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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자연선택과 명상 - 불교는 왜 진실인가

by Diligejy 202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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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강렬한 책이다. 마치 불교만이 옳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보면 종교적 불교라기보다는 세속적 지혜로서 불교, 더 정확히는 명상에 대한 강한 추천을 담고 있다.

 

거의 기승전 명상이라고 할만큼 계속해서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와 경험담을 반복해서 담고 있다보니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 패턴을 설명해주면서 명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다보면 단순히 불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닌 진화심리학에 대한 지식도 함께 음미하면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라곤 해도 저자 자신의 경험담이나 누군가의 경험담을 약간 과도하게 강조해서 논거로 삼으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책에서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본인이 침묵 명상 수련을 다녀온 게 엄청난 경험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경험담과 과학적 주장을 엮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명상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개인의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명상을 하면 분쟁도 적어질 수 있을 거고 세상이 더 평화로워질 거다 라는 식의 주장은, 비록 강하게 주장한 건 아니지만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더 많은 사람이 명상을 하면 할수록 즉각적인 반응을 멈추고 조금 더 사려깊게 행동하며 평화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모두가 그러는 세상이 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웠다. 저자가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한 자연선택이 그걸 가만히 놔둘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비판한다고 해서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명상과 불교 철학/심리학은 인간의 감각에 대한 자동 반응을 제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더 건강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저자의 주장은 타당하다. 다만 하나의 도구가 만능일 수는 없으니 한계는 지어두어야 하지 않나 라는 의미였다.

 

불교 용어나 개념에 익숙하다면 더 깊이 쉽게 읽을 수 있겠지만, 불교에 대해 생소하더라도 심리학 책으로서 충분히 재밌고 실용적으로 읽을만한 책이다. 

 

 

 

밑줄긋기

p.14

자연선택은 의식적인 설계가 아니라 맹목적인 과정으로서 오랜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 전파에 유리한 유전적 특징은 살아남은 반면 그렇지 않은 특징은 사라졌다. 그리고 유전자 전파라는 시험대를 통과한 특징에는 인간의 신체적 특징뿐 아니라 정신적 특징도 있다. 인간의 뇌 속 깊이 새겨져 우리의 일상 경험을 빚어내는 정신 구조와 알고리즘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지각과 생각과 느낌이 인간의 일상을 끌어가는 것일까? 기본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실재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는 지각과 생각과 느낌이 아니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데 유리한 지각과 생각과 느낌이 인간의 일상을 끌어간다. 자연선택의 관심사는 인간의 지각, 생각, 느낌이 실재를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우리의 지각, 생각, 느낌이 실재에 관한 부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이렇게 인간의 뇌는 미망에 빠트리도록 '처음부터' 설계되었다.

 

p.16~17

2천 5백년 전에는 정크푸드가 없었다. 그보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결국엔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 쾌락에 강하게 끌리는 인간 내면의 일반적 역동성이다. 우리가 구하는 쾌락은 빠르게 사라지며 결국엔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 붓다가 전하는 메시지다. 우리는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다음번의 욕망 대상을 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다음번의 설탕 도넛, 다음번의 섹스, 다음번의 승진, 다음번의 인터넷 쇼핑 등 ...... 그러나 순간의 쾌락은 언제나 사그라지게 마련이고 쾌락이 사그라지면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 "도대체 만족이 안 돼 I can't get no satisfaction"라는 롤링 스톤스의 노래 제목은 불교에 따르면 인간이 처한 숙명적 조건이다. 붓다는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붓다의 메시지를 온전히 해석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고통(suffering)이라는 단어는 원래 둑카(dukkha)라는 팔리어의 번역어로서 불만족(unsatisfactoriness)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넛과 섹스, 신상품, 승진에 대한 갈망이 환영이라고 할 때 그것의 정확히 어떤 측면이 환영인 걸까? 원하는 대상에 따라 그에 관한 환영도 다른 양상을 띠겠지만 모든 갈망에 공통되는 환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자. 모든 갈망에 공통되는 환영의 요소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갈망의 대상이 가져다줄 행복을 과대평가하는 인간의 성향이다. 다시 말하지만 과대평가는 그 자체로는 사소한 미망이다. 만약 다음번에 당신이 승진이 되면 영원히 행복할까 물으면 당신은 분명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또 다음번 시험에서 A학점을 받거나 설탕 도넛을 하나 더 먹으면 영원히 행복할까 물으면 당신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p.22

내가 진화심리학을 파고들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실을(적어도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진실을) 알았다 해서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진실을 알게 된 삶은 진실을 알기 전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소용없는 쾌락의 쳇바퀴에 갇혔다는 사실을 안 데다 '그 덤으로' 쾌락의 쳇바퀴가 지닌 부조리함의 근거까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 당신은 마치 다람쥐 쳇바퀴처럼 아무 소용도 없이 계속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36

실제로 내가 매우 큰 슬픔을 느낄 때 자주 시도하는 방법이 있다. 만약 명상을 해본 적이 없다면 한 번 시도해보라. 우선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지금 느껴지는 슬픔을 찬찬이 살펴본다. 슬픔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내 몸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관찰한다. 예컨대 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눈 주위에서 슬픔을 느낀다. 슬픔에 대해 명상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주의 깊게 관찰하면 슬픔이 주는 불쾌한 느낌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워진다.

 

p.38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우리가 가진 느낌과 생각과 지각 가운데 '어떤 것'이 환영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이유다. 불안, 두려움, 자기혐오, 우울감 등 우리가 느끼는 많은 불쾌한 느낌이 환영이라면 그리고 명상을 통해 이를 제거하고 완화할 수 있다면 명상은 실제적 목적에서 이용할 가치가 분명하다. 두 번째 이유는 언뜻 학문적으로 보이나 결국엔 실용적인 이유다. 즉 느낌이 언제 우리를 착각에 빠뜨리는지 알면 종종 얼토당토않게 들리는, 마음에 관한 불교의 관점을(그리고 마음과 실재의 관계에 관한 불교의 관점을) 명료하게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실재는 많은 부분 정말로 환영인가?

