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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149

성에 p.15 친구는 그 선배와 공유했던 추억들, 그들 사이에 오갔던 은밀한 시선과 사랑의 기호들, 터무니없이 큰 의미를 부여한 사소한 기억들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부풀려진 흔적이 역력했고, 실재했던 이야기라기보다는 친구의 내면에서 희구해온 환상에 가까워 보였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친구의 애통함은 선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환상을 잃는다는 상실감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환상 속 사랑이라면 그 대상의 실체나 생존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려다가 연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환상에 대해 생각할 때 진심으로 궁금한 사항이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순간 치명적인 폭력이 될 것 같았다. p.18 그것을 '알아본다'.. 2022. 5. 23.
은하영웅전설 5 p.41 상황이 격변할 때, 한번 수동적인 입장으로 전락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설령 일방적인 피해자의 입장은 도저히 감수하지 못하는 기골을 지닌 자라 하더라도, 개인 수준의 기력이나 사고를 넘어선 거국적인 상황이 격동하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법이다. 출항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한들 아무리 용을 써봤자 육지에 도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50 이제르론 요새는 긴 회랑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요새란 회랑 양쪽에 서로 다른 군사세력이 존재할 때 비로소 전략적 의의가 있다. 그런데 만약 회랑 양쪽을 같은 세력이 차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르론은 독 안에 든 조약돌과 마찬가지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요새 자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곳에 주둔하는 함.. 2022. 4. 28.
은하영웅전설 4 p.12 [역사의 변천과 승패의 추이는 모두 한 순간에 결정 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 과거로 사라진 그 한순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현재가 그 한 순간임을 아는 자는 얼마 되지 않으며, 자기 손으로 그 한 순간을 미래에 정해놓을 수 있는 자는 더더욱 적다. 게다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더욱 악의를 품은 자가 더욱 강한 의지로 미래를 대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으로 보인다.... ] (D. 싱클레어) p.12 [미래를 예지하는 것, 현재를 직접 체험하는 것, 과거를 간접 체험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모두 매우 큰 스릴을 수반한다. 기쁨에 가득 찬 스릴, 공포에 찬 스릴,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스릴. 가장 큰 것이 아마도 마지막 것이리라. 이를 '후회'라는 단어로 칭하는 자도 많은 .. 2022. 4. 9.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p.11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p.21~22 그 시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닭장 같은 데 갇혀 있는 신세라고 생각했고, 그곳을 벗어나 우리의 인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 인생 - 과 시간 자체 - 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상황을 막론하고 이미 시작돼버렸음을, 그래서 이미 얼마간 득을 봤고, 또 얼마간 손해를 감수했음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런데다 우리가 닭장에서 풀려난다 한들, 처음엔 그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다른 닭장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텐데. p.26~27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 2022. 3. 31.
은하영웅전설 3 p.28 지금 율리안 민츠는 생애 최초로 적을 물리친 것이었다. 그것도 아마 백전연마의 조종사였을 것이며, 분명 그동안 수많은 아군이 그의 칼날에 쓰러졌으리라. 첫 출전한 애송이 때문에 인생의 막을 내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흥분이 몸 안쪽에서부터 체세포를 태우는 듯했으나, 용암의 열류 속에 우뚝 솟은 바위처럼 율리안의 마음 한구석에 싸늘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쓰러뜨린 적은 어떤 사내였을까. 처자식이 있었을까. 아니면 애인이...? 한 대의 발퀴레는 한 병사의 인생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무수히 가지를 쳐 사회 한구석까지 뻗어 나간다. 이것은 감상이 아니다. 한 인생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끊어버린 자가, 자신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뇌리에 새겨놓아야 할 마음인 것이다. p.49 ".. 2022. 3. 17.
불씨 1 p.50 나쁜 사람은 전부 본국사람이며 자신들은 조금도 나쁘지 않으니 우선 개혁해야 할 사람들은 본국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에도에 있는 무리들이 자신을 바꾸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만은 제발 말아주기 바란다. 그런 것들에 집착하게 되면 아무것도 추진할 수 없게 되네. 그리고 그런 문제에 연연하다가는 우리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잊게 되는 결과를 낳지. 소중한 사람들의 존재를 잊고 우리가 사소한 감정싸움에만 매달리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바라는 우리들이 먼저 자신부터 변화시켜서 본국까지 여세를 몰고 가자는 거지. p.59~60 조직에서 밀려나고 따돌림을 당한 인간은 대부분 마음속에 자기를 소외시킨 자에 대해 개인적인 원.. 2022.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