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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투자

준비 그리고 기다림 - 집중투자의 정석

by Diligejy 2023. 9. 9.

이 글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https://link.coupang.com/a/9yfCV

 

집중투자의 정석 : 거대한 부를 창출한 대가들의 진짜 투자 기법

COUPANG

www.coupang.com

 

옛날에 닭 싸움을 아주 좋아하던 왕이 용맹한 싸움닭을 구하여 '기성자'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최강의 투계(鬪鷄)로 조련하도록 명하였고, 열흘이 지나서 물었다. 

“닭이 이제 싸우기에 충분한가?”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오직 자신이 최고라는 오만함이 심하여 그 교만한 아집을 떨쳐내야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난 다음 왕이 다시 묻자 조련사가 대답했습니다. 
“이제 겨우 겸손을 익혔지만 상대의 소리와 움직임에 너무 쉽게 반응하는 것이 심하여 아직 멀었습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나서 조련장을 찾은 왕이 물었습니다. 
“이제 되었는가?”
“아직 멀었습니다. 간신히 참을성을 갖췄지만 상대방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다시 열흘을 기다린 후 왕이 묻자, 그제야 조련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제 된 듯합니다. 이제 겸양을 갖추었고,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어떤 상대에게도 가볍게 동요하지 않고,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며 실체를 볼 수 있는 나무로 깍은 목계(木鷄)와 같은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어떤 상대라도 이 닭과 마주 서면 고개를 숙이고 부리를 감출 것입니다.”

-장자(壯者) ‘달생(達生)’편-

이 책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기다림이다.

하지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기다리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시장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확신이 들 때까지 준비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미스터 마켓은 조울증 환자라 감정 기복이 심한 영업사원이다. 그럴 때 대처하는 방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미스터 마켓의 감정 기복에 맞춰 미스터 마켓이 제안하는 가격 모두를 사들이는 것. 즉 분산 투자, 그 중에서도 인덱스 펀드에 해당한다. 이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미스터 마켓이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치든 상관없다. "알았어. 그냥 다 맞춰줄게." 라며 모두 구매하는 것이다. 미스터 마켓이 아무리 조울증 환자라고 해도 제안을 다 받아들인 이상 감정 기복은 더 이상 드러낼 수 없다. 뻘쭘해진 미스터 마켓은 자신에게 모든 걸 맞춰준 분산 투자자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줘서 고맙다며 댓가를 지불한다. 물론 그게 양(+)일지 음(-)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다른 방법은 미스터 마켓이 요동을 치며 제안을 할 때 생각하는 의자에 앉히고 투자자 또한 생각하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생각을 시작한다. 아니 이미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미스터 마켓과 그의 제안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주가라는 가격만을 제시했지만 주가는 기업의 소유권의 일부를 가지기 위한 비용이다. 즉 기업을 제대로 보아야 그의 제안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미스터 마켓은 그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그저 빨리 주가에 반응해달라고 애걸복걸한다. 그래야 회사에 가서 세일즈에 성공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중투자자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엄격하고 깊이 따져본 다음 미스터 마켓이 제안하는 가격이 매우 낮은 가격이라는 확신이 들 때에만 그의 제안을 받아준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도 미스터 마켓의 세일즈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세일즈를 한다. 

 

거래를 성사시킨 뒤에는 다시 생각하는 의자에 앉는다. 기다리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위한 준비를 위해서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3개(멍거) ~ 20개(이론 상 최적 종목개수) 종목에만 집중투자 한다는 것이 공부량이 적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만들려면 매우 높은 온도와 압력을 가해야 만들어지듯, 불필요한 종목들을 빼내고 핵심이 되는 종목을 발견하기 위한 공부는 어쩌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랜 기간 기다림을 견뎌낼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루 심프슨, 멍거, 케인스 등 저명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집중투자에 대해 깊이 설명하고 있다. 보다보면 결국 핵심은 종목 개수가 몇 개냐가 아니라, 얼마나 준비했고 자신의 능력범위를 인지하는지로 귀결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케인스의 경우, 거시경제의 학파를 만들만큼 위대한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거시경제적 지식을 이용한 예측 투자에 실패해서 몇 번을 청산당했다. 케인스조차 자신의 능력범위를 모를 수 있다는 말이고, 그는 능력범위를 인지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기다린다. 런던이 폭격을 당해도, 덩케르크에서 군인들이 겨우겨우 철수해도 기다린다. 그리고 미스터 마켓은 변화하고 기다린 그에게 댓가를 지불한다.

 

책 서두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저자들은 경고를 잊지 않는다. 함부로 따라할 수 있는 기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뮤추얼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에서는 당연히 법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고, 개인은 집중투자를 할 만큼의 시간과 기질 그리고 자금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글쎄... 이 책은 분명 집중투자를 권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고, 집중투자의 강점을 강조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투자자 자신의 환경에 맞는 최적화가 아닐까. 책에서 나오는 비유처럼 피카소가 그림그리는 법을 알려준다고 해서 피카소처럼 성공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결국 우리는 피카소가 아니고, 밥 로스 아저씨가 아니기 때문에 각자에게 맞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다. 

 

허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며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루 심프슨, 케인스, 멍거, 소프, 버핏, 그리넬대학 할 것 없이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사업을 깊이있게 관찰했고 이해했다. 그것에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말이다. 지금 당장 집중투자를 할 수 없더라도 마치 은퇴준비를 하듯 하나씩 기업들을 살펴보며 기업들이 어떤 사업을 하고 있고, 어떻게 시장이 돌아가는지 관찰하는 연습을 한다면 베팅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만으로도 집중투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밑줄긋기

p.5

종목이 하나일 때의 위험을 100%로 했을 때, 종목이 두 개가 되면 위험이 24%포인트 감소하여 76%가 되고, 네 개가 되면 추가로 16%포인트 감소하여 60%가 된다. 종목이 8개가 되면 단일 종목 포트폴리오 대비 위험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49%가 되지만, 이후는 종목을 추가할 때마다 위험이 줄어드는 정도가 현저히 작아진다. 종목이 20개인 포트폴리오는 단일 종목 포트폴리오 대비 44%의 위험을 지닌다. 종목이 50개가 되어도 위험은 여전히 41%나 된다. (여기서의 위험은 단일 종목 포트폴리오의 표준편차 대비 해당 포트폴리오 표준편차의 비율을 뜻한다.)

 

p.6-7

버핏은 한 인터뷰에서 "투자의 첫 번째 원칙은 돈을 잃지 않는 것이고, 두 번쨰 원칙은 첫 번째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다음 발언이 더욱 의미심장한데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사고, 그걸 묶음으로 사면, 웬만해서는 돈을 잃지 않는다."라고 했다.

 

"가치보다 싸게 사되, 묶음으로 사라" 가치를 잘 분석해서 가치보다 가능한 한 싸게 사는 것은 훌륭한 투자의 핵심 요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가치를 철저히 분석하더라도 해당 투자에서 실제 이익을 거두기에는 여러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보다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좋은 투자 건을 다수로 '묶어서', 즉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투자해야 좋은 투자가 될 수 있다.

 

집중투자의 대가로 꼽히는 워런 버핏이 분산투자를 강조했고 실제로도 분산투자를 통해 큰 부를 축적했는데, 집중투자와 분산투자 중 무엇을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대답은 워런 버핏의 또 다른 스승 필립 피셔로부터 찾을 수 있다. 피셔는 저서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 9장에서 집중투자의 위험성에 동의하면서도, 분산투자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25개 이상의 많은 종목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는 게 아니다. 투자자 자신이 정말 잘 이해하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종목이 그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p.8

결국 위험이란 기업이 사업을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지, 주주를 위해 정직하게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고, 투자자가 이러한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투자했다면 상당히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주식이라는 자산을 사면서 주식이 '기업의 자기자본에 대한 소유권'인 것도 모른다면 단기간에 돈을 번다 해도 장기간에 걸친 최종 결과는 자명하지 않은가? '액면가'와 '이자'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채권에 투자하는 사람을 상상하기는 어려운데, 자기자본과 순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주식을 사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이런 식으로 주식을 산다면 아무리 많은 주식에 '분산투자'한다 한들 '진짜 위험'은 감소하지 않는다.

 

p.9

위험은 종목 개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 모르는 자산을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다.

 

p.10

투자는 확률적인 미래 전망에 기초하여 판단해야 한다. 케인스는 버핏과 마찬가지로 "확신하지 못하는 여러 분야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보다, 확신하는 종목 소수를 대량으로 보유하는 편이 낫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확신이 착각일 수도 있다"며 확률 계산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여담이지만 케인스가 혼을 담은 첫 번째 역작은 <확률론>이었다.)

 

p.15

두 가지 중요한 유의사항이 있다. 

 

첫째, 집중투자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기법이 아니다. 글렌 그린버그에 의하면 피터 린치는 집중투자자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수많은 종목을 보유했다. 집중투자는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려는 사람에게만 적합한 기법이다. 투자가 본업이 아닌 사람이라면 시간이 부족하므로 인덱스펀드나 유능한 집중투자 펀드매니저를 찾아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두 번째 유의 사항은 더 중요한데, 투자 전문가는 물론 아마추어 투자자에게도 적용된다. 아래 전설적인 무술인 이소룡의 겸허한 통찰에 잘 요약되어 있다.

 

목표를 세운다고 반드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확실히 해두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p.23-24

종목 비중은 확률을 바탕으로 결정해야 하며, 위험 대비 보상이 이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면 비중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대가들과 켈리 공식은 주장한다. 여기서 위험은 흔히 학계에서 말하는 변동성이 아니라 원금 손실이 확정적으로 발생할 확률을 뜻한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우리 대가들은 원금 손실이 호가정적으로 발생할 확률이 낮으면 일시적인 평가 손실은 기꺼이 감수한다. 즉 자산, 독점력, 재무 구조가 건전해서 안전마진이 충분한 종목을 발굴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대가들의 학창 시절 전공은 영문학에서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투자철학은 매우 비슷하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군중과 우리 대가들을 구분해주는 공통점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기질이다. 2011년, 투자에 성공하려면 지능과 기질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버핏은 기질이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좋은 소식은, 지능이 높지 않아도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지능지수가 160이라면 그 중 30은 투자에 필요 없으므로 팔아버리세요. 실제로 필요한 것은 올바른 기질입니다. 투자자는 남의 견해나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중략) 

투자자라면 남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기업과 산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휩쓸려 망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기술주 거품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중략)

올바른 기질을 갖추어 기업과 산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투자에 앞서 가는 사람들은 기업과 산업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읽든, TV에서 무엇을 보든, 누가 "이런 일, 저런 일이 벌어질 거야"라고 말하든 개의치 않습니다. 투자자는 사실을 바탕으로 판단해서 스스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사실이 부족해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 절대로 투자하지 마세요. 다른 기회를 찾아보세요. 남들이 매우 쉽다고 생각하는 투자도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그동안 제게 투자 능력을 타고났는지 배웠는지 묻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기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버핏의 견해에 대해서 멍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버핏의 견해는 극단적입니다. 지능지수가 높으면 유리하지요. 그러나 기질을 습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견해는 옳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모르는 수재보다는 성실하고 건전한 사람이 나을 것입니다.

 

 

p.28~31

버크셔가 가이코의 나머지 지분 50%를 인수한 다음 1995년 주주 서한에서 버핏은 45년 동안 가이코와 맺은 인연을 설명했다. 당시 가이코는 미국 7위 자동차보험사로서 보유 계약이 약 370만 건이었다(2015년에는 미국 2위로 계약 1,200만 건을 보유했다). 버핏은 1950~1951년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니면서 위대한 가치투자자 겸 투자 철학자인 그레이엄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버핏은 자신의 영웅 그레이엄에 관해서 모든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던 중 그레이엄이 가이코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에게는 "생소한 업종에 속한 무명 기업"이었다. 버핏은 사서가 가르쳐준 보험사 편람인 <Best's FIre and Casualty(베스트 손해보험>을 뒤져서, 가이코가 워싱턴 DC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51년 1월 어느 토요일, 버핏은 아침 기차로 워싱턴에 가서 시내에 있는 가이코 본사를 방문했다. 주말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으나 그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자 마침내 수위가 나타났다. 그는 당황한 수위에게 질문에 응할 직원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수위는 6층에서 근무증인 로리머 데이비드슨을 소개했는데, 그는 사장 겸 창업자인 리오 굿윈 1세의 비서였다. 버핏은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자신을 소개했다. 데이비드슨은 투자은행에서 가이코의 자금 조달을 담당하다가 합류한 인물로, 보험산업의 복잡한 특성과 보험사의 경쟁우위 요소들을 버핏에게 오후 내내 설명해주었다.

 

데이비드슨에 의하면 가이코는 이상적으로 설계된 보험사였다. 대공황의 정점인 1936년 굿윈이 아내 릴리언과 함께 설립한 가이코는 처음부터 저비용 구조였다. 굿윈은 유나이티드 서비스 오토모빌 어소세이션(United Services Automobile Association, USAA)에서 임원으로 근무했는데, 이 회사는 군인들에게 자동차보험을 판매하는 보험사로서 보험상품 직접 판매 방식을 개척한 회사였다. 그가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군인들은 소득이 안정적어서 보험료를 연체하는 사례가 많지 않았고, 위험이 낮아서 보험금을 자주 청구하지도 않았다. 보험상품 대부분은 내용이 복잡해서 대리점의 전문적인 조언이 필요했지만,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값비싼 자동차보험은 구조가 비교적 단순했다. 그래서 고객 대부분이 자동차보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굿윈은 가이코도 보험상품을 고객들에게 직접 판매해 USAA처럼 유통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즉 소득이 안정적인 저위험 고객들에게 보험상품을 직접 판매하면 강력한 원가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이코는 저원가 사업자로서 경쟁우위를 확보했으므로 가이코의 성공에 '비결' 따위는 없었다고 훗날 버핏은 밝혔다. 다른 보험사들은 대리점을 통한 판매 방식에 익숙해 있어서 다른 유통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가이코는 직접 판매 방식을 통해서 엄청난 원가 우위를 누렸다. 즉 원가가 낮아서 보험료를 낮추고 낮은 보험료로 우량 고객을 확보하고 유지함으로써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해 성공할 수 있었다. 