 

p.47-49

자연선택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었을까? 느낌은 나에게 이로운 대상에 다가가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할 것은, 자연선택은 '특정한 환경'에서 느낌을 설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환경에는 정크푸드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가장 단 음식이라야 과일 정도였다. 그랬기에 단것을 좋아하는 성향은 우리에게 이로웠다(과일은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 즉 우리에게 이로운 것에 끌리게 했다는 점에서 그 느낌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환경이 달라졌다. 영양은 부족하고 열량만 높은 정크푸드가 범람하는 오늘날, 단것을 좋아하는 느낌은 거짓이거나 적어도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느낌은 실제로 이롭지 않은 행동을 이롭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이처럼 거짓인 느낌(또는 진실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운 느낌)은 그밖에도 매우 많다. 이런 느낌들은 처음 인간에게 생겼을 때는 우리 조상에게 이로웠으나 지금은 항상 그렇지는 않다. 보복 운전의 예를 보자. 당신에게 무례를 범한 도로 위 운전자에게 보복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런 욕망이다. 누군가 나를 뿔나게 만들 때 생기는 화라는 불쾌한 느낌에는 쾌락적인 면도 존재한다. 즉, 당신이 느끼는 분노가 '정당한' 분노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붓다도 "분노라는 느낌의 뿌리에는 독이 있으나 그 끝에는 꿀이 발라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연선택이 우리가 정당한 분노에 끌리게 만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소규모 수렵채집 마을에서 누군가 당신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다면(당신의 음식을 훔치거나 당신의 짝을 가로채거나 아니면 단지 당신을 무시했다면) 당신은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당신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당신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당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친밀하고 변화가 느린 사회에서는 나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에 크게 분노하며 상대와 주먹다짐까지 할 필요가 얼마든지 있었다. 설령 싸움에 지더라도(혹은 아주 심하게 얻어맞더라도) 당신은 당신을 무시한 대가를 어떻게든 치르게 된다는 메시지를 주변에 분명히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앞으로 두고두고 당신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었다.

 

이쯤에서 당신은 오늘날 도로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느낌이 가진 불합리성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당신이 보복하고 싶은 무례한 운전자는 당신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을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의 복수 장면을 옆에서 목격하는 다른 운전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경우 당신이 분노를 일으킨다고 해서 당신에게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 이때 당신이 분노를 일으킨 대가는 어떤가? 시속 130킬로미터로 앞 차를 추격하는 행위는 수렵채집 사회의 주먹다짐보다 죽음에 이를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므로 보복 운전에서 느끼는 분노의 느낌은 '거짓'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좋게 느껴지지만 실은 환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느낌에 마냥 끌려간다면 나에게 이롭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도로 위가 아니라 도로 바깥에서 느끼는 분노 역시 거짓 느낌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분노는 좋아야 비생산적이며 최악의 경우엔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명상을 함으로써 느낌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환영을 떨치는 것이 된다. 이 환영은 느낌의 지시를 따르는 순간 당신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환영이자 분노와 원한의 감정이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환영이다. 그렇지만 분노의 느낌은 결과적으로 자기 이익(self-interest)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도 좋은 것일 수 없다. 

 

p.50-51

이런 지각의 오류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긍정 오류(false positive)라고 한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없는 것을 있다고 가정하는 긍정 오류의 성향은 고장이나 결함이 아니라 생명체가 가진 기능적 특징이다. 방울뱀이 틀림없다는 순간적 확신이 백 번 중 아흔아홉 번 틀리고 한 번만 맞는다 해도 당신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자연선택의 계산으로는 생사를 가르는 상황에서 1퍼센트 확률로 맞는 것이 99퍼센트 확률로 틀리는 데 대한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을 크게 놀란다 해도 죽음에 비하면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뱀의 환영은 도넛의 환영이나 보복 운전의 환영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뱀의 환영은 명백한 환영이다. 즉, 주변 세계에 관하여 실제로 거짓인 인식이자 순간적으로 거짓인 믿음이다. 둘째, 뱀의 경우 당신의 감정이라는 기계는 정확히 원래 설계된 방식대로 작동했다. 다시 말해, 뱀의 환영은 환경적 불일치의 결과물이 아니다. 뱀의 환영은 수렵-채집 사회에서 진실이도록 설계된 느낌이 오늘날 환경 변화로 인해 거짓으로 바뀐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선택은 이 느낌이 '거의 언제나' 환영인 느낌이 되도록 설계했다. 이 느낌은 주변 상황에 관한, 그럴 듯하나 진실이 아닌 확신을 우리에게 주입한다. 이것은 자연선택이 세상을 명료하게 보는 것을 목적으로 우리 마음을 설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자연선택은 우리가 세상을 명료하게 보는 지각과 신념이 아니라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한 지각과 신념을 갖도록 마음을 설계했다. 

 

p.58

지금 우리가 느끼는 사회 불안은 진화적으로 '자연스러운' 불안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의 사회 불안이 처음의 환경과 매우 다른 환경에서 생기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오늘날의 사회 불안이 많은 경우 비생산적인 불안이며 불필요한 환영을 만들어내는 이유를 보여준다. 이처럼 재앙이 임박했다는 확신에 가까운 우리의 신념은 진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거짓인 신념과 동시에,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실용적 의미에서도 거짓인 신념이다.

 

p.76

현재에 사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마음챙김 명상이 가진 잠재력이 협소해질 수 있고 불교가 가르치는 핵심에 대해서도 오해할 수 있다. 1장에서 말했듯이 <마음챙김의 네 가지 토대 The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로 알려진 <염처경 Satipatthana Sutta>에는 '지금을 살라'는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 이 경전의 어디에도 '지금'이나 '현재'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에 머무는 것이 2천 년 전 불교 명상가들이 경험한 내용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고대의 마음챙김 경전의 지침에 따라 호흡과 신체 감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자연스레 현재에 존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순도 백퍼센트'의 불교를 경험하고 싶다면, 다시 말해 '빨간 약'을 먹고 환영에서 벗어나 삶의 실상을 깨우치고 싶다면 현재에 머무는 것 자체가 마음챙김 명상의 핵심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현재에 머무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p.90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혁명적 주장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자아의 존재 가능성을 언뜻 내비친다는 점이다.

