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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150

휘둘리지 않는 힘 p.27 햄릿이 내던져진 무대, 햄릿의 존재가 처해 있는 구조를 봐야 한다. 햄릿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친부의 살인자이자 왕위 찬탈자, 그런 왕을 추대하고 추종하는 공신 그룹,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외국의 군대들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부를 죽인 현재의 왕과 재혼했고, 애인의 아버지와 오빠조차 자신의 편이 아니다. 친구들도 현재의 권력 편에 붙어서 그를 배신하고 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복수를 완성하고 빼앗긴 왕권을 되찾아올 것인가, 햄릿 왕자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낭만주의자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용의주도함은 우유부단으로, 고통은 우울로, 무사로서의 과단성은 광기로 묘사되었다. p.. 2016. 11. 5.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p.56 우리가 문학이란 이름으로 행해온 비판적 지성의 모든 것들이 어딘가 보일 듯 말 듯한 과거의 것으로 숨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공동의 문제, 우리 공동의 명제, 우리 공동의 전망이 이렇게도 가위로 오려낸 듯이 사라져버릴 수 있단 말인가. p.62가족들이 확실히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 하나 줄어들어 문득 나 혼자 여기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 같다.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이렇게 나만 남게 되었다. 정말 SF다. 우주의 어둠이다. p.87해체된 소련 연방, 샅샅이 토벌되는 오르그의 사람들, 모스크바의 식량 폭동, 강남의 휘황한 불빛-기고만장한 졸부들의 축제, 천안문의 학살, 미국의 역겨운 미소, 저 거대한 절벽에 얼어붙은 우리들의 찌.. 2016. 10. 16.
렉싱턴의 유령 p.60~61 "내가 권투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거기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때리는 거나 맞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건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으면,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지요. 사람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건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권투는-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그러한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오르면 때때로 나 자신이 깊은 구덩이의 밑바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끔찍하게도 깊은 구덩이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누구도 나를 볼 수 .. 2016. 10. 15.
방각본살인사건 p.62 진정한 벗 한 사람을 얻게 된다면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일 년간 누에를 쳐서 오색 실에 물을 들이겠소. 열흘에 한 빛깔씩 만들어 쉰 날 동안 모두 다섯 빛깔 실을 준비하겠소이다. 이 실들을 다시 봄볕에 쬐어 말린 다음 아내에게 그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겠소.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높은 산과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 펼쳐 놓고 마주보며 한나절 말없이 있다가 황혼이 들면 품에 안고 돌아오고 싶소이다. 2016. 8. 25.
핑퐁 p.29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p.29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p.30스스로는 단 한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 믿고 있는, 그러니까 인류의, 대표의, 과반수. 조용하고 착한, 인류의 과반수. 실은, 더 잘해주고 싶었을, 인류의 대다수. p.34꿈이 있다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 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 2016. 7. 28.
종의기원(1) p.67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해진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해진을 봤다."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p.139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p.171세상에는 외면하거나 거부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일이 그렇고, 누군가의 자식이 된 일이 그러하며,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그렇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추측항법으.. 2016. 7. 21.