 

굿윈은 가이코를 탁월하게 경영했다. 가이코는 이례적으로 높은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매출도 빠르게 증가했다. 굿윈은 1958년 은퇴하면서 후계자로 데이비드슨을 지명했다. 1951년 1월 어느 토요일, 20세 청년 버핏이 만났던 그 인물이다. 승계 작업은 매끄럽게 진행되어, 데이비드슨이 CEO를 맡은 이후에도 가이코는 계속 번창했다. 가이코의 매출은 계속 증가해 1964년에는 보유 계약이 100만 건을 돌파했다. 1936년 설립 이후 1975년까지 자동차보험 시장점유율 4%를 차지하면서, 미국 4위 자동차보험사로 성장했다. 버핏이 보기에 가이코는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가이코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첫째, 1970년 데이비드슨이 은퇴했고 굿윈 부부 모두 사망했다. 방향타를 잃은 가이코는 지금까지 성공으로 이끌어준 원칙에서 벗어나는 모습이었다.1974년, 미국 전역에서 전산화된 운전 기록에 실시간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되면서, 가이코는 일반 대중에게도 보험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975년이 되자, 가이코는 침체기인데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험계리사들이 추정한 손해액과 손실준비금에서도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다. 이렇게 잘못된 원가 정보를 바탕으로 보험료를 낮게 책정한 탓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취약한 경영, 부실한 투자, 장기간의 과도한 확장이 큰 타격을 주었다. 1976년, 가이코는 파산 직전이었다.

 

1976년 CEO로 임명된 잭 번이 가이코를 파산에서 구해냈다. 번은 과감한 개선책을 선택했다. 그는 45개 보험사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가이코의 보험계약 4분의 1 이상을 인수하게 했다. 가이코가 남은 보험금을 지급하려고 주식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기존 주주들의 지분이 심하게 희석되기도 했다. 주가는 폭락해서 정점 대비 95% 이상 하락했다. 버핏은 번이 가이코를 구해내고 가이코가 저원가 보험사로서 근본적인 경쟁우위를 유지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1976년 하반기에 청므으로 대규모 지분을 사들였다. 번은 대상 고객을 대폭 축소해 다시 '공무원'스타일 고객에게만 상품을 판매하면서 준비금과 가격 정책을 개선했다.

 

번이 경영을 맡은 몇 년 동안 가이코의 매출이 대폭 감소했지만 버핏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주식을 계속 사들였다. 1979년이 되자 가이코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회사 규모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가이코는 최저 원가라는 고유의 경쟁우위를 유지했고 준비금과 가격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투자 부문에 개선이 필요했다. 1년 이상 CIO를 찾지 못한 번은 후보자를 소수로 압축했다. 심프슨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제 심프슨은 버핏을 만날 차례였다.

 

1979년 여름 토요일 아침, 심프슨은 오마하 사무실로 버핏을 방문했다. 버핏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개인 포트폴리오에 어떤 종목들을 보유하고 있습니까?"

 

이에 심프슨이 대답했으나 버핏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세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서 버핏은 심프슨을 차에 태우고 공항에 가서 조 로렌필드를 만났다. 로렌필드는 버핏의 좋은 친구이자 훌륭한 투자자였따. 그는 거의 혼자서 그리넬대학 기금 1,100만 달러를 10억 달러로 키워, 미국 사립 교양학부 중 학생 1인당 기금을 최고 수준으로 올린 인물이었다. 알고 보니 심프슨과 로젠필드 둘 다 시카고 컵스 야구팀의 광팬이어서 이 팀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70대인 로젠필드는 시카고 컵스의 지분을 3%까지 사 모을 것이며, 시카고 컵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할 때까지 절대 죽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심프슨은 항공편으로 로스엔젤레스에 돌아왔다. 버핏이 인터뷰 직후 번에게 전화한 것을 보면 심프슨이 보유한 종목을 좋게 평가한 것이 분명하다. 버핏은 번에게 말했다.

 

"이제 되었습니다. 그 친구로 합시다."

 

p.36~37

1970년대, 보험사 대부분은 위험을 최소화하려고 잘 분산된 대규모 채권 포트폴리오를 보유했고, 주식은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심하던 1970년대에 국채 비중을 높게 유지했으므로 포트폴리오 대부분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심프슨이 합류하기 전인 1979년에는 가이코도 마찬가지였다. 잭 번과 맺은 계약에 따라 심프슨은 가이코 자산의 30%까지 주식에 투자할 수 있었다. 당시 대다수 손해보험사는 주식 비중을 자산의 약 10% 이내로 제한하고 있었다. 새 계약은 집중투자도 허용했다. 심프슨은 부임하자마자 채권 보유 비중을 대폭 줄이고 소수 종목으로 주식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번이 사소한 일까지 모두 챙긴다는 평판을 고려해, 심프슨은 가이코의 자산운용을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명확하게 밝혀두었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바른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집니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거든요."

 

심프슨은 버핏도 번도 포트폴리오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번에 대한 심프슨의 직감은 정확했다. 가이코에 1년 넘게 근무한 심프슨은 1주일 휴가를 떠났다. 번은 이 기회를 이용해 주식 몇 종목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했다. 심프슨은 돌아오자마자 번이 산 종목을 매도했다. 번이 물었다.

 

"왜 팔았나? 근사한 투자 아이디어였는데."

 

심프슨이 대답했다.

 

"포트폴리오는 제가 책임지므로 매매도 모두 제가 결정합니다."

 

이날 이후 심프슨은 독자적인 자산운용 권한을 확보했다.

 

놀라실지 모르겠지만 루는 투자에 관해 나(버핏)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루에게 투자 책임을 맡길 때 찰리와 나는 전권을 넘겨주었습니다. 회사 경영자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처럼 말이죠. 나는 대개 다음 달 10일 경에야 루가 거래한 내용을 알게 됩니다. 말은 안 하지만 나는 가끔 그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의 결정이 옳습니다.

 

p.38~40

심프슨이 처음 가이코에 합류했을 때 일부 투자 인력은 다른 투자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는 함께 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1년에 두 번씩 버핏을 가이코로 초청해 투자팀 사람들과 한 시간 정도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 모임에서 버핏이 한 이야기에 심프슨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사용권을 이용하면 투자 실적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이 사용권은 20번만 사용할 수 있는데, 여러분이 평생 20번만 투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20번 투자한 다음에는 더 투자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투자를 정말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고 정말 깊이 생각한 종목만 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실적이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이 이야기 덕분에 심프슨은 잦은 매매를 삼가고 장기적인 투자 관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빈번하게 매매해본 적이 없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에게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니 강한 확신이 들 때만 매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버핏의 조언을 명심해 점차 소수의 종목에 더 많은 금액을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1982년, 가이코는 약 2억 8,000만 달러를 보통주 33개 종목에 투자했다. 심프슨은 보유 종목을 20개로 줄인 후 다시 15개로 줄였고 이후 8~15개 수준을 유지했다. 가이코가 버크셔에 인수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공개한 1995년 말 포트폴리오에 의하면 11억 달러로 겨우 11개 종목을 보유하고 있었다. 

 

심프슨은 단일 섹터에 포지션이 집중되어도 개의치 않았다. 한번은 전력회사 주식 5~6종목을 보유한 적도 있는데, 심프슨은 이를 거대 단일 포지션으로 간주했다. 1980년대 초에는 AT&T에서 분사한 자회사인 베이비벨 3개 종목에 거액을 투자하기도 했다. 심프슨은 이 3개 종목도 단일 포지션으로 간주했다. 그는 베이비벨의 위험 대비 보상이 이례적으로 유리하다고 평가해 거대 포지션을 유지했다. 번도 심프슨의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거액을 투자해서 대성공을 거두었죠."

 

심프슨은 승산이 높다고 판단할 때만 거액을 투자했다. 그가 꼽은 가이코의 최고 대박 종목은 '프레디맥'이다. 프레디맥은 미국 모기지 유통시장을 확대하려고 1970년 설립된 정부지원기업으로서, 유통시장에서 매수한 모기지로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을 만들어 공개 시장에서 투자자들에게 판매한다. 프레디맥은 패니메이(Federal National Mortgage Association, Faannie Mae)와 함께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가이코가 매수하던 시점에는 프레디맥이 상장기업이 아니었다. 당시 패니메이는 상장기업이었지만, 프레디맥은 저축대부조합이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어서 거래가 잘 되지 않는, 절반만 공개된 기업이었다. 그런데 주가이익배수(PER)가 3~4배여서 매우 쌌다. 게다가 패니메이와 함께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프슨은 매력을 느꼈다. 버크셔는 이미 프레디맥을 보유하고 있었고 자회사로 저축은행인 웨스코(Wesco)가 있어서 규정상 프레디맥을 더 매수할 수가 없었다.

 

심프슨은 프레디맥이 최고의 투자 기회라고 생각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막대한 규모로 사들였다. 그리고 프레디맥이 곤경에 처하기 3년 전인 2004년과 2005년에 포지션을 모두 처분했다. 그가 프레디맥을 처분한 것은 주가가 지나치게 높아 보여서가 아니다.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이 설정한 이익 성장률 연 15% 목표를 달성하려고, 부채 비율을 늘리면서 갈수록 질 낮은 모기지를 사들여 위험을 높였기 때문"이다.

 

심프슨의 판단은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프레디맥이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지리라고는 그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008년 연방주택기업감독청(Federal Housing Finance Agency, OFHEO)은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해 민간기업의 파산에 해당하는 보호관리(conservatorship) 처분을 내렸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정부가 민간 금융시장에 개입한 사례 중 가장 단호한 사례'로 꼽힌다. 이 글을 2016년에도 두 회사는 보호관리를 받는 중이다. 프레디맥은 가이코가 대박을 터뜨린 종목이었다. 심프슨은 말한다.

 

"우리가 매수한 후 계속 상승해 10~15배 수익을 안겨주었습니다."

 

p.41

이따금 기업의 인수 가격과 주가가 둘 다 높으면 우리는 테드 윌리엄스가 제시한 원칙을 적용합니다. 그는 <타격의 과학>에서 야구공 크기로 스트라이크존을 77개 칸으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좋은 칸으로 들어오는 공에만 스윙하면 타율이 4할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칸으로 들어오는 공(바깥쪽 낮은 공)에 스윙하면 타율이 2할 3푼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말해 가운데 직구를 기다렸다 치면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만, 아무 공이나 가리지 않고 휘두르면 마이너리그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 서한 (1997)

 

p.42~43

심프슨이 가이코에서 운용을 맡은 첫해인 1980년 수익률은 23.7%였다. 높은 수익률이긴 하지만 시장 수익률 32.3%에는 뭇 미치는 실적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멋지게 초과수익을 기록했다. 1982년 시장 수익률이 21.4%일 때, 그는 45.8%를 올렸다. 그가 운용을 시작한 시점에는 포트폴리오에서 주식 비중이 12%에 불과했지만, 이 무렵에는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증가했다. 나중에 번이 말했다. 

 

"우리는 루에게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했고, 주식 비중을 이례적으로 높이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자 루가 강타를 날렸습니다."

 

심프슨은 1979년 가이코에 합류해서 2010년 74세에 사장 겸 공동 CEO로 은퇴할 때까지 31년 동안 가이코의 투자를 이끌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그는 대단한 실적을 올려서 시장과 펀드매니저 대부분을 압도했다. 그는 가이코 재직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훌륭한 실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연 15%가 넘는 초과수익률을 5년, 6년, 7년, 8년째 기록하면서 순항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버크셔 사업보고서에 실린 25년 실적을 보면 우리 초과수익률은 연 6.8%였습니다."

 

버핏은 1982년 버크셔 주주 서한에서 심프슨을 처음 언급할 때 "손해보험 업계 최고의 펀드매니저"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심프슨을 더 열렬히 칭찬했다. 그는 2004년 사업보고서에서 심프슨의 실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앞의 투자 성적표를 보면 루는 틀림없이 투자 분야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인물입니다."

 

 

p.47~48

심프슨은 3~5년 후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수익성도 높아질 것으로 확신하는 주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매수해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산업이나 섹터별 분산투자에 얽매이지 않고 '상향식으로 종목을 선정'한다. 종목에 대한 확신이 서면서 가격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 산업이나 섹터 분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1980년대 포트폴리오의 40%를 식음료와 기타 소비재 주식에 투자한 적이 있는데 단지 위험 대비 보상 비율이 매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심프슨은 누구보다도 멀리 내다봅니다. 그러나 그가 방법을 가르쳐주어도 모방할 수는 없습니다. 피카소가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어도 피카소처럼 그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가 선호하는 가치평가 척도는 주가잉여현금흐름배수(P/FCF)지만, 투자자는 평가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으므로 그가 따르는 마법의 공식 따위는 없다. 가격이 합리적이면서 매출과 이익이 계속 증가해 장기적으로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종목을 찾는다. 