 

<무아경>의 마지막에 붓다는 자신의 핵심 가르침을 전하며 비구들에게 다섯 무더기를 차례로 살피게 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또 붓다는 "이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는 비구는 욕망을 제거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좋다.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자아가 없다면 자아가 아닌 모든 것을 버린 '그'는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이때 버림의 주체는 누구일까? 애초에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내가 소유하지 않는 것, 내가 아닌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애당초 '나'라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붓다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 너, 그, 그녀' 같은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불교에서 흔히 내놓는 대답은 이렇다. "깊은 차원에서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실재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언어적 관습이라는 실제적인 이유로 일단은 '나, 너, 그, 그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 차원에서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관습적 의미로는 존재한다."

 

p.92-93

붓다는 어느 설법에서 우리가 무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오온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야기한다. 거기서 붓다는 벗어남의 주체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붓다는 의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벗어남으로 의식은 안정되고 의식이 안정됨으로 만족하며, 만족함으로 의식이 동요되지 않는다. 동요되지 않으면 그는 열반을 얻는다." (Samyutta Nikaya 22:53, Bodhi 2000, pp.890-91)

 

붓다는 이처럼 벗어남의 주체가 의식이라고 말함으로써 의식과 나머지 네 무더기의 관계를 흥미롭게 설정한다. 일상적 상태의 의식, 즉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에게 익숙한 의식은 색, 수, 상, 행의 네 무더기에 얽힌(engaged) 의식이다. 붓다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의 의식은 몸, 느낌, 지각, 정신적 형성과 얽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얽힘이란 아직 깨닫지 못한 자가 의식을 통해 네 무더기를 인지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얽힘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자도 '의식을 통해야만' 네 무더기를 인지할 수 있다. 만약 의식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깨달은 자는 의식의 대상이 거의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보다 여기서 얽힘이란 의식과 네 무더기 사이의 강한 연결성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붓다의 표현에 따르면 얽힘은 오온이라는 다섯 무더기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다섯 무더기에 집착한다. 무더기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한다. 그런데 무더기가 자아가 아님을, 즉 무아(not-self)임을 깨닫지 못하면 얽힘은 지속된다.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자신의 감정, 생각 등의 무더기를 자기 소유로 집착한다. 그러나 사실, 무더기는 자아가 아니다.

 

p.99

카페인 과다 섭취로 턱이 조이는 느낌과 치통, 불안 등의 불쾌한 느낌으로부터 초연해진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 있다면 통제의 역설이다. 처음에 나는 이 느낌들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자아' 개념에 따르면 내가 느낌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 느낌들이 내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논리를 따라가자, 즉 통제할 수 없는 느낌을 내 자아의 일부로 보지 않자 나는 그 느낌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내가 그 느낌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그 느낌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 문단에서 '나'란 단어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보면 나는 아직 무아를 깨닫기에 멀었는지 모른다. 그 경험을 하는 중에도, 그리고 이후 그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도 나는 자아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자아에 관한 견해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나의 자아를 정의할 수 있었다. 누가 알겠는가, 이처럼 자아를 새롭게 정의하는 경험이 조금씩 쌓이면 어느 순간 무아를 완전히 깨닫게 될지!

 

p.102

붓다의 말과 의도에 관한 많은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불교 전통의 일부라고 누구나 동의하는 주제는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자아 개념은 실제의 진실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개 자아가 '통제'와 '시간상 견고한 지속'이라는 속성을 지녔다고 믿지만 면밀히 살피면 나라는 존재는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많으며 시간의 흐름에서 고정적 실체를 지니지 않은 유동적 존재이다.

 

p.114~115

왜 자연선택은 인간이 위와 같은 자기 미망(self-delusion)에 빠지도록 뇌를 설계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내가 자신에 관하여 무언가를 믿어야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믿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통제력을 지닌 일관된 행동 주체임을 사람들이 믿게 만들 수 있다면 나에게(더 정확히는 인류의 수렵-채집 조상의 유전자 전파에) 유리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우뇌에 걸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좌뇌에게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을 때 탄산음료를 가지러 간다고 대답한 남성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탄산음료를 가지러 간다는 남자의 대답은 실제로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이 대답은 남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는 자신에게 책임지는 남자, 이유 없이 싸돌아다니지 않는 남자로 사람들에게 비친다. 이 남자를, 다음처럼 진실에 더 가깝게 말하는 남자와 비교해보라. "나는 내가 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말 모릅니다. 나는 때로 나 자신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어떤 일을 하고는 하죠." 만약 이 두 남자가 수렵-채집 부락에서 당신 곁에 거주하는 이웃이라면 당신은 누구와 사냥을 가겠는가? 또 어느 남자와 친구가 되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했다. 협력하거나 우정을 맺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곧 당신의 유전자가 위험에 처한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자신에 관한 일관된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내는 것이 이롭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합리적 자기 인식력을 갖춘 행동 주체로 주변에 알리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을 준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자신의 특정 행동의 실제 동기를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 그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동기의 일관성은 친구나 협력자로서 바람직한 자질이지만 그 자체로 결정적인 자질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 분명하고 일관된 목표를 가졌으나 매번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면, 혹은 팀 차원의 시도에 기여하지 못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의 주변에는 친구나 협력자가 별로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 관한 '일관된'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에 관한 다소 '부풀린' 이야기도 말하고 믿어야 한다. 

