암으로 친구를 잃은 적 있기 때문이다. 왜 그 친구는 폐암에 걸렸는가? 모든 설명이 계속 꼬리를 물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끊기지 않고 희귀한 원인과 결과가 마침내 정점을 이룬다. 그렇게 해서 그 다큐멘터리를 필연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뉴런과 화학물질, 호르몬 등으로 이루어진 여러분의 뇌는 담배를 끊거나 계속 피우기로 결심하며 필연적으로 이 다큐멘터리에 반응한다. 새로운 입력이 주어졌을 때, 정신적인 결정이라는 경험을 생산해 내는 뇌의 물리적 반응인 산출물은 이미 정해졌다.
자기계발 또는 자기파괴가 가능한지(물론 가능하다)가 논의의 중점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계발이나 자기파괴의 근원이 어디인지가 중요하다. 결정론자들은 물리적 세상에서 복잡한 상호작용이 여러분의 행동을 결정하는 방식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여러분을 구성하는 물질과는 별개인, 육체에서 이탈한 생각 같은 것은 없다. 그 대신에 결정은 뇌와 몸 안의 물질에서 생겨나며, 그 물질은 유전자와 경험, 환경과의 상호 반응, 뇌의 뉴런망에 새겨진 기쁨과 트라우마, 심지어 장내 박테리아와 오늘 아침 먹은 음식처럼 과거에 있었던 일로 만들어진다. 이 모든 것이 완전히 결정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과 연쇄에 부합하며, 화학반응처럼 고정되어 있다. 결정론에서는 그 무엇도 원인 없이 벌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비결정론은 대본이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생을 아주 처음으로 되감기 한 후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정확히 동일한 초기 조건으로 시작했지만 상황은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여러 가능한 미래가 동일한 시작점에서 뻗어나갈 수 있으며, 우리는 고정된 궤적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아한 점이 생긴다. 모든 것이 그 이전에 생겼던 일들에서 비롯된다면, 무엇이 그 궤적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가?
인간은 역사를 통틀어 이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소크라테스 이전 초기 철학자들은 2,600년 전에 결정론적 우주를 제안했다. 동양철학에서 '의존적으로 생겨난다'는 의미를 가진 연기와 같은 불교 개념이나 인도철학의 아지비카 학파 등은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하는 개념에 결정론과 유사한 울림을 합쳐냈다.
p.355-356
우리는 유전자와 부모, 어린 시절의 경험, 또는 뇌의 물리적 구성을 선택하지 않지만 이 요인들은 분명 우리가 하는 미래의 행동을 결정한다. 행동 때문에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타당한가? 혹은 그들이 거둔 성취에 대해 칭송하는 게 타당한가? 그렇지 않다면, '악한' 사람들을 한숨 돌리게 만드는 만큼 정말로 당황스러운 일이다. 뼛속까지 어려운 개념이자,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바로 "범죄자들에게 자유 선택이 없었다면, 어떻게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는가?"다. 대니얼 C 데닛 같은 일부 양립가능론자들은 자기네들의 정의에 따른 자유의지는 도덕적 책임을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여러 철학적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범죄자 처벌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 가지 주요 카테고리로 나뉜다. 어떤 사람은 그 처벌이 '눈에는 눈'으로 응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응징을 위한 처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저지의 수단으로 본다. 범죄자들이 미래에 또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가둬두는 것이다. 세 번째 집단은 처벌을 갱생의 방법으로 본다. 범죄자를 사회의 생산적인 일원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만약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처벌을 위한 처벌은 말이 되지 않지만, 나머지 두 가지의 정당화는 여전히 적용할 수 있다. 살인자에게 자유의지가 없어도, 여전히 사회에 대한 해악을 줄이기 위해 거리에서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다. 이들을 처벌하는 것은 여전히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줄여주고, 갱생도 여전히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다. 따라서 범죄자들은 여전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그 이면의 논리는 이들이 자유롭게 끔찍한 선택을 한 괴물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p.362
우주 역사의 전체가 우발적인 정점에 도달한 존재가 바로 여러분이다. 여러분이 바로 이 순간, 바로 이곳에서 지금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정확히 지금 그대로였어야 했다. 우리는 단순하지만 경이로운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즉, 우리는 137억 년에 달하는 우연성의 역사가 현현한 화신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마침내 스스로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커트 보니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멋진 조언을 내놓는다. "인간의 삶을 누가 통제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목적은 누구든 주변에서 사랑받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p.377-378
우리 모두는 중요하다. 다만 어떤 이들은 평생 더 심오하고 눈에 띄는 방식으로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그러나 우리 행동이 더욱 중요해질 가능성을 최대로 키우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인류가 진화해 온 가장 훌륭한 혁신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협동이다. 함께 노력하는 인간은 함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이 강력한 영향력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두 가지 전략 사이에서 트레이드 오프가 필요하다. 바로 탐험할 것인가, 아니면 개발할 것인가다. 탐험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다녀야 한다. 개발을 위해서는 알려진 목적지를 향해 경쟁해야 한다. 둘 사이의 트레이드오프는 수학 내부에서 집중적인 연구의 영역으로, 특히 MBP(Multi Armed Bandit Problem)라고 알려진 가설의 수수께끼와도 관련 있다. 그러나 핵심적인 아이디어에서는 숫자가 필요 없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식당을 우연히 발견한 뒤 가보는 것은 탐험의 전략이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임을 알기 때문에 예전에도 수백 번 갔던 식당에 다시 가는 것은 개발 전략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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