 

그는 잉여현금흐름(자본적지출과 운전자본 증분을 차감한 현금흐름)을 선호하지만 어느 한 가지 척도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장기간 사용하면서 다듬은 원칙은 우수한 경영진이 이끄는 우량 기업을 내재가치보다 싸게 사는 것이다. 그는 경영진을 평가할 때 자본배분 실적, 정직성을 본다. 또한 경영자가 소유 경영자인지, 한몫 챙기려는 '총잡이' 경영자인지 조사한다. 주가가 저평가되었을 때 CEO의 자사주 매입 의지가 흔히 이런 요소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p.51~53

몇 년 전 선밸리에서 버핏인 심프슨에게 물었다. 

 

"코카콜라와 나이키 중 어느 회사의 독점력이 더 강한가?"

 

심프슨은 "나이키죠"라고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이키는 성장 기회가 더 많습니다. 코카콜라는 이미 세계 전역을 지배하고 있지만 나이키는 세계 시장에서 겨우 맛을 본 정도입니다. 코카콜라 제품은 성장 속도가 빠르지 않고 주력 상품이 건강에 좋은 것도 아닙니다. 콜라보다 나이키에 성장 기회가 훨씬 많습니다. 나이키는 재무 구조를 더 개선할 수 있습니다. 기업을 많이 인수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사주를 매입하고 배당을 늘릴 수 있습니다. 신발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큰 의류시장에서도 나이키는 브랜드가 막강하지만 시장점유율은 아직 약소한 수준입니다. 지금은 중국이 거대한 시장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중남미에서도 실적이 아주 좋고, 말씀드렸듯이 인도는 제대로 공략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이키 주가는 터무니없이 낮았던 적도 없고 터무니없이 높았던 적도 없다고 심프슨은 지적한다. 잉여현금흐름수익률(잉여현금흐름을 주가로 나눈 비율 FCF/P)이 7~7.5%였다. 심프슨은 FCF/P가 8%에 접근할 때 매수했다. 나이키는 세계 전역에서 브랜드 가치가 높아서 성장 기회가 많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패더러와 나달 같은 유명한 선수가 프랑스 오픈에서 시합하는 모습을 보면 나이키 스우시 로고를 온몸에 두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광고죠. 

 

심프슨은 다른 종목들처럼 나이키도 장기 보유하는 가운데, 핵심 물량은 계속 보유하면서 일부를 사고팔았다. 나이키 주가가 PER 20배 수준까지 상승했을 때 더 싼 대체 종목이 보이면 그는 일부 물량을 팔았다. 그러나 그는 나이키가 계속 성장한다고 확신했으므로, 주가가 매우 높아져도 나이키 포지션을 모두 처분하는 일은 없었다. 주가가 PER 13배 수준으로 하락하면 더 사들였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나이키를 일부나마 계속 보유했다. 때로는 포지션이 매우 커지기도 했는데, 그가 가이코를 떠날 무렵에는 나이키 주가가 상승한 덕분에 비중이 16%에 이르렀다. 기업이 계속 성장하면 그 기업의 주가 상승률은 둔화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나이키는 장기간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본다. 그는 나이키를 매수 후보 종목군에 계속 포함하지만 주가에 대해서는 원칙을 유지한다.

 

"우량 기업은 세월이 흐르면 가치가 계속 상승하므로 목표 주가도 계속 재평가해야 합니다."

 

심프슨은 기업의 미래 경제성 파악이 가장 중요하다는 버핏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면 미래 현금흐름을 할인해 내재가치를 추정할 수 있다. 과거 실적을 바탕으로 현재 가치를 평가하기는 쉽지만 기업의 미래 경제성을 팡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부 기업은 다른 기업보다 팡가하기 쉽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정부의 규제를 받는 다른 기업보다 파악하기 쉽다. 물론 해외 사업의 비중이 큰 기업이라면 정부의 규제를 받더라도 사업에 큰 지장이 없겠지만, 그래도 미래 경제성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p.55

장기적으로 주가 상승과 가장 직결된 요소는 ROE다. 현금흐름은 당기순이익보다 조작하기 어려우므로 보조 척도로 유용하다. 잉여현금흐름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기업은 자기자본을 소비하므로 계쏙해서 자본을 추가 조달해야 한다. 우리는 수익성을 평균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업들을 발굴한다. 그러나 기업 대부분은 경쟁 탓에 수익성을 평균 이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흔히 경영자들은 주주 가치 극대화보다 기업제국 확장 등을 더 중시한다. 경영진을 평가할 때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경영진이 보유한 지분이 많은가?

(2) 주주들에게 정직한가? (우리는 경영진이 주주를 동업자로 여기면서 좋은 소식은 물론 문제점도 솔직하게 알려주길 기대한다)

(3) 수익성 나쁜 사업은 중단하려 하는가?

(4) 잉여현금흐름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는가?

 

마지막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경영자들은 흔히 수익성 낮은 사업에 잉여현금을 사용한다. 대개 잉여현금은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p.58~59

1970년대 가이코가 곤경에 빠진 것은 투자 레버리지가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플로트의 원가가 높았기 때문이다. 1951년, 로리머 데이비드슨은 젊은 워런 버핏에게 보험사를 평가하는 주요 척도는 첫째가 보험사가 창출하는 플로트의 규모이고 둘째가 플로트의 원가라고 가르쳐주었다.

 

버핏이 주주 서한에서 여러 차례 설명했듯이, 비용과 최종 손실액을 더한 금액이 수입보험료보다 더 많으면 '보험영업손실'이 발생하며, 이것이 플로트의 원가가 된다. 그러나 비용과 최종 손실액을 더한 금액이 수입보험료보다 더 적으면 '보험영업이익'이 발생하며, 그러면 플로트의 원가가 '마이너스'가 된다.

 

이렇게 보험영업이익을 올리면 남의 돈을 공짜로 쓰면서 이자까지 받는 셈이 되지만, 이익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보험사들이 보험영업이익을 얻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탓에, 보험사 전체로 보면 거의 매년 막대한 영업손실을 떠안고 있다. 이 손실이 플로트를 보유하려고 보험사들이 치르는 대가라고 버핏은 말한다. 

 

플로트의 장기 원가가 시장 금리보다 낮으면 보험 사업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플로트의 원가가 시장금리보다 높으면 보험 사업을 할 가치가 없다. 거의 매년 보험업계는 수입보험료로 비용과 최종 손실액의 합계액도 충당하지 못했다. 그 결과 지난 수십 년 동안 유형자기자본이익률 (당기순이익 / (자기자본 - 우선주 - 영업권 - 무형자산) 이 S&P 500지수 수익률에 훨씬 못 미쳤다. 수입보험료와 투자수익으로 비용과 최종 손실액을 충당하지 못하면 보험사는 파산할 수 있다. 

 

버핏은 2004년 주주 서한에서, 지속적인 매출 감소는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이 미국 기업 대부분의 '제도적 관행'이라고 설명했다. 작년에 매출이 감소헀는데 앞으로도 매출이 계속 감소할 것이라고 주주들에게 보고하고 싶은 CEO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보험업계에서 매출 유지 경쟁이 치열한 것은, 어리석은 가격 정책을 펴도 그 결과가 한동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손실률을 낙관하면 당기순이익이 과대평가되지만 진정한 손실비용은 대개 여러 해가 지나야 드러난다. 이런 일종의 '자기기만'탓에 가이코는 1970년대 초에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p.60~61

심프슨은 집중투자를 하므로 포트폴리오 회전율(1년 동안의 주식 매매 금액을 주식 포트폴리오 평가액으로 나눈 비율)이 매우 낮다. 가이코의 포트폴리오 회전율은 경쟁사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금을 모두 주식에 투자한 상태에서 새로운 투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확신이 가장 약한 종목을 매도하고 새로 발굴한 종목을 매수해서 좋은 실적을 올렸다. 자금을 모두 투자한 상태라면 유망 종목은 1년에 1~3개만 발굴해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규모로 투자할 만한 종목을 1년에 2개만 찾아내도 매우 만족한다. 그리고 매매를 많이 한다고 해서 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 방식은 사람들과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은 고민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매매를 많이 하지만, 우리는 고민을 많이 하면서 매매는 많이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행동만 하지 않아도 투자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러려면 자신의 능력범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심프슨은 말한다. 그는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았고, 버핏이 그의 생각을 굳혀주었다. 그는 항공사 주식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이제 항공사 주식에는 절대 손대지 않을 생각이다. 러시아 합작사 등 러시아 주식도 대부분 피한다. 지금은 유가증권 선택 범위가 매우 넓어져서 ETF를 이용하면 전 세계 시장에 참여할 수 있지만 일부 시장은 피하는 편이 낫다고 심프슨은 말한다. 

 

p.64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며 경영진을 철두철미하게 믿을 수 있는 회사에 거액을 집어넣는 것이 올바른 투자 방법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된다네. 아는 것도 특별히 믿을 이유도 없는 기업에 널리 분산투자하고서 위험이 감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야. 사람의 지식과 경험은 분명히 한계가 있어서, 나는 완전히 믿음이 가는 기업을 한 시점에 서너 개 이상 본 적이 없어.

 

- 케인스, "스콧에게 보낸 편지", 존 바식 < Keynes's Way to Wealth(케인스의 부에 이르는 길)> (2014)

 

p.64-67

다우지수가 1929년 9월 3일 현기증 날 정도로 고가를 기록한 이래 계속 폭락하면서 20세기 최악의 금융위기가 왔다. 다우지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10년 동안 이어진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투기적 강세장에서 10배나 뛰었다. 그러나 1929년 10월, 문제의 조짐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매물 출회로 시장이 14.7% 하락하고 나서 다음 주에 회복했으나 10월 11일 다시 하락세로 돌아선 것이다. 불규칙하게 등락하다가 결국 10월 24일 '검은 목요일'로 이어져 시장이 다시 6% 하락했다. 시장은 이미 정점에서 21.6%나 내려간 상태였으나 다음 며칠 하락세가 가속화하더니 10월 28일 '검은 월요일' 12.8% 더 떨어졌고, 10월 29일 '검은 화요일' 11.7% 또 떨어졌다. 극심한 공포가 세계 전역으로 퍼졌고 런던증권거래소도 동반 폭락했다. 1929년 11월 13일, 시장이 고점에서 47.8% 하락하자 마침내 바닥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바닥이 아니었다. 이듬해 약간 회복하는 듯했으나 연말 몇 달 동안 다시 힘을 잃었다. 1931년은 고점 대비 -55.4%로 시작해 -79.4%로 끝났다. 고점을 기록하고 2년 10개월이 지나 1932년 7월 8일 마침내 바닥에 도달했을 때, 시장은 무려 89.2% 하락한 상태였다.

 

케인스 경제학의 토대를 세운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이 기간 내내 자금을 운용했다. 자신의 자금을 비롯해 친구들, 보험사 두 곳,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 자금이었다. 1929년 원자재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할 때, 케인스는 고무, 밀, 면화, 주식, 선물에 대한 투기를 하고 있었다. 오만하기로 악명 높은 그는 경기순환에 대한 자신의 '우월한 지식'을 이용하면 (미래 예측을 더 잘할 수 있으므로) 다른 투자자들을 앞지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원자재시장이 하락할 때 포지션을 잘못 잡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기대헀던 '위험 상쇄'도 되지 않았다. 원자재 포지션이 무너질 때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그가 잡았던 투기적 주식 포지션도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통상적인 경기순환을 마무리하는 단기 하락이라고 믿었으므로 매수 포지션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30년대로 접어들자 이번에는 통상적인 하락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원자재 포지션을 모두 날려버렸다.

 

1920년대 초 투자 원금을 모두 날렸던 케인스는 이제 두 번째로 무일푼이 될 위기에 직면했다. 시장이 고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케인스는 투자 원금의 80%를 잃었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받쳐주는 종목은 배당을 지급하는 유틸리티 주식뿐이었다. 이 대폭락을 통해서 케인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오만했던 그는 태도를 바꾸어 거시경제적 하향식 투기와 시점 선택 방식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1932년까지 외환 투기와 원자재 투기로 거액을 벌었다가 날린 케인스는 이후 평생 가치투자를 추구하게 되었다.

 

위대한 가치투자자 겸 투자학자 벤저민 그레이엄과 마찬가지로 케인스도 제1차 세계대전, 1929년 대폭락(Great Crash), 대공황(Great Depression), 제2차 세계대전 등 파멸적인 시장 붕괴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케인스는 그레이엄과 교류한 적이 없었고, 르에이머과 데이비드 도드 공저의 <증권분석>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미래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추정하는) 내재가치 대비 시장가격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마침내 투자 스타일을 변경했다. 그레이엄과 마찬가지로 케인스도 투기와 투자를 구분했는데, 그는 1936년에 출간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투자를 '사업enterprise'으로 표현했다.

 

시장 심리를 예측하는 활동을 투기(speculation)라 부르고, 수명이 끝날 때까지 자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예측하는 활동을 사업(enterprise)이라고 부른다면, 투기가 항상 사업보다 나은 것은 절대 아니다. (중략) 세계 최대 투자시장 중 하나인 뉴욕에서 투기가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심지어 금융계 밖에서도 흔히 미국인들은 대중이 예상하는 '대중의 견해'를 파악하려고 과도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이런 약점 탓에 주식시장에서 천벌을 받는다. 영국인 중에는 지금도 '소득'을 얻으려고 투자하는 사람이 많지만, 미국인은 '가격 상승'이 기대되지 않으면 좀처럼 투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미국인들은 자산에서 나오는 수익보다 자산의 가격이 상승하길 기대하면서 투자한다. 즉 미국인들은 투기를 한다.