 

p.119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의 환영을 갖고 산다. 하나는 '의식적 자아'에 관한 환영으로, 우리는 의식적 자아가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큰 통제력을 지녔다고 착각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환영으로, 우리는 자기를 실제보다 더 능력 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이 두 개의 잘못된 인식을 각각 우리의 자아에 관한 환영과 우리 자신에 관한 환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시너지를 내며 상승한다. 의식적 자아가 통제력을 지녔다고 믿는 첫 번째 환영은 우리가 일관된 행동의 주체라고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우리으 행동에는 언제나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설득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칭찬이나 비난을 받는다면 칭찬과 비난을 받는 내면의 '나'가 존재한다고 여긴다. 한편 우리 자신에 관한 환영은 우리가 '비난'이 아니라 '칭찬'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세상 사람들이 납득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도덕적이고 우수하며, 평균적인 팀 구성원보다 더 유능하다고 믿는다.

 

p.120

만약 나를 다스리는 주인이 의식적 자아가 아니라면, 즉 자아가 통제한다고 여겼던 행동이 실제로 자아가 통제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일까? 또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내리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심리학, 특히 진화심리학에서 흔히 내놓는 대답은 마음이 모듈(module)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마음이 여러 가지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평가하고 판단해 그에 대처하는 수많은 특화된 모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모듈끼리의 상호작용이며, 이것은 많은 부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p.122~123

비양심적인 중고차 판매상처럼 '거래 사기꾼'이 있는가 하면, 배우자를 속이고 외도하는 '성적 사기꾼'도 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사기꾼을 탐지하는 데 같은 모듈을 사용한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두 가지 탐지에 중첩되는 부분도 있다. 예컨대 두 사례 모두에서, 미심쩍은 말을 하는 상대가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지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중복되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두 경우에 사기꾼 탐지 기제를 작동시키는 동기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중고차 판매상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는 동기는 부정한 배우자의 얼굴을 살피는 동기인 질투심과 다르다. 설령 내가 중고차 판매상을 못 믿을 사람으로 결론 내렸다 해도 부정한 배우자를 대할 때처럼 질투심에 찬 분노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나에게 판 차가 고장 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해도 나는 질투심과는 성격이 다른 분노를 일으켰을 것이다). 종합하면,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는 모듈들 사이의 분업 원칙은 '모듈'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만큼 명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 모듈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모듈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러므로 모듈 대신 '네트워크'나 '시스템' 같은 용어가 더 적합할 수도 있다. 

 

p.129

심리학자들은 매력적인 여성의 사진을 남성들에게 보여주자 남성들의 시점 간 효용함수, 즉 미래를 할인하는 정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력적인 여성의 사진을 본 남성들은 나중에 더 많은 현금을 준다 해도 웬만해서는 당장의 현금을(실험자들은 남성들에게 진짜 현금을 지급했다)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시간 할인과 짝 구하기 모드에 관한 연구는 다음을 참조: Wilson과 Daly 2004. 다음도 참조: Kim과 Zauberman 2013)

 

p.130

당신은 대중의 성향을 추종하는 유형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가는 유형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이다. <마케팅 리서치 저널>의 연구는 광고 카피를 선택할 때 미디어 맥락에 적합한 카피가 광고 효과가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Griskevicius 외 2009) 실험자들은 한 그룹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샤이닝> 같은 공포영화의 장면을, 또 다른 그룹에는 <비포 선라이즈> 같은 로맨스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각 그룹에 미술관 광고 카피를 각각 다르게 제시했다. 공포영화를 본 그룹에는 "매년 백만 명 넘게 방문합니다"라는 카피를, 로맨스 영화를 본 그룹에는 "사람들과 같아지지 마세요. 특별해지세요"라는 카피를 보여주었다.

 

<샤이닝>을 본 사람들은 미술관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며 방문하고 싶어했다. 이는 아마도 공포영화를 보고 두려움에 빠진 실험 참가자들이 사람이 많은 장소를 안전한 피난처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비포 선라이즈>를 본 사람들은 앞의 그룹과 반대로 행동했다. 영화를 보고 로맨틱한 기분을 느낀 참가자들은 사람들이 없는 은밀한 장소를 선호했다.

 

p.143

불교와 현대 심리학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인간의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자아, 의식적 주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매순간 번갈아가며 삶이라는 쇼를 연출하는(어떤 의미에서 쇼의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위임받은) 자아'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자아들의 집합이 쇼를 연출하는 방법은 느낌을 통해서다. 그렇다면 쇼에 변화를 주는 한 가지 방법이 우리의 일상에서 느낌이 하는 역할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은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일상의 삶에서 느낌의 역할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마음챙김 명상보다 좋은 것은 없다.

 

p.146

과학과 명상의 관계는 오히려 반대다. 즉, 명상에서 자신의 마음에 관하여 관찰한 내용으로 과학 이론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학 이론의 도움으로 명상에서 관찰한 내용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만약 마음의 작동에 관한 믿을 만한 과학 모형과 일치하는 내용을 명상 중에 관찰했다면 당신은 명상으로 마음의 역동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믿을 이유를 갖게 된다. 

 

마음에 관한 모듈 모형을 예로 들어보자. 마음에 관한 모듈 모형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과학적 이유는 충분하다. 마음에 관한 모듈 모형이 진실로 마음에 관한 정확한 그림을 그려준다고 하자. 그리고 '통찰 명상'이라고도 불리는 위빠사나 명상이 정말로 마음의 작동 방식에 관한 통찰을 준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위빠사나 명상으로 모듈로서의 마음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관찰할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다.

 

p.156

생각이 지어내는 드라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즉 생각이 나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내 앞으로 그저 지나갈 뿐임을 볼 수 있다면) 무아의 경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 순간, 당신은 지금까지 생각의(또는 다른 모든 행위의) 주체로 여겼던 '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자아의 실체 없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앞서 5장에서 본 것처럼 무아에 관한 붓다의 최초의 가르침은 난해한 형이상학적 진실이라기보다 실용적인 전략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즉, 자아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가 자신의 자아라고 생각하던 것을 일부 내려놓는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명료해지고 더 좋은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무아의 실용적 전략은 골드스타인이 말하는 다음의 관점으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생각의 본성에 관한 기본적 지혜를 갖는다면 건강한 생각은 선택하고 건강하지 않은 생각은 내려놓는 힘을 갖게 됩니다."

 

p.170-171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모두 설명된다. 결국, 느낌이란 원래부터 동기 유발의 도구였던 것이다. 좋은 느낌, 나쁜 느낌은 자연선택이 생명체로 하여금 특정 대상에 다가가거나 특정 대상을 피하게 만드는 도구였다. 그래서 잡아먹는 활동에는 좋은 느낌이, 잡아먹히는 활동에는 나쁜 느낌이 할당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들은 조금씩 더 똑똑해졌지만, 그 핵심은 느낌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느낌에 더 좋은 정보를 주는 것이었다. 이때 느낌에 더 좋은 정보를 주기 위해 사용한 도구가 바로 지능이었다. 지능은 동물들이 무엇에 접근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파악하도록 도왔다. 다시 말해 무엇을 좋게 느끼고, 무엇을 나쁘게 느껴야 하는지 알게 해준 것이 지능이다.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느낌에 유용한 정보를 주는 계산법은 점점 정교해졌지만 삶의 동기를 유발하는 궁극의 요인이 느낌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최신 유행의 롱패딩을 구매할 때 장시간의 인터넷 검색과 오랜 고민을 거치는 이유도 이 모든 합리적 분석을 통해 결국 자신의 구매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서다. 또 애당초 롱패딩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는 이유도 겨울에 추우면 '나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느낌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또 생각을 끝낸 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준다. 진화의 역사에서 생각은 점점 더 큰 역할을 해왔지만, 생각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느낌이 있었다.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일어난 일은 또 있다. 점점 더 많은 일에 느낌이 할당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점점 복잡한 사회적 동물이 되면서 음식을 얻고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내 편을 만들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는 등 사회적 상황에서 적절히 처신해야 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 좋은 느낌이 들고, 반대로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면 나쁜 느낌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저 친구는 왜 나에게 발끈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까?"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일련의 느낌과 생각도 결국 생존과 유전자 전파라는, 진화가 애초에 인간에게 심어놓은 기본 가치 체계의 단순한 연장에 불과했다. 

 

p.176

나는 "초콜릿을 먹는 행위의 장단점을 따져본 뒤 먹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커즈번에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것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고칼로리 음식을 먹도로 설계된 특정 시스템이 있어요. 이 시스템은 특정한 동기와 신념, 생각을 갖고 있죠. 또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와 다르게 당신의 장기적 건강과 관련된 동기를 가진 시스템도 있는데 이 시스템 역시 초콜릿에 관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어요. 당신이 초콜릿을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장기적 건강을 중시하는 모듈이, 단기 모듈로 촉진되는 행동을 억제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두 모듈 중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모듈 가운데 그 날은 유독 하나가 다른 것보다 힘이 셌을 뿐입니다."

 

p.178

때로 우리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숙고할 때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은지 친구나 가족과 상의한다. 이때 그 결정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논리를 숙지하고 있으면 더 생산적으로 상의할 수 있다. 물론 이때도 '홍보'라는 의제가 일정 부분 개입한다. 이 경우에도 상의는 가까운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미리부터 보내는 방법인 것이다. 또 상의는 내가 내린 결정을 다른 사람들(가깝지 않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경우, 가까운 사람들(가족의 친구)의 지지만이라도 확실히 얻어내는 방법이 된다. 물론 나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처럼 여기는 사람과의 상의는 말 그대로 조언을 구하는 행위일 것이지만.

 

어쨌거나 경합하는 모듈들이 지어낸 이유와 구실을 의식적 마음이 인지하면 좋은 점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타인과 공유하며 그들의 피드백을 받는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듈이 지어낸 이유를 타인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피드백을 통해 찬성과 반대 각각의 선택에 대해 당신이 얼마나 좋게(또는 나쁘게) '느껴야' 하는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p.189

일반적으로 니코틴 중독과 주의 지속 시간이 짧은 문제에 공통점이 있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두 문제 모두 충동 조절의 문제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충동을 약화시키는 비결은 원칙적으로 충동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자연스레 일어나도록 내버려둔 채로 그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충동을 발생시킨 모듈의 긍정 강화 기제를(즉, 다음번에 더 큰 힘을 부여하는 강화 기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

 

p.196-197

우리가 사는 세계는 3차원이지만, 우리는 2차원의 데이터 필드를 통해 세계를 본다. 즉, 우리는 3차원의 세계를 눈으로 '직접' 본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두 눈의 망막에 부딪히는 빛의 점들을 통해 보는 것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3차원의 세계를 깊이 보려면 세계에 관한 피상적인 2차원의 데이터를 가지고 '이론'이라는 것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론은 틀리는 수가 있다. 3D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볼 때 당신의 뇌는 영화 속 괴물이 금방이라도 스크린에서 뛰쳐나와 객석으로 돌진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안경을 벗고 보면 당신 앞에 있는 것이라고는 흩어진 팝콘뿐이다. 또 기하학적 착시의 고전적 사례인 뮐러-리어 도형에서도 우리는 두 선의 길이가 실제로 같음에도 서로 다르다고 느낀다.

 

이 착시 현상의 원리는, 우리의 마음이 안구에 박힌 2차원의 패턴을 가지고 만들어낸 가설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2차원의 패턴에 대해 마음이 만들어낸 가설이 실제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 착안한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성 인간의 마음이 만드는 가설은 대부분 실제 사실과 부합한다. 우리의 마음은 2차원의 데이터를 가지고 3차원의 실재에 관한 모형을 '꽤 잘' 구성해낸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진 다섯 감각은 각자 맡은 일을 아주 잘 해낸다. 대개 우리가 눈으로 보는 나무는 나무가 맞고, 귀로 듣는 비행기 소리는 실제로 비행기 소리가 맞는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엄밀히 말해 우리가 오감으로 지각하는 내용이 실은 구성된 것(construction)이라는 점이다. 세계에 관한 모형을 끊임없이 세워가는 지각(perception)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 과정이다. 로르샤흐 검사의 잉크 반점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다른 이유도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모호한 패턴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패턴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특정 사물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내기 좋아한다. 