 

p.72-76

케인스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자기 돈으로 주식, 채권, 통화, 선물에 대한 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38세이던 1921년에 처음으로 공식 펀드매니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1910년 케임브리지에서 주식시장에 관해서 강의할 때 "주식시장은 실전이 중요하므로 책이나 강의로는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나도 주식은 실전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1911년, 대학의 부동산과 기금을 관리하는 킹스칼리지 재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자금 운용을 경험했다. 재산관리위원회는 부동산을 제외한 자산 대부분을 현금으로 보유했다. 케인스는 이 현금으로 채권을 사서 보유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에는 주식 투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식은 개인 투자자들의 영역일 뿐, 기관투자자가 투자할 영역이 아니라고 간주되었다.

 

케인스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고 하급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급여도 많지 않았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강의하고 개인 지도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에서 인세가 들어오고 강연과 기고문 수입도 있었으므로 그는 4,000파운드(2016년 가치로 약 30만 달러)를 빌릴 수 있었다. 브로커는 그에게 원금의 10배까지 신용거래를 허용했고, 그는 상당한 규모로 신용을 사용하면서 통화 투기 거래를 시작했다. 그는 재무부에서 실무를 경험했고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저술하는 등 연구도 했다. 또한 확률 공부와 경제학 강의를 병행하는 가운데 탁월한 지식을 쌓으면 초기 통화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존에는 환율이 고정되어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변동환율로 바뀌었다. 케인스는 전쟁 이후 각국의 거시경제를 예측해 외환 포지션을 결정했다. 프랑스 프랑, 독일 마르크, 이탈리아 리라는 인플레이션 탓에 경제가 붕괴하면서 가치가 폭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이들 통화를 공매도하면서 미국 달러를 샀다. 1920년 부활절 무렵, 그의 계좌 잔고는 1만 4,000파운드(90만 5,000달러)로 불어났다.

 

1924년, 케인스는 투자회사인 인디펜던트 인베스트먼트 컴퍼니를 공동 설립해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투자설명서에 자신의 거시경제 투자철학 개요를 실었다. 그는 이 시점 선택 기법을 '신용순환 투자 이론'이라고 불렀다. 훗날 이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용순환은 시장이 하락할 때 대표 종목을 매도하고 시장이 상승할 때 대표 종목을 매수하는 기법으로, 각종 비용과 이자를 감안하고서도 많은 수익을 올리려면 비범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는 이전의 투자회사 두 곳과 킹스칼리지 기금 운용에 이 기법을 사용했다.

 

1920년, 케인스는 재무부 근무 시절에 만난 주식 브로커 오스왈드 토인비 폭시 포크와 함께 비공식 투자조합을 만들어, 블룸즈버리그룹 친구들과 자신의 자금을 운용하면서 외환 투기를 했다. (블룸즈버리그룹은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리튼 스트레이치 등 영국의 저명한 작가, 지식인, 예술가들로 구성된 비공식 집단으로, 모두 블룸즈버리 근처에 살면서 함께 활동했다) 현재의 헤지펀드와 비슷한 이 투자조합은 당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기관투자가들은 채권과 부동산을 선호했다. 이 투자조합은 처음 몇 달 동안 거래에 여러 번 성공해 많은 수익을 냈다.

 

그러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 5월, '독일에 대한 낙관론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면서' 유럽 통화들이 반등하자, 과도하게 신용을 사용하던 투자조합은 치명타를 입었다. 절정기에 1만 4,000파운드까지 올라갔던 케인스의 신용거래 계좌 잔고가 이제 마이너스 1만 3,125파운드(85만 달러)가 되었다. 브로커는 추가 증거금 7,000파운드(45만 달러)를 요구했다. 케인스는 이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일푼이 되어 생활비까지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37세의 케인스는 저명한 은행가 어니스트 카셀을 찾아가 말했다.

 

"2개월 정도 자금을 대주시면 막대한 이익을 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버나드 바루크는 저명한 은행가 카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무명 청년 시절 내가 성공을 거두자 사람들은 나를 도박꾼으로 불렀다. 이후 내 사업 영역이 확대되자 사람들은 나를 투기꾼으로 불렀다. 이후에도 사업영역이 계속 확대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자 사람들은 나를 은행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한 일은 항상 똑같았다.

 

케인스는 "저는 이제 무일푼이라서 투입할 자본이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카셀은 자금을 대주었다. 케인스는 카셀에게 빌린 5,000파운드와 출판사에서 받은 계약금 1,500파운드로 추가 증거금을 납부하고 연초에 잡은 공매도 포지션을 유지했다. 그의 장기 경제 전망은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후 인플레이션이 유럽을 휩쓸었고 유럽 통화들은 몰락했다. 1920년 중반 마이너스였던 케인스의 계좌잔고는 1922년에 빌린 돈을 갚고서도 2만 2,558파운드로 불어났따. 2016년 현재 가치로 약 180만 달러에 이른다.

 

케인스는 첫 번째 투자회사가 무너진 직후 1921년 7월, 두 번째 투자회사 AD 인베스트먼트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전후 유럽 재건에 로프, 금속, 석유, 식량, 면화 등 원자재가 필요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원자재를 거래했고 주식에도 투자했다. 그는 원자재 시장이 비효율적이어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에서 벗어나면서 가격이 잘못 형성된다고 보았다. 생산자들이 헤지 목적으로 매수하는 과정에서 원자재 가격이 과도하게 상승하면, 투기자들이 '위험을 떠안으면서' 가격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케인스는 "보험사가 개별 주택의 화재 발생 확률을 잘 알지 못해도 이익을 내는 것처럼, 원자재 투기자도 단지 위험을 떠안으면서 과도한 가격 변동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주식, 채권, 부동산, 금도 거래했다.

 

그는 이른바 '위험 상쇄'개념을 이용해 주식 포지션의 위험을 원자재 포지션으로 헤지했다. 즉 가격이 반대로 움직이는 자산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방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업에 필수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투자한 기업의 수익성이 약화도리 것 같으면 해당 원자재도 매수했다. 예를 들어 납으로 자동차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에 투자했다면 납도 매수했다. 납 가격이 하락하면 배터리회사의 주가는 상승한다. 납 가격이 상승하면 배터리회사의 주가는 하락하겠지만 납 원자재 계약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그 손실을 상쇄한다.

 

케인스는 '위험 상쇄' 개념을 투기에 적용했는데, 이 개념은 이후 분산투자를 다루는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에 다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케인스는 이 회사의 이사로 활동하다가 1927년 11월 사직하고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이 회사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실적이 좋아서 매년 10%씩 배당했다. 사임 시점에 케인스의 재산은 3만 9,550파운드 (약 360만 달러)로 불어났다.

 

사임 후에도 케인스는 개인 계좌로 원자재 투기를 계속했다. 1929년 대폭락 후에도 다양한 주식과 원자재의 매수 포지션을 유지했는데, 이때 '위험 상쇄' 개념에서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 평소 주식과 원자재 포지션은 반대로 움직였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양쪽 시장에서 무차별적으로 매물이 쏟아지면서 두 포지션 모두 하락한 것이다. 케인스는 레버리지가 내재된 원자재를 신용으로 거래했으므로 두 번째로 무일푼이 되었다. 한때 그가 운용을 맡았던 AD 인베스트먼트 트러스트도 무너졌다.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p.76~77

시장의 불안정은 투기에서도 비롯되지만 인간의 본성에서도 비롯된다. 인간은 대부분 (도덕, 쾌락, 경제 어느 분야에서든) 수학적 기댓값보다는 자발적 낙관주의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 행위의 결과는 대부분(가만있기보다는 뭔가를 해보려는) 야성적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지, (기대 이익에 확률을 곱해서 산출하는) 수학적 기댓값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는 없다. 아무리 솔직하고 진실한 기업이더라도 설립 취지에 따라 사업을 하지는 않는다. 기업이 산출하는 기대 이익의 근거는 남극 탐험보다 크게 나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야성적 충동이 힘을 잃고 자발적 낙관주의가 쇠퇴해 인간이 수학적 기댓값만 따르게 되면 기업은 쇠망할 것이다.이익에 대한 희망이 근거가 부족하듯이, 손실에 대한 공포 역시 근거가 부족할지 모른다.

-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p.78-79

케인스의 투자철학은 자신이 경기순환에 대한 '우월한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신념을 의심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용순환 투자 이론을 이용한 자신의 거시경제 투자 실적을 검토하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경기순환 단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주식을 매매하는 방식으로는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1930년에는 케인스의 투자철학에 확실한 변화가 나타났다. 시장이 바닥에 도달한 동료 이사가 PR 파이낸스의 주식을 염가에 처분하려 하자, 케인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반대했다. 

 

"우리가 시장 심리에 휩쓸려 지금 주식을 처분한다면 절대 다시 사지 못할 거야. 그러면 시장이 회복할 때 따라가지 못한다네. 시장이 영영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마찬가지고."

 

1934년 8월 그가 스콧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투자 기법이 완전히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며 경영진을 철두철미하게 믿을 수 있는 회사에 거액을 집어넣는 것이 올바른 투자 방법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된다네."

 

케인스는 이후 내재가치보다 싼 핵심 종목 소수에 집중투자해서 장기간 보유한 덕분에 킹스칼리지 기금 운용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스콧에게 편지를 보낸 1934년에 그레이엄의 <증권분석>이 출간되었으므로, 그가 이 책을 읽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으로 가치투자기법을 개발한 듯하다. 1925년 논문에서 그는 1924년 에드거 스미스가 출간한 <Common Stocks as Long-Term Investments(주식 장기 투자)>를 인용했는데, 이 책은 미국 주식에 투자해서 산업 성장에 대한 잔여 청구권'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채권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진정한 가치주라면 영국 주식에 투자해도 채권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2015년 발표된 케인스의 투자 실적에 대한 연구에서, 저자들은 과거 기록과 통계를 근거로 1932년이 전환점이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케임브리지 저지 비즈니스스쿨 교수 데이비드 체임버스, 런던 비즈니스스쿨 명예교수 엘로이 딤슨, 케임브리지 박사 후 과정 저스틴 푸다).

 

1932년 이전까지 케인스가 쓴 기법은 일종의 모멘텀 투자였다. 그는 주로 시장보다 대폭 상승한 주식을 매수했는데, 그가 사고 나면 주가가 하락했다. 그래서 매도하면 손실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투자 기법을 변경한 1932년 이후에는 실적이 대폭 개선되었다. 케인스는 여전히 시장보다 더 상승한 주식을 매수했지만, 1932년 이전에 매수했던 종목들보다는 초과수익률이 낮은 종목들이었다. 이런 종목들은 케인스가 매수한 후에도 대폭 상승했고, 그가 매도한 후에도 완만하게 상승세를 이어갔다. 저자들은 케인스에게 시점 선택 능력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처음에 '우월한 지식'을 이용해 하향식 투기를 하던 케인스는 이제 상향식 가치투자자처럼 장기 전망이 밝은 견실한 배당주에 투자했다. 재무제표를 이해할 수 있고 상품과 서비스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업에 거액을 투자해서 이익을 냈다.

 

p.80

저는 정보가 바뀌면 결론도 바뀝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 대공황 기간에 통화 정책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는 비판에 케인스가 보인 반응

 

p.84

처음에 케인스는 주로 거시경제적 관점을 바탕으로 광산주에 투자했지만 이후 가치투자자로 진화했다. 그는 스콧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아프리카 금광주 유니언에 투자한 근거를 제시했다. 유니언은 1933-1946년 케인스가 보유한 금광주 중에서 평균 비중이 절반을 넘어 갔다. 그는 1934년 6월 1일 자 펹에서 이 종목은 '가치주'이며 경영진을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회사가 보유한 현금과 국채만으로도 '내재가치'의 3분의 1을 족히 채운다고 말한 대목은 벤저민 그레이엄을 연상시킨다. 당시 주가는 케인스가 추정한 내재가치보다 3분의 1이나 낮았다.

 

오스틴모터스 투자를 보면 케인스의 평가 기법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익수익률(PER의 역수로서 EPS를 주가로 나눈 비율)과 생산단위당 시가총액(market capitalization per unit produced)을 사용했다. 그가 1933년 10월에 한 계산에 의하면 오스틴모터스의 주가는 제너럴모터스보다 3분의 2나 저평가되었다. 

 

p.90-92

재량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시장 수익률보다 낮았던 해는 25년 중 6년에 불과했다. 그 6년 중에서 1923, 1926, 1927, 1928년에는 영국 주식시장이 이례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케인스는 우월한 거시경제 지식에도 불구하고 1929년 10월의 주가 폭락을 예견하지 못했고 1930년 급락도 피하지 못했다. 1922년 운용 개시 이후 1930년까지 재량 포트폴리오의 누적 수익률은 동일 비중 영국 주식시장지수보다 12.6%포인트 낮았고 5년 누적 수익률은 40.3%포인트나 낮았다. 그러나 1930년 이후에는 1938년 회계연도만 제외하면 3년 수익률 기준이든 5년 수익률 기준이든 재량 포트폴리오가 영국 주식시장지수보다 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체임버스 등에 의하면 1921년 킹스칼리지 기금은 평가액이 28만 5,000파운드(2,010만 달러)였다. 이후 투자수익과 현금 유입에 의해서 1946년에는 평가액이 122만 2,000파운드(7,4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이 25년 동안 재량 포트폴리오가 킹스칼리지 기금(부동산 제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에서 68%로 증가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재량 포트폴리오의 매매회전율은 감소했다. 평균 매매회전율 1921~1929년에는 55%였고 1930~1939년에는 30%였으며 1940~1946년에는 겨우 14%였다.

 

p.93-101

나만큼 단기 매매차익에 초연한 사람도 드물 걸세. 나는 단기 등락은 무시한 채 먼 미래만 내다본다고 비난받는다네. 나는 자산과 펀더멘털 수익력이 만족스러우면서 저평가된 종목을 사려는 것이네.

- 케인스, 1942년 "스콧에게 보낸 편지"

 

케인스는 지금은 가치투자로 성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주장했다.

 

가치투자자는 대중의 행동을 예측하려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지능이 비슷하다면 가치투자자가 큰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보다는 민첩한 반응으로 이득을 취하는 편이 더 쉽다. 게다가 인생은 길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빨리 결실을 얻고자 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먼 미래의 소득은 매우 심하게 할인해서 평가한다. 도박 본능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문적인 투자는 견딜 수 없이 따분하고 갑갑하며, 도박 본능이 있는 사람도 적절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는 "매일 증감하는 평가손익이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라고 케인스는 말한다. 매일 증감하는 평가손익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매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장기 이익에 집중하다 보면 단기적으로는 시장 수익률에도 못 미칠 위험이 있다. 체임버스 등에 의하면 케인스의 포트폴리오는 추적오차가 13.9%로, 오늘날 일반적인 기관 펀드의 4배 가까운 수준이다. 추적오차가 플러스이면 초과실적이 나오고, 추적오차가 마이너스이면 미달 실적이 나온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고 색다르며 경솔해 보인다."

 

초과실적을 내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경솔하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미달 실적을 내기가 쉬운데, 그러면 용서받기가 쉽지 않다. 세속적 지혜에 의하면 관례를 거슬러 성공하는 것보다 관례를 따르다 실패하는 쪽이 평판에 유리하다.

 

이는 케인스가 제대로 알고 한 말이다. 케인스는 두 기관의 포트폴리오를 운영하면서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덕분에 관례를 거슬러 투자할 때 얻을 수 있는 기회와 위험을 깨달았고 투자 원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킹스칼리지가 재량권을 부여한 덕분에 케인스는 장기 투자를 시장 변동성을 견뎌낼 수 있다. 그는 자유롭게 투자 결정을 내렸고 필요하면 투자 기법을 변경할 수 있었다. 물론 집중투자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탁월한 실적을 달성했다. 그는 매우 이례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완벽한 재량권이야말로 케인스가 투자해서 누린 가장 큰 이점이었다고 체임버스 등은 판단한다.

 

1938년 시장이 8.7% 하락할 때 킹스칼리지 재량 포트폴리오는 22.6% 하락하면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는데도 대학은 케인스가 아무 방해 없이 계속 투자를 담당하도록 허용했다. 재량 포트폴리오는 이후 회복했다가 1940년 다시 하락했지만 1938년 저점 밑으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 1941년 말에는 1937년 고점을 돌파했고, 1946년 케인스가 사망할 때까지 5년 동안 계속 상승해 두 배로 늘어났다. 1938년 저점 기준으로 재량 포트폴리오가 기록한 복리 수익률은 연 13%였다. (하위 포트폴리오인 체스트펀드는 변동성이 더 높아서 40.1%나 폭락한 적도 있는데 1943년에는 1937년 고점을 돌파했다. 이 펀드도 1938년 저점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으며 이 저점 기준으로 기록한 복리 수익률이 12.4%였다.)

 

같은 기간 시장은 변동성은 감소했으나 계속 하락하다가 1940년 바닥을 쳤고 1942년이 되어서야 1937년 고점을 돌파했다. 저점 기준 시장의 복리 수익률은 6.5%여서 케인스가 운용한 재량 포트폴리오 수익률의 절반에 불과했다.

 

킹스칼리지는 장기 투자에 매우 협조적이었지만 케인스가 이사회 의장 겸 자산운용을 맡았던 보험사 내셔널 뮤추얼 라이프 어슈런스 소사이어티는 정반대였다. 1919년 케인스는 이 회사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이사회 의장으로 일하다가 1921년부터 포트폴리오 운용을 도왔다.

 

1937년 이 포트폴리오에서 64만 1,000파운드(6,100만 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했다. 케인스가 심장마비에서 회복할 무렵, 임시 의장이었던 커즌이 케인스에게 손실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커즌 등 이사회는 시장이 하락하는 동안에도 케인스가 '귀염둥이' 종목을 계속 보유했다고 비난했다. 1938년 3월, 케인스는 커즌의 비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서신을 보냈다.

 

1. 고가에 팔지 못했다면, 저가에 판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추정한 내재가치 밑으로 주가가 떨어진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존 정책을 수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현재 포지션을 고수하는 방법 뿐입니다.

2. 시장이 바닥일 때 주식을 보유해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장이 하락할 때마다 끊임없이 손절매하는 것은 기관과 개인의 업무가 아니며 책임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보유 주식의 평가액이 하락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투자자의 주된 목표는 장기 실적이 되어야 하며 오로지 장기 실적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시장이 하락할 때 주식을 모두 남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현금만 보유하겠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면 시스템 전체가 붕괴합니다.

3. 나는 우리가 실제로 특별히 잘못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식을 거래하다 보면 큰 폭의 등락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이사회는 케인스에게 포트폴리오를 금이나 국채 등 안전 자산으로 재편하라고 요구했다. 혐오감을 느낀 케인스는 이 요구를 거절하고 1938년 10월 의장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프로빈셜 인슈런스는 달랐다. 이 회사는 가족이 경영하는 소형 보험사로 스콧이 자산을 운용하고 있었고 분위기는 킹스칼리지와 비슷했다. 케인스는 1923년 프로빈셜 인슈런스 이사에 선임되어 1946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그는 스콧과 자주 서신을 교환하면서, 시장 하락기에도 주식을 계속 보유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설득할 수 있었다.

 

런던이 포고격을 당하고 미국이 참전을 꺼리는 상황에서도 케인스는 굳건히 주식을 보유했다. 그는 영국의 승리를 확신했다. 1940년의 그 견해는 이례적으로 낙관적인 것이라고 존 바식은 평가한다. 프랑스는 항복했고, 영국 원정군은 덩케르크에서 철수했으며, 150만 톤에 이르는 영국 선박이 독일 유보트에 격침당했다. 케인스는 1929년 대폭락을 떠올렸을 법하나, 영국이 전쟁에 승리하지 못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초기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세계의 종말처럼 피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케인스가 운용한 재량 포트폴리오와 개인 포트폴리오 모두 회복하긴 했지만 이 폭락 과정에서 그는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그의 개인 포트폴리오 평가액은 1936년 말 50만 6,222파운드(5,200만 달러)에서 1938년 말 18만 1,244파운드(1,800만 달러)로 약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1946년 그가 사망했을 때 개인 포트폴리오의 평가액은 44만 파운드(3,000만 달러)였으므로 1936년 고점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커즌에게 답신을 보내고서 2개월 후인 1938년 5월, 케인스는 킹스칼리지 재산관리위원회에 자신의 투자 정책을 요약한 메모를 배포했다. 체스트 펀드 등 재량 포트폴리오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 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메모에 담긴 표현은 커즌에게 보낸 답신보다 온건했지만 그가 제시한 원칙에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이 메모에서 그는 장기 투자와 집중 가치투자가 필요한 근거를 매우 명확하게 설명했다. 1930년대 초 PR 파이낸스 이사회를 설득하던 방식으로, 케인스는 신용순환 투자 이론에 의한 시점 선택이 이제 효과가 없는 이유부터 설명했다. 

 

우리는 경기순환 단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주식을 매매하는 방식으로는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신용순환은 시장이 하락할 때 대표 종목을 매도하고 시장이 상승할 때 대표 종목을 매수하는 기법으로서, 각종 비용과 이자를 감안하고서도 많은 수익을 올리려면 비범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중략) 이런 경험을 하고나서 나는 대규모 신용순환 매매는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뒤늦게 사거나 팔게 되고, 매매가 지나치게 빈번해져서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며, 지나치게 투기적이어서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이런 매매가 확산되면 변동성이 확대되어 사회에도 큰 해를 끼치게 됩니다. 

 

케인스의 제자 리처드 칸에게 보낸 서한에도 신용순환 투자 이론에 의한 시점 선택 전략이 실패했다고 썼다. "거의 20년 동안 투자자 다섯 명이 이 전략을 시도했지만 나는 성공한 사례를 한 건도 보지 못했다네." 그는 킹스칼리지에 보낸 메모에서 세 가지 원칙으로 자신의 투자철학을 밝혔다. 

 

1. 장기적으로 전망한 내재가치보다 싸고 그 시점의 대체투자 종목보다도 싼 종목을 소수만 신중하게 선택한다.
2. 이런 종목들을 대량으로 사서, 투자 판단에서 명백한 실수가 드러나지 않는 한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장기간 끈질기게 보유한다.
3. 투자 포지션의 균형을 유지한다. 즉 소수 종목을 대량 보유하더라도 가능하면 위험이 상쇄되도록 위험을 다각화한다.

 

끝으로 그는 말했다. "이상적인 포트폴리오는 정말로 안전하게 이자소득을 확보하는 증권과, 수많은 난관을 세계 최고의 기술로 극복할 수 있는 기업의 주식으로 구성된다." 이는 대공황을 포함해 거의 20년 동안 케인스가 힘든 경험을 통해 얻은 독창적인 생각이다. 그레이엄이 <현명한 투자자>(1949)에서 제시한 투자철학보다 1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케인스는 극단적인 분산투자를 멀리하면서 핵심 종목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에서는 상장 주식을 모두 포함해야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완벽하게 분산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완벽하게 집중투자를 하려면 포트폴리오에 한 종목만 포함해야 한다.

 

투자자는 집중투자를 통한 수익률 극대화와 분산투자를 통한 위험 극소화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결국 보유 종목의 수에 좌우된다. 장기적으로 가치투자자의 실적은 저평가 종목(안전마진이 큰 종목) 발굴 능력에 달렸다. 보유 종목의 수가 증가할수록 포트폴리오의 안전마진은 감소한다. 반대로 안전마진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가장 저평가된 종목 하나만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 단일 종목 특유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결국 투자자는 집중투자를 통한 수익률 극대화와 분산투자를 통한 위험 극소화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최적 보유 종목 수는 얼마인가? 답은 투자자의 능력에 달렸다.

 

노련한 투자자는 보유 종목의 안전마진을 극대화해서, 즉 최고의 투자 아이디어에 집중해서 장기 실적을 높일 수 있다. 노련한 투자자는 가장 저평가된 종목을 발굴해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분식회계나 재정난 등 뜻밖의 사건이 발생해 회복 불능의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 이런 회복 불능의 손실을 원금 손실이라고 부르며 가치투자자들은 이를 진정한 위험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단지 시장가격이 변동해 평가손익이 발생하는 현상은 진정한 위험으로 보지 않으므로 가치투자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이용하려고 한다. 원금 손실이 포트폴리오에 미치는 영향은 개별 종목의 비중에 좌우된다. 즉 개별 종목의 비중이 커질수록 이 종목의 원금 손실이 포트폴리오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 따라서 포트폴리오의 집중도가 높아질수록 개별 종목에서 발생하는 악재가 포트폴리오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 케인스는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위험 측면에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여러 분야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보다 확신하는 종목 소수를 대량으로 보유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이런 확신이 착각일 수도 있다.

 

p.112-114

논문에서 켈리는 경마 대신 야구의 승부를 맞히는 게임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도박꾼은 '소음 없는' 사설 전화 회선을 이용해 남들보다 먼저 승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두 팀의 기량이 막상막하여서 사람들이 동일하게 베팅한다면 도박꾼은 배당률 100%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도박꾼이 완벽한 정보를 얻는 상황이라면 그가 버는 금액은 오로지 베팅 금액에 좌우된다. 그는 얼마를 걸어야 할까? 가진 돈을 모두 걸어야 한다. 그러면 원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N번 베팅 후에는 원금이 2^N배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100달러로 시작하면 두 배로 늘어 200달러가 되고, 이어서 400달러, 800달러, 1,600달러, 3,200달러 식으로 증가한다. 10회 베팅한 후에는 원금이 100달러 * 2^10이 되어 10만 2,400달러로 증가한다. 이렇게 원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켈리는 주간 복리 이자율이 100%인 투자에 비유했다. 그는 '도박꾼 원금의 기하급수적 증가율'을 G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소음 있는' 사설 전화 회선을 이용한다고 가정했다. 소음 탓에 정보가 틀릴 확률이 p이고 맞을 확률이 q였다. 이번에도 도박꾼이 가진 돈을 모두 건다면, 원금의 기대가치는 여전히 극대화할 수 있지만 파산할 수도 있다. 소음 탓에 정보가 한 번이라도 틀리면 그는 파산하며, 이 게임을 무한히 반복하면 정보가 한 번은 틀릴 수밖에 없다. 도박꾼이 원금의 일부만 건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얼마를 걸어야 할까? 최적 베팅 금액은 '도박꾼 원금의 기하급수적 증가율' G를 극대화하는 금액이다. 켈리는 섀넌이 정보 이론 논문에서 사용한 전송 속도 정리를 다음과 같이 단순화했다.