 

그런데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사물에 관하여 지어내는 이야기가 조금씩 떨어져나간다. 예를 들어 나는 가끔 소리 명상을 하는데, 숨을 들이쉴 때는 호흡에 집중하고 숨을 내쉴 때는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는 식으로 한다. 아니면 들숨, 날숨과 상관없이 소리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실제로 명상 수련회에서 나는 한 세션 내내 소리 명상만 하기도 한다. 소리 명상에 깊이 침잠하면 실제로 우리가 지금껏 소리에 덧씌웠던 이야기가 떨어져나갈 수 있다. 

 

p.204-205

나는 나라얀에게 '형상 없음'의 의미에 대해 더 캐물었다. 그녀는 '형상 없음'이 곧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물리적 세계에 구조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느냐는 나의 생각에 그렇다고 답했다. 테이블도 존재하고, 전기톱도 엄연히 존재한다.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뒤 나는 그녀가 말하는 핵심을 알았다. 나는 물었다. "그러니까 '형상 없음'은 세계에 관하여 우리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실은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덧붙였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녀가 말했다. "정확해요."

 

여기서 '형상 없음'이라는 가르침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무의미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주관적 경험을 하며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는 고유한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불교 사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이다. 생명체가 본래 지닌 도덕적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돕고 개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의 행위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적 의미는 본래부터 생명에 내재해 있다.

 

다만 나라얀이 말한 핵심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거대한 형상을 취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만약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또 특정 물건을 소유해야 하고 특정한 성취를 이루어야만 한다고 판단하고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모든 것이 끔찍해진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이렇듯 우리는 모든 것의 좋음과 나쁨에 대해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p.217-218

인간은 자동적 평가자라는 자이언스의 생각이 옳은 것 같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명사 앞에 형용사를 붙이는' 성향을 가졌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이언스의 말이 옳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볼 때, 생명체가 사물을 지각하는 목적은 자신의 진화적 관심사에 (즉 자신의 유전자 확산에) 적합한 정보를 가려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생명체는 특정 정보가 자신의 유전자 확산에 적합한지 어떻게 아는가? 바로, 자신이 지각한 정보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을 통해 안다. 이처럼 생명체는 사물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만들어졌고, 이 판단은 '느낌'이라는 형식으로 부호화된다. 

 

인간처럼 복잡한 종에 있어서는, 특정 사물이 자신의 진화적 관심사에 얼마나 적합한지가 항상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줄자는 인간이 지금까지 진화해온 수렵-채집 환경에 없었던 물건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궁금한 점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 같은 사람이 물건의 길이가 궁금할 때면 줄자가 답을 주었다. 내가 줄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줄자를 사용하면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이유는 어릴 적 내가 존경했던 사람이 줄자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분명한 점은, 사물을 지각할 때 언제나 느낌이 따라붙는다고 해서 긍정적 부정적 느낌을 갖는 모든 사물이 실제로 나의 유전자 확산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사물에 느낌을 부여하는 우리 마음의 기제가 '원래는' 유전자 확산을 극대화시키는 목적이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런데 이 기제가 수렵-채집 환경이 아닌 현대에서 더 이상 유전자 확산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처한 모순적 상황 가운데 하나이다.

 

p.219-220

생명체가 관심을 갖는 사물은 대개 진화적 중요성을 가진 사물로서 이 사물들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지각의 풍경(즉,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또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사물들로 이루어진 풍경)에는 아무리 미세하게라도 느낌이 배어 있다. 만약 전혀 느낌을 일으키지 않는 사물이라면 당신은 애당초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 지각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형은 중년에 이르러 더 이상 여성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이 내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내가 못생겼기 때문이 아냐. 단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라서야." 정확한 말이다! (동성애자가 아닌) 어느 여성이 도시의 한 구역을 걷고 있다고 하자. 그 곳에는 그녀가 관심을 가질 만한 사물이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이때 그녀의 지각 기관은 시간을 들여 의식적으로 평가할 가치가 없는 사물들을 먼저 쳐낸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사물에는 우리 형도 포함된다(더 슬픈 일은 형이 이 '지위'를 얻었을 때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젊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평가가 필요한 사물이면 '느낌'이라는 형식으로 그녀의 평가에 반영될 것이다. 잘생긴 젊은 남성이라면? 그리 잘생기진 않아도 착해보이는 남성이라면? 잘생겼지만 성깔이 좀 있어 보이는 남성이라면? 또 우리 형과 비슷한 연배로 형과 다르게 롤렉스시계를 차고 1억 원짜리 차를 모는 남성이라면? 이 모든 남성들은 나름의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사물은 원칙적으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p.228

본질에 의해 생겨나는 이야기는 어떤 때는 경험을 축소시키는 이야기이고("이건 단지 나무일 뿐이야.") 어떤 때는 경험을 확대시키는 이야기이다("이 와인은 환상적이야. 이 줄자는 JFK가 사용하던 줄자야.") 그래서 본질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면 경험 자체에서 멀어지거나 아니면 경험을 부풀려 왜곡시키는 수도 있다.

 

어쨌건 웨버는 사물에 대한 감정 반응을 강하게 일으키면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짓게 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그의 관점은 타당하다. 또 이야기와 감정을 내려놓을 때 사물의 고유한 본질이라고 여겼던 것이 줄어든다는 그의 말도 내게는 타당해 보였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즉 우리의 감각 경험 이면에 자리 잡은 이야기와 배경 지식을 모두 벗겨내고 허무는 일이 가능할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때 우리의 뇌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p.230

사실, 본질이란 마음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본질에 상응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사물에 이야기를 덧붙인다. 또 이야기는 사물에 대한 진실 또는 거짓인 느낌을 형성시킴으로써 사물 자체를 형성시킨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사물은 이런 과정을 거쳐 완전한 형상을 취하게 된다. 