위 방정식이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화할 수도 있다. 만일 배당률이 1이고 승리 확률이 절반이라면 (예컨대 동전을 던져서 이기면 원금이 두 배가 되고, 지면 원금을 모두 잃는다면) 최적 베팅 금액은 제로다. 켈리 기준에 의하면 배당률이 1이고 승리 확률이 전혀 유리하지 않다면 돈을 걸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승리 확률이 100%라면 최적 베팅 금액은 보유 자금 전부가 도니다. 승리 확률이 50~100%라면 최적 베팅 금액은 배당률과 승리 확률에 따라 달라진다.

 

승리 확률이 높아질수록 최적 베팅 금액이 증가하고, 승리 확률이 낮아질수록 최적 베팅 금액이 감소한다. 켈리의 기준이 전통적인 도박 공식과 다른 점은 원금의 기하급수적 증가율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켈리는 논문에서 이 모형을 다른 경제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익을 재투자할 수 있고 투자 금액을 조절할 수 있으면 된다.

 

켈리 기준을 이용해 베팅 금액을 계산해보자. 배당률이 1이고 승리 확률이 51%라면 켈리 기준이 추천하는 최적 베팅 금액은 2%다. 즉 보유 자금이 100달러라면 2달러가 된다.

 

f = (bp - q) / b = (1 * 0.51 -0.49) / 1 = 0.02 = 2%

 

p.120-122

파운드스톤에 의하면 섀넌은 오히려 확고한 장기 가치투자자였다. 섀넌은 주가가 장기적으로는 이익 성장을 따라간다고 믿었으므로 "기업 경영진을 평가하고 제품의 미래 수요를 예측해 향후 몇 년 동안 이익 성장률을 추정했다." 그러므로 핵심 데이터는 "며칠이나 몇 달 동안의 주가 흐름이 아니라 과거 몇 년 동안의 이익 흐름"이었다. 섀년은 로그 차트에 회사의 과거 이익을 표시하고 나서 이 추세를 바탕으로 미래 이익을 추정했다. 그는 추세를 좌우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섀넌은 아내와 함께 신생 기술회사를 찾아가 경영진을 만났다. 두 사람은 기업이 판매하는 제품을 테스트하기도 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분석할 때는 치킨을 사서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우리가 직접 사용해보고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자 대상에서 탈락시켰습니다."

 

섀넌은 주가 데이터를 내려 받아 분석하기도 했다. 1981년 주가 정보 서비스에 가입해 애플II로 주가 데이터를 내려 받았고, 스프레드시트로 포트폴리오 평가액을 자동 계산했다. 허쉬버그의 자료에는 1981년 1월 자 출력물이 있었고, 섀넌의 포트폴리오를 분석해서 나타냈다.

섀넌의 포트폴리오 평가액은 58만 2,717.50달러로서 2015년 가치로는 약 150만 달러에 해당한다. 이 포트폴리오에는 보유 종목 중 데이터마린 인터내셔널이 빠져있는데, 섀넌이 허쉬버그에게 말한 바로는 실적이 가장 나쁜 종목이었다. 1971년 매수했고 이후 연 수익률이 '겨우' 13%였다.

 

포트폴리오에서 특히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 번째는 극단적인 집중투자다. 텔레다인 한 종목의 비중이 무려 81%에 이른다. 2위 종목은 모토로라로 12%를 차지하고 3위 종목은 휴렛팩커드로 5%를 차지했다. 나머지 7개 종목의 비중은 2%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극단적인 집중투자를 하게 된 이유다. 섀넌은 포트롤리오에 손을 대지 않았다. 종목을 편입한 다음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모토로라는 투자 원금의 57배가 되었다. 보유 비중이 가장 큰 텔레다인은 투자 원금의 무려 194배가 되었다. 보유 비중이 3위인 휴렛팩커드는 자그마치 630배로 뛰었다. 심지어 보유 비중이 낮은 종목들도 장기간 보유하는 동안 대폭 늘어났다. 1%에 못 미치는 매스코는 17배가 되었다. 0.3%인 크라운 코르크 앤드 실도 투자 원금의 3배가 되었다. 섀년이 집중투자해 장기간 보유한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허쉬버그에게 지난 30년 동안 포트폴리오를 조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나는 세금을 절약하려고 주식을 장기 보유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돈을 빌려서라도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싶지, 주식을 팔아 채권에 투자할 생각은 없습니다.

 

섀년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준 3대 종목(보유 비중 98%)은 모두 MIT와 벨연구소 동료들과의 인연으로 투자한 종목이었다. 섀년은 허쉬버그에게 말했다.

 

"나의 투자는 의사소통 과정에서 소음을 걸러내어 신호를 추출해내는 직업에 가까웠습니다. 똑똑한 투자자라면 자신이 우위를 확보한 분야를 찾아내 그 분야에서만 기회를 탐색할 것입니다."

 

p.127-129

켈리 기준은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확률상 우위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베팅하고 우위가 없을 때는 베팅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케인스는 '켈리 베팅 유형'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확신하는 종목에 과감하게 베팅했지만 수학적 정밀성까지 추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기존 지식으로는 정확한 수학적 기댓값을 산출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적 베팅 금액을 제시하는 켈리 기준은 위험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켈리 기준은 원금의 기하급수적 증가율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기댓값에서 드러나지 않는 위험까지 포착해낸다. 따라서 파산 위험을 절대 떠안으려 하지 않는다. 확률이 유리하면 베팅을 늘리고 확률이 불리하면 베팅을 줄이면서 균형을 유지한다.

 

켈리 기준의 단점은 확률이 유리할 때 추천하는 베팅 비중이 지나치게 커서 투자자들이 변동성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켈리 기준의 일부만 적용하는 투자자가 많다. 켈리 기준은 베팅 금액의 최고 한도로 보는 편이 옳다. 베팅 금액이 이 한도를 넘어서면 기대수익률은 증가하지 않고 손실 위험만 증가한다. 이런 모든 특성은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켈리는 베팅 이론을 수식으로 정리해 발전시켰다. 다른 어떤 전략보다도 켈리 기준을 따를 때 장기적으로 수익이 더 늘어난다는 것을 켈리는 보여주었다.

 

소프는 도박과 투자에 켈리 기준을 가장 먼저 적용해 널리 알렸지만, 가치투자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장을 이겨라>서문에서 가치투자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가치'를 추구했다. 이른바 기본적 분석으로 주식시장에 접근했다. 가치투자자들은 모든 주식에 '내재가치'가 있으며, 내재가치는 시장가격과 전혀 다를 때가 많다고 믿는다. 내재가치는 장래 이익과 배당의 흐름에 의해서 결정된다. (중략) 가치투자자들은 재무제표, 산업과 기업의 전망, 경영진의 능력, 정부 정책, 기타 미래 이익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분석한다. 이런 분석을 통해 미래 이익 흐름을 추정하고 나아가 내재가치를 평가한다. 주식의 시장 가격이 내재가치보다 낮으면 그 주식은 매력적이고, 내재가치보다 높으면 그 주식은 피해야 한다.

 

소프는 가치투자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판단해서 결국 가치투자를 버리고 차익거래를 선택했다.

 

내 친구들은 아무 생각 없이 투자하면서도 큰 돈을 벌었지만, 나는 기본적 분석을 하면 할수록 실적이 나빠졌다. 나는 현실 문제에 부닥치면서 갈수록 기본적 분석에 흥미를 잃었다. 1년이나 2년 뒤의 이익을 추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저평가된 주식을 사고 남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평가해 그 주식을 사야만 주가가 상승한다. 그러나 아무리 장래 전망을 정확하게 평가해 '저평가' 종목을 사도, 장기간 저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해 투자자를 좌절하게 하는 종목이 많다.

 

p.132

우리 전략은 일반적인 분산투자 이론을 따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우리 전략이 전통적인 분산투자 전략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은 다릅니다. 집중투자 전략을 사용하면 기업 분석을 더 강도 높게 할 수 있고, 기업의 경제 특성에 대해 좀 더 안심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우리는 위험을 사전과 동일하게 '손실이나 피해 가능성'으로 정의합니다.

- 워런 버핏, 1993년

 

p.134-138

버핏의 1961년 투자조합 서한에 의하면 주가가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경쟁이 격해지고 보험사들이 합병하면서 1930년대 연 50만 달러였던 이익이 1958년에는 10만 달러로 감소했지만 회사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700만 달러가 넘어서 주당 65달러 수준이었다. 주가는 45달러였다. 1938년 투자 포트폴리오가 주당 20달러였을 때는 주가가 110달러였으므로 사업 가치가 주당 90달러였다. 20년 뒤인 1958년에는 주가가 45달러이므로 사업 가치가 주당 -20달러로 평가받는다는 뜻이다. 만일 사업 가치를 아예 무시한다면 투자 포트폴리오 1달러당 69센트밖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버핏은 투자조합의 자본 중 3분의 1 이상을 투자했다. 그는 마침내 샌본맵 이사회를 설득해 72%에 이르는 자사주를 매입하게 했다. 회사는 보유하던 포트폴리오 증권을 적정 가격으로 계산해서 교환해주었다. 그리하여 주주들이 보유한 자산의 가치가 다소 높아졌고 EPS와 배당률도 상승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투자는 버핏이 (샌본맵 같은) 그레이엄 스타일의 투자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와 샌본맵 둘 다 내재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대규모로 매수했다는 점은 같지만 가치의 원천은 질적으로 다르다. 샌본맵은 이른바 '담배꽁초' 투자로, 실적은 부진하지만 자산가치가 높아 청산하면 이익이 실현되는 회사였다. 반면에 아메리칸익스프레스는 자산가치는 낮지만 경제성이 탁월한 회사였다. 버핏은 담배꽁초 투자 기법에서 벗어난 이유를 1989년 주주 서한에서 밝혔다.

 

주식을 아주 싼 가격에 사면, 그 기업의 장기 실적이 형편없더라도 대개 근사한 이익을 남기고 팔 기회가 옵니다. 나는 이것을 '담배꽁초' 투자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한 모금만 남은 꽁초는 하찮은 존재지만, '싼 가격' 덕분에 이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산 전문가가 아니라면 이런 기법을 쓰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첫째, 처음에는 싼 가격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십중팔구 싸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난국에 처한 회사는 한 문제가 해결되면 곧바로 다른 문제가 등장합니다. 주방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띈다면 한 마리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둘째, 처음에 싼 가격에서 얻은 이점은 기업의 낮은 수익률 때문에 곧바로 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0만 달러에 되팔거나 청산할 수 있는 기업을 800만 달러에 샀을 때, 즉시 팔거나 청산하면 높은 이익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투자 금액의 겨우 몇 퍼센트만 벌면서 보유했다가 1,000만 달러에 판다면 실망스러운 실적이 나올 것입니다. 시간은 훌륭한 기업에는 친구지만 신통치 않은 기업에는 적입니다.

 

샌본맵에 투자한 후 버핏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는 샌본맵 이사회를 설득해 적절한 시기에 절세되는 방법으로 자사주를 매입했다. 버핏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면 샌본맵은 주가가 청산가치에도 못 미치는 담배꽁초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반면 아메리칸익스프레스는 일시적으로 자금난에 빠진 우량 기업이었다. 자금난이 완화되자 주가가 반등했으므로 버핏은 탁월한 중기 수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버핏은 투자조합 지분을 매각하고 나서 아메리칸익스프레스가 계속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버크셔 해서웨이 경영권을 확보한 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주식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13억 6,000만 달러에 사들인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지분 14.2%는 평가액이 138억 달러에 이른다. 버핏이 투자조합 시절 1,300만 달러에 사들인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지분 5%를 이후 50여 년 동안 계속 보유했다면 2016년 현재 평가액은 45억 달러로서 연 수익률 13%를 기록했을 것이다. 버핏은 1994년 주주 서한에서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와 관련된 사건이 두 가지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아메리칸익스프레스가 샐러드유 스캔들에 휘말려 주가가 폭락했을 때, 우리는 버핏투자조합의 자본금 약 40%를 투자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 투자조합이 투자했던 최대 금액이었습니다. 우리는 1,300만 달러를 들여 5%가 넘는 지분을 확보했습니다. 현재 우리 지분은 10%에 약간 못 미치며 취득원가는 13억 6,000만 달러입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의 이익은 1964년에는 1,250만 달러였으나, 1994년에는 14억 달러였습니다.)

 

1964~1994년의 30년 동안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의 이익은 100배가 넘게 증가했다. '시간은 훌륭한 기업에는 친구지만 신통치 않은 기업에는 적'이라는 버핏의 견해는 이로써 증명되었다. 1994~2014년의 20년 동안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의 이익은 25배 증가해 340억 달러가 되었다. 버핏이 처음 매수한 1964년 기준으로는 이익이 280배 증가했다.

 

1967년 투자조합 서한에서 버핏은 샌본맵 같은 양적 저평가 종목과 아메리칸익스프레스 같은 질적 저평가 종목의 차이를 언급했다.

 

지금까지 투자 목적으로 증권과 기업을 평가할 때는 항상 질적 요소와 양적 요소를 혼합해서 사용했습니다.한쪽 극단에서는 질적 요소만 주목하는 분석가가 '(산업의 내재적 여건과 경영진 등을 고려해서 전망이 밝은) 기업만 제대로 고르면 가격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 극단에서는 양적 요소만 중시하는 분석가가 '사는 가격만 적절하면 기업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중략) 나는 양적 요소 중시 집단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지금까지 이탈했다가 돌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이 집단에 남은 사람이 나뿐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정말로 '가능성 높은 통찰'이 떠오를 때는 질적 요소를 크게 중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통찰에서 대박이 터지니까요. 그러나 양적 요소를 평가할 때는 통찰이 아예 필요 없습니다.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어떤 숫자에서 통찰이 떠오르는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따라서 진짜 대박은 흔히 질적 요소를 잘 판단했을 때 터지고, 확실한 수익은 명확한 양적 요소를 잘 판단했을 때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등에 집중투자한 덕분에 버크셔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소프틑 버핏의 투자 실적을 분석했다. 버핏은 뉴잉글랜드 직물회사 버크셔의 지분을 주당 20달러에 인수했다. 1997년이 되자 버크셔의 주가는 3,500배 상승한 7만 달러가 되어 연 수익률 27%를 기록했다. 버핏이 버크셔 주가와 순자산가치를 복리 증식시킨 속도가 켈리 기준의 기하급수적 증가율과 매우 비슷하다고 소프는 평가했다. (버크셔 A주는 1만 배 이상 상승해 2016년 현재 20만 달러가 훨씬 넘으며 연 수익률 19.4%를 기록하고 있다)

 

소프의 경험적 증거에 의하면 지금까지 버핏은 켈리 기준과 같은 방식으로 주력 종목에 계속해서 집중투자했다. 이는 엄청난 기량이 필요한 이례적인 투자 방식이다. 

 

p.139-143

에드윈 엘튼과 마틴 그루버는 1977년 논문에서, 보유 종목이 20~30개면 분산투자의 이점을 대부분 누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동일 비중 종목 3,290개로 구성된 모집단에서 무작위로 종목을 추출해서 규모가 다양한 동일 비중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엘튼과 루버는 달성 가능한 최저 위험을 시장 위험으로 간주하고 이 위험을 시장의 '분산'으로 표시했다.

 

분산은 해당 증권의 수익률이 시장 수익률에서 벗어나는 정도를 측정한다. 분산이 0이라면 두 수익률이 똑같다는 뜻이다. 분산이 크면 해당 증권의 수익률이 시장 수익률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의미다. 모집단을 구성하는 3,290개 종목을 모두 포트폴리오에 포함하면 그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시장 수익률과 같아지므로 분산은 0이 된다. (분산이 0인 포트폴리오도 수익률이 변동하므로 위험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이를 분산 불가능한 위험으로 간주해서 무시한다.) 이와 반대로 단일 종목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는 분산이 가장 크므로 위험도 가장 크다고 엘튼과 그루버는 간주했다. 

위 표는 엘튼과 그루버의 연구를 분석한 논문에서 발췌한 자료다. 포트폴리오에 동일 비중 종목들을 무작위로 선택해 추가함에 따라 위험(엘튼과 그루버는 주간 수익률의 분산으로 정의했지만 여기서는 연간 수익률의 표준편차로 정의)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이 표에서 단일 종목 포트폴리오의 표준편차는 49.24%다. 종목이 2개가 되면 표준편차는 37.36%가 되어 위험이 0.76배 수준으로 감소하지만, 그래도 시장의 표준편차인 19.16%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 종목이 4개가 되면 위험은 단일 종목 포트폴리오의 0.6배 수준으로 감소한다. 그러나 종목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위험 감소 속도가 갈수록 둔화된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종목이 20개에 도달하면 포트폴리오 위험의 92%가 사라진다. 여기에 10개를 더해 30개로 늘리면 포트폴리오 위험은 95% 사라지지만 겨우 3%포인트 개선될 뿐이다. 종목이 30개를 넘어가면 위험 감소효과보다 거래비용 등 각종 비용이 더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2008년 경영대학원 학생들이 분산투자에 관해 질문했을 때, 버핏은 '분산투자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대답했다.

 

자신감 넘치는 투자 전문가에게는 과감한 집중투자를 권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는 철저한 분산투자를 권합니다. 투자 전문가에게는 분산투자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1위 선택 종목이 있는데도 20위 선택 종목에 투자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찰리와 나는 주로 5개 종목에 투자했습니다. 내가 운용하는 자금이 5,000만 달러, 1억 달러, 2억 달러라면, 5대 종목에 80%를 투자하면서 한 종목에 최대 25%까지 투자할 것입니다. 1964년에는 한 종목에 40% 이상을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투자자들에게 원하면 자금을 인출해 가라고 말했지만 인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종목은 샐러드유 스캔들이 터진 아메리칸익스프레스였습니다.

 

분산투자에 관한 버핏의 관점은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해당한다. 한쪽은 시장 포트폴리오이고 다른 쪽은 켈리 기준에 가까운 집중투자다. 투자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장 포트폴리오에 가까운 저비용 인덱스펀드가 최상의 대안이라고 버핏은 말한다. 그러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저평가 종목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집중투자가 더 이치에 맞는다고 말한다. 그런 저평가 종목이 과연 존재할까? 1988년 주주 서한에서 버핏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학계, 투자 전문가, 기업 경영자들은 시장이 '자주' 효율적인 모습을 확인한 다음, 시장이 '항상' 효율적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자주'와 '항상'의 차이는 낮과 밤만큼이나 큰 것입니다.

 

1994년 버핏의 동업자 찰리 멍거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한 강연에서 이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면서 투자를 경마 베팅에 비유했다. 경마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데도 계속해서 승리하는 사람이 있다고 멍거는 말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패리 뮤추얼 시스템에서 승리한 사람들 사이에는 단순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여간해서는 베팅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다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면 간혹 가격이 왜곡되어 승산이 높은 내기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발견하면 현명한 사람들은 과감하게 베팅합니다. 이들은 확률이 유리할 때 크게 베팅하고, 평소에는 베팅하지 않습니다.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시장은 자주 효율적이어서 가격이 왜곡되는 사례가 흔치 않으므로 포트폴리오에 포함되는 종목을 늘리기가 어렵다. 훗날 인터뷰에서 멍거는 '버크셔 스타일 투자자들' (장기 가치투자자들)이 대개 집중투자를 한다고 말했다. 

 

버크셔 스타일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집중투자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계는 분산투자를 찬양해서 현명한 투자자들에게 끔찍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나는 분산투자 개념 자체가 그야말로 미친 생각이라고 봅니다. 분산투자는 투자 실적이 시장 평균 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마음이 편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아무 이점도 없는 투자를 왜 합니까?

 

p.158

나는 장기간에 걸쳐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사람 중 20개 업종에 걸쳐 100개 종목을 보유한 사람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책으로 다뤄볼 만한 주제지요. 장기간 탁월한 실적을 유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밥 밀러처럼 전문 분야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집중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오래 버티지요.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 찰리 멍거, 2014년

 

p.166-171

씨즈캔디를 인수하기 전까지 버핏과 멍거는 순자산가치보다 싼 기업을 찾는 그레이엄식 투자를 추구했다. 실제로 멍거는 3대 종목인 다이버시파이드 리테일링, 블루칩스탬프, 뉴아메리카펀드를 모두 순자산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사들였다. 씨즈캔디의 가격은 순자산가치의 3배가 넘었으므로 그레이엄식 투자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거래였다. 여기서 멍거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씨즈캔디는 순자산가치보다 비싸게 샀지만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백화점 체인 호크실드콘(Hochschild, Kohn)은 순자산가치보다 싸게 샀는데도 실패했습니다. 두 가지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더 높은 가격을 치르더라도 우량 기업을 사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씨즈캔디는 정말 탁월한 회사였다. 버핏과 멍거는 유보이익으로 고속 성장하는 회사가 경영하기 훨씬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씨즈캔디는 유보이익으로 성장하면서 현금까지 창출했으므로 버핏과 멍거는 이 현금으로 다른 기업을 인수할 수 있었다. 2007년 주주 서한에서 버핏은 씨즈캔디를 "전형적인 꿈같은 기업"이라고 표현했다. 2007년 씨즈캔디가 자기자본 4,000만 달러로 벌어들인 이익은 8,200만 달러로, ROE가 무려 205%였다. 이익이 500만 달러에서 8,200만 달러로 16배 증가하는 동안, 투하자본은 겨우 5배 증가했을 뿐이다.

 

씨즈캔디는 1972~2007년 동안 13억 5,000만 달러를 벌어, 3,200만 달러만 자체 성장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크셔에 넘겨주었다. 일반 기업이 이익을 500만 달러에서 8,200만 달러로 증가시키려면 운전자본과 고정자산에 약 4억 달러가 더 들어가며, 그러고서도 회사의 가치는 여전히 씨즈캔디에 못 미친다고 버핏은 평가했다. 씨즈캔디가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인 덕분에 버핏과 멍거는 이 돈으로 우량 기업을 인수해 버크셔를 최강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장기 우위를 확보한 일부 기업에는 다소 높은 가격을 치를 만하다"는 사실을 멍거는 깨달았다. 

 

치르는 가격보다 더 높은 품질을 얻으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멍거는 씨즈캔디를 인수하고 나서, 순자산가치보다 가격이 낮은 기업보다 우량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안전마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량 기업은 소유주가 관심과 노력을 많이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반면 주가가 순자산가치보다 낮은 기업은 대개 사업이 부실했다. 이런 저질 기업에는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도 소용없을 때가 많았다.

 

멍거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그저 그런 회사를 경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 이 회사는 비즈니스 모델에 문제가 있었다. 새 장비를 판매하려면 먼저 구입해야 했으므로 막대한 자금이 재고자산에 묶였다. 그러나 씨즈캔디는 정반대였다. 회사운영에 추가 자본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막대한 현금을 창출했다. 버핏과 멍거에게 더없이 고마운 회사였다. 이런 회사를 어디에서 더 찾아낼 수 있을까?

 

저명한 성장주 투자자 필립 피셔는 1958년 성장주 투자자들의 바이블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를 저술했다. 피셔는 사실을 수집해서 우량 기업을 찾아내라고 제안했다. 경쟁자, 고객, 공급업자들을 조사해 경영진의 자질, 연구 개발 및 기술력, 고객 서비스 능력, 마케팅 역량 등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피셔는 수소문해서 얻은 사실을 바탕으로 기업의 성장 잠재력, 기술력, 서비스 품질, 소비자 독점력 등을 판단했다. 버핏은 필립 피셔의 투자철학을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철학과 결합했다. 그레이엄은 내재가치와 안전마진 개념을 바탕으로 가치투자 철학을 집대성했다. 피셔는 우량 성장 기업에 안전마진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89년 버핏은 그레이엄, 피셔, 씨즈캔디에서 얻은 교훈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적당한 기업을 싼 값에 사는 것보다 훌륭한 기업을 적절한 가격에 사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버핏은 이 말을 자주 했고 멍거 덕분에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멍거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이해했지만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수할 기업이나 주식을 찾을 때 일류 경영자가 있는 일류 기업을 탐색합니다." 물론 멍거는 계속 가치투자를 유지했다. 2013년 데일리저널 주주총회에서 멍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제성이 탁월한 기업이더라도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면 바람직한 종목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제성이 빈약한 기업이더라도 가격이 매우 싸다면 바람직한 종목입니다.

 

1972년에도 버핏과 멍거는 주가가 순자산가치보다 낮은 기업을 계속 사들였다. 1972년 늦여름에는 블루칩을 통해서 패서디나 소재 저축대부조합들의 지주회사 웨스코파이낸셜의 지분 8%를 200만 달러에 인수했다. 1973년 1월, 웨스코파이낸셜은 산타바바라 소재 저축대부조합인 파이낸셜코퍼레이션을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인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버핏과 멍거는 격분했다. 웨스코는 저평가된 자사주를 고평가된 파이낸셜코퍼레이션 주식과 교환할 예정이었다.

 

거는 웨스코를 더 확보해 인수를 막고 싶었다. 버핏은 망설였지만 멍거는 그를 설득하는 동시에 블루칩을 통해 웨스코의 지분을 17%로 높였다. 버핏과 멍거는 웨스코 설립자의 딸인 대주주 베티 피터스를 설득해 마침내 합병을 무산시켰다. 당국의 승인이 없으면 추가로 취득할 수 있는 지분이 최대 3%였으므로 버핏과 멍거는 웨스코 주식을 주당 17달러에 매수하기로 했다. (단기적으로 주가가 하락할 수 있었지만 합병 내재가치인 17달러에 사기로 했다.) 두 사람은 블루칩을 통해 합병을 무산시켰으므로 공정한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SEC가 이 거래에 주목하게 되었고 블루칩은 일상 업무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SEC는 블루칩이 17달러에 매수 주문을 내서 웨스코의 주가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합병을 무산시키고 나서 웨스코의 주가를 띄우려고 높은 가격에 매수 주문을 냈다고 의심한 것이다. SEC는 블루칩이 합병을 무산시키려고 합병 전에 주식을 인수한 행위도 비난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SEC의 비난은 정당했다. 실제로 블루칩은 합병을 무산시키려고 주식을 더 사들였고, 주가를 띄우려고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불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블루칩의 실제 문제는 이전에 제기된 독점 금지 소송이었다. 그사이 경영자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SEC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블루칩의 지분이 버핏,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사이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도 문제를 어렵게 했다. SEC는 이것이 일종의 사기를 숨기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버핏과 멍거는 지분 관계가 복잡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장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발생한 일이며 다른 의도나 이해 상충은 없다고 설명했다. SEC는 블루칩을 고소했으나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곧바로 합의했다. 그리고 매매 과정에서 피해를 본 웨스코 주주들에게 보상금 11만 5,000달러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합의 후에 버핏과 멍거는 복잡한 지분 구조를 정리하기로 했다. 이들은 웨스코를 블루칩에 합병했고 1983년에는 블루칩을 버크셔가 인수했다. 버크셔는 주식 교환 방식으로 블루칩 주주들에게 버크셔 지분 8%를 지급하면서 블루칩 신규 지분 40%를 인수했다. 사태가 모두 정리되자 멍거는 버크셔의 지분 2%를 보유하면서 부회장이 되었고 버크셔의 자산은 16억 달러가 되었다. 버핏과 멍거는 이제 훌륭한 회사에서 투자철학을 공유하게 되었다.