 

p.233-235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그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허술한 증거를 가지고도 꽤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인이 말을 하거나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짧은 동영상을 보고 그 사람의 직업적 역량이나 지위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데 이는 상당 부분 객관적 평가와 일치한다고 한다. 음성 없는 동영상을 보여주어 비언어적 단서밖에 갖지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30초 뒤에 내린 평가도 5분 뒤에 내린 평가와 거의 비슷한 정확도를 보인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의 두 심리학자는 이런 단편적 판단에 관한 수십 개 연구를 분석했다.(Ambady와 Rosenthal 1992) 그들이 내린 결론은 판단자는 아주 짧은 시간을 관찰하고도 관찰 대상의 근저에 놓인 안정적 본질을 포착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판단자란 위 실험에서 사람들을 관찰한 피험자들을 가리키지만 실은 '우리 모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대상에 대해 일정한 판단을 내리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우리는 터무니없이 피상적인 증거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외모가 매력적인 사람이 업무 역량도 더 뛰어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이런 판단이 타당할 수도 있다. 외모가 매력적이면 사회적으로 더 수월하게 자기 생각을 관철할 수 있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지렛대로 삼아 업무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적 판단의 경우에는 외모를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외모가 매력적이라고 해서 더 사려 깊거나 더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사람의 도덕성에 대한 판단과, 능력과 지위에 대한 판단의 경우에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한 가지' 기준만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점이다. 많은 실험이 이 점을 보여주지만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다. 다음 경우에 당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떠올리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에 엎어져 다친 사람을 돕는 누군가를 당신이 본다고 하자. 아마 당신은 그를 두고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길에 엎어진 사람을 무시한 채 급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릴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곤경에 처한 이를 도우려고 가던 길을 멈춘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닌가? 반면, 아무리 바빠도 다친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면 나쁜 사람이 아닌가?'라고.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 1973년 발표된 유명한 연구는 이 점을 보여준다. 연구를 수행한 프린스턴 대학의 두 심리학자는 실험에서 피험자가 곤경에 처한 낯선 사람을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기회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두 심리학자는 실험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피험자가 지나는 길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숙이고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노숙자 같은 사람을 배치한다. 피험자가 곁을 지나가면 이 사람은 머리를 숙인 채로 두 번 기침을 하고 신음소리를 낸다." (Darley와 Batson 1973, p.104)

 

피험자 가운데 일부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고 가던 길을 멈추었고, 일부는 그냥 지나쳤다. 만약 당신이 옆에서 이 장면을 줄곧 지켜보았다면 당신은 도움을 준 사람에게서 '선한 사람'의 본질을, 그냥 지나친 사람에게서 '나쁜 사람'의 본질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도움을 주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 실험은 장차 목사가 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대학원생들에게 학교 근처 건물에서 간단한 즉석 설교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어떤 원생에게는 설교 시간에 늦었으니 서둘러 달라고 말했고, 또 어떤 원생에게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설교 시간에 늦었다는 말을 들은 원생 중에는 단 10퍼센트만이 노숙자를 도운 반면, 여유가 있다는 말을 들은 원생 중에는 63퍼센트가 노숙자를 도왔다. 시간 여유가 있다고 전해들은 원생의 63퍼센트가 도움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좋은 사람'의 본질을 가졌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급하지 않음'이라는 본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p.239-240

타인에 대한 평가가 언제나 편견에 빠지게 되는 상황적 요인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내 눈에 들어올 때 그것은 언제나 내가 지켜보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내가 곁에 없거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행동할 때는 지금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변수를 무시한 채 단지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그들의 본질로 본다. 이는 사람들이 선함과 악함이라는 본질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자기 보호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우군은 선의 본질을 지녔고, 경쟁자와 적은 악의 본질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자기 보호라는 측면에서 편리한 것이다.

 

p.240-241

기질을 간과하고 상황을 과장하는 경우에는 두 종류가 있다. (1) 적과 경쟁자가 착한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상황에 귀인 시키는 경향이 있다(나의 적이 거지에게 돈을 준 이유는 우연히 거기 있던 낯선 여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 등). 그리고 (2) 가까운 친구와 우군이 나쁜 행동을 했을 때도 거기에는 피치 못할 상황이 작용했다고 본다(귀찮게 구걸하는 거지에게 내 여자친구가 소리를 지른 이유는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다 등).

 

고무줄 같은 이런 해석의 자의성은 개인으로서 우리의 삶뿐 아니라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사회심리학자 허버트 켈먼에 따르면 우리가 지닌 해석의 자의성 때문에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 된다. "특정 대상이 특정한 본질을 지녔다고 보는 귀인 메커니즘 때문에...... 처음에 그린 적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진다. 상대의 적대적 행동의 원인을 그들이 가진 속성, 즉 본질에서 찾음으로써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적의 성격에 더 확실한 증거를 댄다. 반면, 적이 보이는 유화적 행동은 전술적 책략이나 외압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으로 해석한다. 아니면 불리한 입장을 모면하려는 상황적 요인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하면 처음에 그린 적 이미지를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 (Kelman 2007, p.97)

 

p.246-247

집단이기주의 심리를 그저 인간이 가진 일반적 심리의 지나친 사례로 간주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 자연선택은 인간의 마음을 개인 간, 집단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어떻게든 견디며 살도록 설계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갈등을 견디는 데 최적화된 정신 기제 중 하나가 바로 사물의 본질을 보전시키는 심리 기제다. 그래서 똑같은 악행을 저질러도 내 편보다 적에게 비난의 화살을 더 많이 돌린다. 또 내 편의 고통보다 적의 고통을 더 무심하게 바라본다. 어쩌면 '무심하다'보다 '만족감을 느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지 모른다. 자연선택은 인간의 뇌에 정의감이라는 도덕적 장치를 심어놓았다. 정의감은 선한 행동은 보상받아야 하고 악한 행동은 처벌 받아야 한다는 직관이다. 우리는 악행을 저지른 자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며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 대개 나쁜 행동의 유죄 책임은 '편리하게도' 적과 경쟁자에게 주어지는 반면, 친구와 우군이 악행을 저질렀을 때는 특정 상황의 희생양이므로 가혹한 처벌을 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친구와 우군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한 경우는 예외다. 친구와 우군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한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와 우군'의 범주에서 삭제할 것이다.