 

p.175-178

<찰리 멍거 자네가 옳아!>에서 버핏은 멍거가 처음에는 그레이엄 방식의 가치투자를 했지만, 월터 슐로스 같은 전통적 가치투자자들보다 훨씬 집중해서 투자했다고 말했다.

 

찰리도 내재가치보다 싼 주식을 선택했지만, 극소수 종목에 집중투자했으므로 변동성이 매우 컸습니다. 그는 극심한 변동성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집중투자를 통해 실적을 추구하는 스타일입니다.

 

멍거는 '극소수 종목'을 '최대 3종목'으로 정의한다. 

 

나는 파산 위험은 낮으면서 초과수익 확률이 높은 종목을 셋 정도만 발굴할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세 종목을 찾아내더라도 중간 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반복해서 계산해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대수학과 상식으로 분석한 결과입니다.

 

멍거가 극소수 종목을 보유하는 근거는 현실적이다. "150개 종목이나 보유하면서 어떻게 항상 초과수익을 기대할 수 있죠? 터무니 없는 생각입니다." 그는 증권의 가격은 대체로 적절한 수준이라고 믿는다.

 

효율적 시장 이론을 제시한 사람들을 미쳤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주장이 지나쳤을 뿐이지요.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옳습니다. 

 

이런 생각과 분석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이 우위를 확보한 분야에서 단지 몇 종목만 탐색한다.

 

내가 모든 종목에 대해 다른 모든 사람보다 크게 우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내가 크게 우위를 차지할 종목을 몇 개는 찾아낼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기회비용도 생각합니다. 일단 A, B, C 세 종목을 보유한다면 다른 종목은 사지 않습니다. 나는 세 종목을 실제로 분석했습니다. 장기적으로 분산투자가 얼마나 필요한지는 모릅니다. 나는 그 확률을 종이에 계산해보았습니다. 30년 동안 3종목만 보유하는데 각각 연 4% 초과 수익이 기대된다면, 실적이 매우 나쁠 확률은 대체로 얼마나 될까요? 30년 동안 보유하면서 원금 손실을 피한다고 가정하면, 변동성은 크겠지만 장기 기대수익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옵니다. 고등학교 대수학만 이용해서 내가 직접 계산한 결과입니다.

 

멍거는 대규모 투자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소외된 소형주에서 우위를 확보했다.

 

성공한 가치투자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엑손(Exxon), 로열더치, 프록터앤드갬블, 코카콜라 등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장기간 성공을 거둔 가치투자자들 대부분은 대중이 몰려들지 않는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심프슨과 마찬가지로 멍거도 자사주를 대량 매입하는 기업을 좋아한다. 

 

성공하는 기업들의 공통점은 대량으로 자사주를 매입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기업에 투자하면 장기 실적이 매우 좋아집니다. 평범한 경영자가 잉여현금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기업들은 절반 이상이 망한다고 버핏과 루와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이들은 지나치게 비싼 가격에 기업을 인수하는 등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대개는 자사주를 매입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짐 깁슨이 '재무 식인종'이라고 부르는 자사주 매입 기업들이 매력적입니다. 

 

멍거는 집중투자에는 기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버핏이 루 심프슨을 가이코의 CIO에 임명했을 때, 멍거는 심프슨의 기질을 이렇게 언급했다. 

 

버핏은 투자에는 매우 높은 지능지수가 필요 없으므로 남는 지능지수는 팔아버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버핏의 견해는 극단적입니다. 지능지수가 높으면 유리하지요. 그러나 기질을 습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견해는 옳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모르는 수재보다는 성실하고 건전한 사람이 나을 것입니다. 루는 매우 똑똑하기도 하지만 기질이 훌륭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투자자의 기질이고 우리 기질과도 비슷합니다.

 

버핏, 멍거와 마찬가지로 심프슨도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며, 매매를 빈번하게 하지 않는다.

 

심프슨에게도 고유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본성에 맞는 스타일이 있다는 말이지요. 지나치게 어려워 보이는 분야가 있으면 그런 분야에는 접근하지 않습니다. 우위를 확보한 분야가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는 장기간 매매를 하지 않을 떄도 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비법입니다. 우위를 확보한 분야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바로 심프슨 스타일, 멍거 스타일, 버핏 스타일입니다.

 

앉아서 생각하는 투자 스타일이 대부분 펀드매니저에게는 맞지 않다고 멍거는 말한다. 어느 시점이든 저평가된 우량 종목은 소수에 불과하므로 이들로는 대규모 분산 포트폴리오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펀드매니저가 겨우 두 종목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장기간 계속 보유한다면, 실적이 좋더라도 이는 자산운용사에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고객들이 '내가 왜 이런 펀드에 보수를 지급해야 하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투자 원금이 3배, 4배로 불어나면 펀드매니저는 두 종목을 지극히 사랑하겠지만 고객들의 눈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p.188

기업은 본질적으로 장기적 안목으로 접근하는 반면, 펀드 운용 산업은 본질상 단기적으로 바라봅니다. 금융시장에서 투자자는 단기로 들락거립니다. 이들은 언제든 매도 버튼을 누르고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 경영에서는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들은 멀리 내다보아야 합니다.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진정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인수합병 등으로 잠시 사업을 할 수 없을지라도 기업을 끝까지 이끈다는 가정하에 의사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는 산업의 발전과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바로 제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 크리스티안 시엠, 2012년 7월

 

p.234-236

이 대학의 기금이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은 특출한 투자 전략 덕분이었다. 기금은 버핏과 로젠필드의 지휘에 따라 몇몇 종목을 산 뒤 수십 년 동안 보유했다. 츠바이크는 로젠필드에 대해 <월스트리트 저널>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가 30년 동안 많이 투자한 종목은 여섯 개가 넘지 않았고 좀처럼 처분하지도 않았다." 로젠필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기도 했다.

 

어떤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면 그 주식을 산 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로젠필드가 처음부터 장기로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츠바이크는 로젠필드가 1929년 주식시장 대폭락을 계기로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초기에는 지나치게 단기로 매매했습니다. 스튜드베이커, 닷지, 내쉬 모터스 같은 주식을 한 달이나 두 세달 만에 사고파는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돈을 많이 잃었습니다. 단기로 투자하면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죠.

 

그리넬대학 기금은 미국 국채에는 좀처럼 투자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주 드문 경우였다.

 

국채투자로는 큰 수익을 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보유할 만한 훌륭한 보통주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넬대학 기금은 로젠필드의 간단한 투자 방식을 30년 넘게 이어왔다. 다시 말해 주식을 몇 종목만 매수한 뒤 장기간 보유했다. 버핏은 로젠필드가 "관습을 이겨내고 합리적으로 투자해 성공했다"고 치켜세웠고, 로젠필드는 그리넬대학 기금을 운용하면서 이를 실제로 증명했다. 

 

로젠필드와 버핏은 서로 아는 친구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1967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오마하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버핏은 7,500만 달러가 조금 넘는 사모펀드를 운용하고 있었다. 로젠필드는 "버핏이 정말 좋은 사람처럼 보여서 바로 마음이 끌렸습니다"라고 밝혔다. 버핏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습니다. 조 로젠필드는 정말 너그럽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분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젠필드는 1967년 버핏을 만난 직후 기금에서 5,252달러를 들여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 300주를 샀다. 그리고 버핏에게 이사회에 합류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버핏은 이듬해에야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넬대학 기금은 버크셔 주식을 20년 넘게 보유한 뒤 1989년부터 1993년 사이에 370만 달러에 매각했다. 하지만 처분한 사유는 버핏도 로젠필드도 기억하지 못했다. 

 

p.242-243

고든이 처음 투자 결정을 내린 기업 가운데 하나는 웰스파고였다. 그는 버핏과 버크셔 해서웨이가 투자하기 전인 1990년대 초에 주당 50달러에 거래되던 웰스파고를 사들였다. 그러고는 주가가 단 2개월 만에 90달러로 올랐을 때 처분한 뒤 로젠필드에게 전화했다.

 

제 첫 매매가 성공적이었고 로젠필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정말 자랑하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주식을 사고팔 때 그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몇 개월 전에 웰스파고를 50달러에 샀습니다. 아주 저렴했거든요. 그러고는 90달러에 처분했습니다."

엄청난 칭찬을 기대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꽤 괜찮은 것 같군."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할아버님은 돈을 벌면 결코 파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네.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야 망하지 않는다네."

이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p.254-255

츠바이크는 로젠필드의 투자 원칙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 잘할 수 있는 종목 몇 개에만 집중하라: 로젠필드는 좋아 보이는 이것저것에 나눠 투자하는 대신 훌륭해 보이는 몇 개에 큰 돈을 투자함으로써 10억 달러에 이르는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이해하는 투자 기회를 발견했다면 큰 돈을 투자하라. (중략)

- 참고 기다려라: (단지 몇 년이 아니라 10년 넘게 참는) 인내는 투자자가 가지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로젠필드의 꿋꿋함을 확인해보라. 1990년 그가 프레디맥을 산 직후 주가가 27%나 떨어져 그리넬대학 기금 총액의 3분의 1이 줄었다. 그리고 1979년부터 1998년까지의 누적 수익률을 세쿼이아펀드가 S&P500지수를 능가했지만 전체 기간의 40%인 8년간은 지수보다 못했다. 하지만 로젠필드는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중략)

- 돈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라: 로젠필드는 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아들은 1962년에 죽었고 아내는 197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삶 대부분과 재산 모두를 그리넬대학에 바쳤다.

 

p.271

그러던 중 누군가가 펀드매니저가 투자한 주요 종목에 대해 애널리스트와 논의하게 하자는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후 두 그룹이 실제로 만나 보유 비중이 가장 큰 IBM에 대해 가장 먼저 토의하기로 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그린버그는 운용 경력이 10~15년인 펀드매니저가 사실은 투자한 기업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펀드에서 보유한 기업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아 관련 비즈니스를 꿰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과 논의할 만한 깊이 있는 내용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린버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제지회사에 대해 묻는다면 왜 투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제대로 투자하려면 자금을 잘 운용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이 두 가지는 투자에 꼭 필요한 요소다. 펀드매니저는 애널리스트가 분석한 내용을 공부하지 않거나, 경영진과 만나 얻은 느낌을 확인하지 않거나, 기업을 면밀히 뜯어보지 않는다면 훌륭한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린버그는 이 경험을 통해 어떤 펀드매니저가 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웠다.

 

p.280~281

그린버그는 투자하기 좋은 회사를 발견하면 사업을 분석하는 작업부터 한다. 팀원들에게 재무 추정을 하게 한다. 과거 수치를 '가능한 한 깨끗이 다듬게 하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업을 더욱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는 숫자를 적을 때 컴퓨터보다는 노트에 직접 적는 것을 좋아한다.

 

존 샤피로와 저는 노트에 직접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으로 쓰면 잘못된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 600줄이나 되는 복잡한 컴퓨터용 모델을 사용하다 보면 엄청난 오류가 있어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모델에 모든 가정을 집어넣으면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델에만 의존하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경영진과 관련된 핵심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고 봅니다.

 

또한 연차보고서와 수많은 분기 실적 보고서, 설명 자료를 읽는다. 수치 보고서, 설명회 내용 등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려고 애쓴다.

 

저는 분기 실적 보고서를 즐겨 봅니다. 1년 치를 읽으면 경영진과 사업 전망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중략) 이 사업은 경쟁우위가 있는가? 경쟁은 어느 정도 치열한가? 가격은 올릴 수 있는가? 손실 위험은 크지 않으면서 아주 매력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수준으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사업성이 좋은지 아닌지 따져보는 일입니다. 별로라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린버그는 팀원들이 만든 재무 모델을 살펴본 뒤에는 늘 사업을 더 잘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묻는다. "2008년에 마진이 꽤 좋게 유지된 이유가 뭔가?", "사업이 왜 그렇게 나빠졌나?" "유독 이 분야에서만 자본이익률이 좋은 까닭이 뭐지?" 팀원들이 사업의 핵심 이슈에 대해 생각하고, 모델의 세부 내용에만 매달리지 않게 하려는 질문들이다. 다시 말해 높은 수익성을 가져다주는 요인들이 무엇이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는 핵심 이슈를 검토해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입니다. 대부분은 경영진에 대한 판단 문제에 귀결됩니다. 회사를 이끄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믿을 만한가? 홍보에만 열을 올리거나 현실성이 없는 일에 매달리는가?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아 사업을 키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는 옛 스승이었던 아서 로스와 마찬가지로, 팀원들이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까지 확실하게 아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남들은 대충 알고 넘어가도 뭐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는 팀원들이 완벽하게 알 때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즉 숫자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따집니다. 그래서 제가 던진 질문에 "제 생각에는..., 제가 느끼기에는..., 제 추측으로는..., "과 같이 대답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추측에 근거해 많은 돈을 투자할 수는 없으니까요. 완벽하게 이해하고 가장 최근 수치를 숙지하게 합니다. 한참 지난 수치는 써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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