 

p.256

나는 느낌과 본질의 관계에 대해 스님과 더 이야기하고 싶어 말했다. "자유란, 판단적이고 감정적인 의미를 사물에 덧붙이지 않을 때 생기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사물에 지나치게 강한 본질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 아닐까요?"

 

스님은 공감의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따. "정말 그렇습니다."

 

p.276

<초전법륜경>이라는 설법에서 붓다는 고통과 불만족으로 번역되는 '둑카'의 원인과 치료법인 사성제를 이야기한다. 붓다는 둑카의 근본 원인은 딴하(tanha), 즉 갈애 또는 욕망이라고 진단한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만족을 모르는 갈애라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을 채우고도 더 많이 또는 다른 것을 갈망하면서 항상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 붓다의 진단이다.

 

p.281

갈애가 자아감각을 키운다는 생각은 불교 경전에 흔히 보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을 멀리하라는 권고에 잘 드러난다. 팔리어로는 각각 라가(raga 혹은 로바 lobha), 도사(dosa), 모하(moha)라고 한다. 수행자들은 명상 수련회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여기서 탐욕은 소유에 대한 갈망만이 아니라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탐욕, 즉 모든 종류의 집착을 가리킨다. 또 증오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부정적 느낌, 즉 혐오의 느낌을 말한다.

 

다시 말해 탐욕과 성냄의 두 가지 독은 갈애가 가진 양면으로 볼 수 있다. 탐욕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갈망이며, 성냄은 불쾌한 대상에 대한 혐오이다. 그런데 갈애가 자아감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면 탐욕과 성냄의 두 가지 독이 세 번째 독인 미망과도 엮여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사실 불교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망이 자아가 존재한다는 미망이다. 그러므로 탐욕과 성냄의 두 가지 독은 미망이라는 세 번째 독을 일으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탐욕과 성냄을 합하면 미망이 되는 것이다.

 

이 등식에서 미망의 자리에 또 하나의 잘 알려진 미망, 즉 본질이 존재한다는 환영을(그리고 이 환영을 꿰뚫어보는 공의 통찰을) 집어넣으면 더욱 큰 타당성을 갖는다. 사물에 본질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직고나은 12장에서 보였듯이 사물의 지각에 스민 느낌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느낌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성향, 즉 사물에 대한 끌림이나 갈망 또는 혐오라는 성질을 갖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이들 느낌에는 어느 정도 탐욕과 성냄의 요소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물이 본질이 존재한다고 잘못 지각하는 경우, 세 번째 독인 미망은 결국 나머지 두 개의 독심으로 귀결된다.

 

p.285-286

'조건 지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암호를 푸는 확실한 방법으로 '조건 지어진 상태'란 어떤 의미인지 물을 수 있다. 불교에서 '조건 지어진 상태'란 일체의 현상이 원인에 따라 생긴다는 의미이다. 이는 타당해 보인다. 물이 끓는 조건, 비가 내리는 조건, 범죄율 상승의 조건 등 특정 현ㅅ아의 조건이란 곧 그 상태를 발생시킨 원인 - 결과의 연결고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조건 지어진 사물'은 원인에 따른 결과로 생긴 사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조건 지어지지 않은 상태인 열반은 원인에 따른 결과로 생기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런데 원인에 따른 결과로 생기지 않았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연기(緣起)와 관련된다. 연기는 팔리어로 빠띠짜 - 사무빠다 (paticca - samuppada)라고 한다. 연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며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열반의 논리를 규명할 때는 '조건 지어진 발생'이라는 용어가 적절해 보인다.

 

일반적 의미에서 조건 지어진 발생이란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기본적인 인과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이런 조건에서는 이 사물이 발생하고, 저런 조건에서는 저 사물이 발생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조건 지어진 발생은 인과적 연결 관계의 특정 순서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인간을 끝없이 윤회의 굴레에 가두는 12가지의 연쇄적 조건(12연기)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조건 지어지지 않은 열반이란 이 12가지 인과의 연결고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p.288

인간의 뇌는 뇌에 부딪혀 오는 감각 입력에 자동 반응하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기계와 같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뇌는 처음부터 감각 입력에 통제당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통제의 기계에서 핵심 부분은 감각 입력에 반응해 일어나는 느낌이다. 만약 이 느낌들에 갈애로 대응한다면(즉 즐거운 느낌에는 갈망으로, 불쾌한 느낌에는 혐오로 반응한다면) 당신은 주변 세계에 계속해서 통제당할 것이다. 반면, 느낌에 자동 반응하지 않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느낌을 관찰한다면 감각 입력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당신의 일상 행동을 좌우하던 원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건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p.292~293

마음챙김 명상의 참된 향상은, 느낌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인지와 생각,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더 잘 아는 데 있다. 어떤 원인이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 더 잘 알아차린다는 점에서 불교의 깨달음(enlightenment)은 서양 과학에서 말하는 계몽(enlightenment)과도 일정한 관련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흔히 마음챙김 명상을 따뜻하지만 모호한 성격의 반이성적 활동으로 여기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어긋난다. 마음챙김 명상에서느 자신의 느낌과 접촉하되 판단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음챙김 명상은 분노, 사랑, 슬픔, 기쁨 같은 느낌을 전에 없던 민감성으로 경험하게 한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느낌의 질감을 보고 느낀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판단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느낌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이름표를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낌으로부터 도망가거나 그것을 무작정 좇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우리는 느낌들에 충분히 다가가면서도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다. 느낌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껴지는지 가만히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지만 이것이 이성적 기능을 포기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이성을 더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제 당신은 느낌을 이성적 분석 아래 놓는다. 이성적 분석을 통해 어떤 느낌이 나를 인도할 올바른 등불인지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그러므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함은 궁극적으로 느낌이 당신을 '대신해' 판단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느낌과 접촉한다'함은 궁극적으로 느낌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럴 때 당신이 세상에 반응하는 방식은 세계에 관한 최대한의 명료한 관점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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